HIDDEN CARD: 히든 카드

ESPER: 초능력자 [14]

힘들게 정리를 끝내고 돌아오면, 이미 해는 저만치 지고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수업도 진작에 끝난 시간이었기에 여주는 별다른 말 없이 바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다른 학생들이 쓰는 기숙사 내부와는 달리, 여주가 쓰는 방은 사뭇 분위기부터가 싸늘했다. 하얀 공간에 침대와 정말 최소한의 옷만 넣을 수 있는 서랍장이 다였다.

이는 누가 일부러 그렇게 배치한 것이 아니었다. 간혹 여주가 자신의 능력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면,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 물건들이 하나둘 흡수되어 사라지니, 그 결과물이 바로 이것이었다.

김여주

"……윽."

방으로 들어온 여주는 문을 닫자마자 오른팔을 움켜쥐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사람들 앞에서는 티내지 않으려 했던 것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식은땀이 온몸을 적시고, 능력의 파동이 오른쪽 어깨부터 손끝까지 둘러감싸며 압박했다. 쿵. 쿵. 오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려서 그런가, 심장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파스스–

숨을 헐떡이며 파동을 갈무리해봤지만, 한 발 늦었다. 여주의 능력은 제멋대로 주변으로 퍼졌고, 그로 인해 침대가 있던 자리가 깨끗하게 비었다.

그 와중에 조금 늦게라도 능력을 회수해서 다행인지, 침대의 나무 부스러기가 바닥에 남아 방금까지도 그곳에 침대가 있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주는 이를 악물고 서랍장까지 기어갔다. 옷이 들어있든 그외의 것이 들어있든 신경 쓰지 않고 무작정 헤집어 맨 안쪽에 있는 칼 한 자루를 찾았다.

김여주

"하아…. 하아…."

슥–!!

김여주

"…윽!"

마치 조선시대에 있을 법한 칼을 칼집에서 빼낸 여주는, 한치의 고민도 없이 왼손으로 칼을 잡고 칼날을 돌려 자신의 오른팔을 쭈욱 그었다.

길이와 각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베어 깊은 상처는 남기지 않았지만, 피가 후두둑 떨어져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고통 섞인 신음과 함께 칼을 떨어트린 여주는 가쁜 숨을 몰아내쉬며 벽에 등을 기댔다.

오른팔에 온신경이 쏠리니, 더 이상 능력이 퍼져나가지 않았다. 흡수라는 능력의 압박 탓에 터질 것 같던 고통을 느끼던 팔이 이제는 쓰라린 고통만을 남겨두었다.

김여주

"하아……."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해 한숨이 흘러나왔다. 우습게도, 오른팔에 쭉 그어진 칼자국보다 텅 비어버린 방의 풍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김여주

"…오늘부터 바닥에서 자야겠네."

이제는 옷을 넣을 서랍장만 남았다. 가뜩이나 혼자 쓰기엔 너무 커 보였던 방이 더 커졌다. 여주는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오는 노을빛을 멍하니 바라봤다.

여주의 기억이 시작되는 시점도, 노을이었다. 그때 당시의 여주는 6살이 막 되어 생일을 맞이하던 차였고, 원래 생일에는 친구들과 가족과 생일 축하를 해야 한다는 아빠의 말에 마을 친구들을 생일 파티에 초대하려고 했을 때였다.

김여주

"얘들아! 나 오늘 생일이야! 생일에는 친구들이랑 가족이랑 집에서 생일 축하하는 거라던데…. 우리집에서 같이 맛있는 거 먹을래?"

"싫어! 넌 네 생일이 좋니? 너희 엄마가 죽은 날이잖아!"

"하긴, 자기가 직접 죽였으니까 할 말이 없겠지! 가자, 얘들아! 우리 엄마랑 아빠가 김여주랑은 놀지 말랬어!"

그때 당시의 여주는 자신의 생일이 엄마가 죽은 날과 같다는 것보다 자신의 친구들이 생일을 축하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 슬펐다.

그래서 괜히 이 세상에 없는 엄마를 미워하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이 왜, 자신에게 '엄마 잡아먹은 자식'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어느 날, 여주가 아빠에게 할아버지를 집에 모셔오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였다. 할아버지는 여주가 태어난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였고, 이 사실은 마을 사람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집에 안 계시다는 것을 알고, 여주는 할아버지가 자주 가던 술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술에 취해 여주와 여주의 엄마에 대해 이야기하는 할아버지를 발견했다.

"난 아직도 그날을 잊을 수 없어!! 히끅, 그 악마 같은 년이 내 딸을 집어삼키고 나오는 모습을… 내가 어떻게 잊어!!! 히끅!"

"아이고, 애가 다 듣는데 뭐하는 거예요!! 술주정 부리지 말고 얼른 가요, 가!!"

여주가 온 것을 알고, 술집 주인이 할아버지를 말렸지만 할아버지는 밀릴 생각도 하지 않고 오히려 더 목소리를 크게 했다.

"악마 같은 년!!! 그 년만 아니었어도 내 딸은 살았어!!! 내가 똑똑히 봤다고!!! 그 년이… 그 년이 내 딸 몸을 흡수했어…. 내 딸은……."

김여주

"……."

"내 딸은 시체도 안 남았다고!!!!!!!"

"어, 여, 여주야!!!"

할아버지가 내뱉는 말을 끝까지 들을 수 없었다. 중간에 술집을 뛰쳐나오니, 뒤에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여주는 울컥 터지는 눈물을 훔치며 곧장 집으로 달렸다.

악마 같은 년. 엄마 잡아먹은 자식. 왜 자신이 그런 말을 듣는지도 몰랐고, 그 욕의 의미가 뭔지도 정확히 모를 나이였다. 하지만, 6살의 나이여도 알아들을 건 알아들었다.

여주는 그때 알아차렸다. 자신이… 엄마의 몸을 흡수해 태어났다는 사실을.

무작정 집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사람들을 피해 온 집에는 아빠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여주야, 할아버지는? 안 오신대?"

김여주

"…아빠."

"어, 여주야, 왜 울어. 넘어졌어?"

김여주

"흑, 아, 아빠…. 내가 엄마 잡아먹었어…? 큽…."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누가 그래."

김여주

"하, 할아버지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엄마를 잡아먹어서 그렇다고…. 이 세상에 시체도 없다고…."

"…울지 마. 그런 거 아니야. 할아버지 말씀이든 마을 사람들 말이든 신경 쓰지 마. 응? 울지 마, 여주야."

김여주

"거짓말!!!!!!! 그런 거 맞잖아!!!!! 흑…. 내가… 내가 엄마 잡아먹은 거 맞잖아!!!!"

아빠가 거짓말을 했다. 여주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보다 아빠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더 크게 다가왔다.

여주는 눈물을 터트렸다. 아빠가 달래주려 여주에게 다가가려했지만, 여주에게 다가갈수록 몸이 무언가에 강하게 끌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쉽사리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그에 상처받은 건, 여주였다. 여주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아, 이제 아빠도 날 싫어하구나. 더 이상 날 딸로 생각하지 않는구나. 마을 사람들이랑 똑같이… 날 악마라고 생각하겠구나.

김여주

"…필요 없어."

"…여주야!!!!"

김여주

"다… 다 사라져버려."

그냥… 투정 같은 거였다. 이렇게 말해도 아빠가 날 안아주며 달래주길. 그런 거 아니라며 내 눈물을 닦아주길. 머리를 쓰다듬으며 엄마는 날 사랑했다 말해주길.

그래, 그런 단순한 투정에 불과했는데….

파앗–

눈 깜짝할 사이에, 정말 딱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마을의 중심부가 사라졌다.

김여주

"아… 아빠……?"

눈앞에 서 있던 아빠도, 집도, 이웃 사람들과 그들의 집 모두 사라졌다. 여주가 서 있던 자리를 중심으로 땅이 원모양을 그리며 움푹 파였다.

마치 땅 자체가 사라진 것만 같았다.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익숙한 집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오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한 손에는 술병, 한 손에는 지갑을 들고 오시는 모습이 이제 막 술집에서 나온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술에 취한 와중에도 이 고요한 상황을 이상하게 생각한 것인지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내려두고 두 눈을 비볐다. 할아버지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아… 악마…."

김여주

"할아버지…. 아, 아빠가……."

"악마다!!!!!! 악마야!!!!! 당장 죽어!!! 이 악마!!!!"

할아버지는 윽박을 지르며 여주에게 달려갔고,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은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 이곳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사라진 마을의 중심부와 그곳에 있던 여주. 누가 봐도 여주가 한 행동이라고 생각할 만했다.

마을 사람들 중 몇몇은 얼이 나간 채로 움푹 들어간 땅에 발을 들였고, 몇몇은 집에서 농기구를 가져와 여주를 공격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엄마를 잡아먹은 것도 모자라 너희 아빠까지 잡아먹어?! 이 악마야!!!!"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을 공격하려드니, 목숨에 위협을 느낀 여주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도망치고,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정해진 목적지가 없이 하염없이 걷는 건 생각보다 고된 일이었다. 돌아갈 곳이 없는 여주에겐 더욱 그러했다.

애석하게도 아빠를 잃었다는 슬픔을 느끼기 전에, 허기를 먼저 느꼈다. 살기 위한 본능이었다. 그렇게 먹을 거리를 찾아 헤맬 때쯤, 여주는 그 사람을 만났다.

"안녕, 꼬마야. 네가… 김여주 맞지?"

김여주

"…누구……."

"내 이름은 차해준이야. 센터에서 널 데리러 왔어."

김여주

"…나를요? 왜……."

"넌, 흡수 에스퍼니까."

그때 차해준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더라도 절대 그 손을 잡지 말았어야 했다.

지옥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던 내게 내밀어진 손은, 또 하나의 지옥으로 안내해 주기 위함이라는 걸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주는 아직 자신의 능력을 '완전하게' 컨트롤하지는 못해요. 저번 편까지 나온 화에서는 방탄의 시점도 함께 나왔기에 여주가 완전 개센캐로 나왔지만, 사실 여주는 아직 '불안정한 상태'예요.

여주가 자신의 능력을 컨트롤 잘할 때는 이성을 유지하고 있을 때예요. 간혹 이성을 잃고 부정적인 감정에만 충실하게 된다면 능력이 여주의 손을 벗어나게 되죠.

오늘은 여주의 과거편만 다루어 보았어요. 워낙 중요한 부분이라 안 짚고 넘어갈 수가 없더라고요! 떡밥도 많이 있으니, 다음 화 보실 때 더 즐겁게 보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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