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12.작고 따듯한 밤


주방의 불빛은 부드럽게 낮게 깔려 있었다.

하얀 조명이 머리 위에서 잔잔히 퍼지며,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을 조용히 덮었다.

세연은 잠깐 멈칫하더니, 갑자기 부스럭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정세연
“어, 아… 좋아요! 제가 끓일게요!”

긴장감 섞인 말투.

그녀는 가볍게 앞머리를 넘기며, 빠른 걸음으로 싱크대 쪽으로 향했다.

작은 손이 서랍을 열고, 냄비를 꺼내 들고, 물을 채우는 동작 하나하나에 다급함이 배어 있었다.

정세연
“저 라면 잘 끓여요. 스프 넣는 타이밍 진짜 중요하거든요… 시켜만 주세요!”

말끝엔 기분 좋은 자부심이 묻어났다.

세연은 물을 붓고 냄비를 올리며 호들갑처럼 분주했지만,

그 모습 자체가 마치 오래 이 집에서 살아온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명호는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다,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두 손을 뒷짐 진 채, 주방에서 한 걸음 물러 선 그의 눈엔 낯설고도 익숙한 풍경이 담겨 있었다.


디에잇(명호)
‘누가 보면 진짜 여기 오래 산 사람 같다…’

그녀가 팔소매를 걷으며 서툴지만 진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오히려 명호에게 이 집을 처음 '집답게' 만들어주는 듯했다.

냄비에 물이 점점 끓기 시작했다.

세연은 포장지를 조심히 찢어 면을 넣고, 눈대중으로 가루스프를 뿌렸다.

그 순간, 그녀는 문득 명호 쪽을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정세연
“근데… 모델이시면, 라면 먹어도 돼요? 막 체중관리 엄청 엄격하다고 하던데…"

말투는 신중했지만, 눈빛엔 궁금함이 가득했다.

그 말에 명호는 잠시 멍한 얼굴로 그녀를 보다가 바로 고개를 숙이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디에잇(명호)
“으...아아 하하하—진짜… 아직도 그렇게 생각해요?”

웃음소리가 깊었다.

그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어깨를 살짝 들썩였다.

세연은 놀란 듯 그를 바라보다가, 당황한 얼굴로 뒷말을 급히 덧붙였다.

정세연
“어… 아, 아니에요? 죄송해요! 모델 아니셨어요? 저 혼자 착각한 건가…?”


디에잇(명호)
“…뭐, 모델이든 아니든. 이렇게 누가 직접 라면 끓여주는 건 오랜만이라서요."

말은 담담했지만, 그 안에 놓인 감정은 분명 따뜻했다.

세연은 그 말에 얼굴이 화끈해지듯,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귀끝까지 붉게 물든 걸 명호는 못 본 척했다.

불 위에서 보글보글 끓는 냄비.

면이 부풀어 오르고, 익어가는 소리와 함께 라면 특유의 고소한 향이 공기 사이를 천천히 채웠다.

명호는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디에잇(명호)
‘내가 뭐 하는지 알려줘야 하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네.


디에잇(명호)
그냥… 이렇게 있는 게 좋다.'

그의 시선은 조용히 시연의 옆모습에 머물렀다.

살짝 앞으로 기운 어깨, 가볍게 웅얼거리며 불 조절을 하는 입술,

그리고 작지만 집중한 손놀림. 그녀의 움직임은 전혀 특별하지 않았지만—

이 집 안에서 처음 느껴지는 ‘사람의 온기’였다.

라면 하나 끓이는 풍경이 이렇게 따뜻할 줄은, 명호 자신도 미처 몰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