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마지막이길 바라"

05. 삼자대면

"오늘이 마지막이길 바라"

제5화. 삼자대면

태형과 인사를 하고 만남을 끝낸 뒤에 집에 돌아온 지금. 아직까지도 내 곁에는 그의 체향이 맴도는 기분이었다.

향을 잘 아는 사람이라서 그런가, 어쩜 그렇게 자기 이미지에 잘 맞는 향수를 뿌리고 다니는지.

강렬하면서도, 소박했던 재회가 은근하게 내 마음을 뛰게 만드는 것 같았다. 분명 나는 오늘이 마지막이길 바랐는데…

왜인지 앞으로 너를 계속해서 만나게 될 것만 같은 기분이다.

입었던 외투는 소파 등받이에 걸어두고 부엌으로 향해서 유리 주전자에 물부터 담고, 찬장에서 녹차 티백을 꺼내들었다.

하루 동안 집에 사람이 없었더니, 그동안 한기가 채워진 건지 너무 추워서 몸을 데워야만 할 것 같았다. 물론 들어오자마자 난방을 틀었긴 하지만.

그렇게 가스레인지 위에 얹어둔 주전자 속 물이 거품을 만들어내며 보글보글 끓는 것만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전정국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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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응, 나 방금 들어왔어.

-"뭘 했길래 방금 들어갔어. 누구 만났어?"

아, 뒤늦게 깨달았다. 얘는 내가 김태형을 만났다는 걸 모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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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응, 잠깐 아는 사람 좀 만나서 이야기 한다고….

-"늦었는데도 다행히 무사히 들어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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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이 정도면 나 길치 탈출이야. 안 그래?

-"그건 좀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은데."

짓궃기는. 피식, 웃은 나는 핸드폰을 귀와 어깨 사이에 끼고 물이 끓고 있는 주전자를 들어 투명한 잔에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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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아 참, 너는 잘 들어갔어?

-"잘 들어왔지. 그 선배가 많이 취한 모양은 아니더라고."

-"그 선배 집이 내 집이랑 그렇게 안 멀어서, 데려다 드리고 걸어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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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수고했네.

티백 봉투를 입에 물고 한 손으로 잡아 찢은 후에, 잔에 넣으면 투명한 물에 서서히 퍼지는 푸른빛이 제법 보기 좋았다.

잔을 들고서 다시 핸드폰을 바로잡고 거실로 향하는 동안, 그와 하는 통화는 계속됐고.

···

씻을 때가 되서야 마무리된 전화. 내일도 역시 같이 출근 하자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고서 샤워까지 끝냈다.

머리는 안 말리고 수건으로만 돌돌 말아올린 채로 이불이 가지런히 펼쳐진 침대로 드러눕는데, 이때만큼 기분 좋을 때가 없다. 진짜.

방 안 전등은 꺼져 있고, 침대 옆 은은한 불빛의 램프에만 의지한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핸드폰에서 울리는 알림음.

어쩌면 가장 듣기 싫은 소리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이 램프 아래 탁상으로 손을 더듬거리며 뻗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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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하. 맞다, 리포트.

외근 다녀와서 메일로 보낸다는 게… 깜빡한 모양이다. 팀장님으로부터 톡이 오는 순간, 사고 회로가 정지됐던 것 같다.

그래서 그때 다짜고짜 일어나서 방 안 전등을 켜고, 노트북을 펼쳤는데… 배터리가 없네?

급하고 초조한 마음에 충전기 꽂으면서도 침대 모서리 쪽에 발등 찍힌 것도 모르고 지나쳤다. 와, 한사라 정신 차리자 제발.

다음날, 어김없이 전정국과 함께 하는 출근길. 어제 새벽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자, 친구라는 녀석은 낄낄 웃어만 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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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나 오늘 사직서 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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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팀장님 얼굴 어떻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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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뭘 그런 것 가지고.

다 웃어 놓고서는 이제 와서 위로를 전하는 너에, 조금은 어이가 없다가도 한층 기분이 나아지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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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팀장님이 더 놀라셨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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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너 이런 실수 한 적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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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아,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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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어제 무슨 일 있었어?

밤에 누구 만났다며.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려 묻는 그에, 어깨를 으쓱했다.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실은 별 일이 아닌 게 아니었지만 말이다. 어제 갑자기 나타난 그로 인해 내가 이런 실수를 저질렀다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

원래 무슨 일이 있어도 이런 실수는 안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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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오늘은 설탕 안 넣었어?

정국이 타 온 커피를 가만 마시다 보니, 오늘따라 유독 끝 맛이 텁텁하고 쓴 게… 맛이 없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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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설탕 두 스푼 똑같이 넣었어, 늘 마시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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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아닌데.

원래 이렇게까지 쓰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오늘은 왜인지 너무 써서 그다지 손이 가진 않았다.

···

이른 아침, 한창 직원들이 출근하는 시간. 오늘따라 유독 속은 안 좋은 데다 아랫배에서 시작되는 통증에 정국에게는 대충 둘러대고 화장실에 온 상태.

설마… 싶어 예정일을 확인하는데 아직 나흘이나 남았길래 의아했다. 아침에 마신 커피가 잘못됐나.

혼자서 식은땀만 뻘뻘 흘리며 어쩔 줄 몰라 세면대 붙잡고만 서있는데, 그때 마침 팀장님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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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아, 팀장님. 안녕하세요.

"응. 한 대리- 좋은 아침."

옆에 나란히 선 팀장은 파우치에서 립스틱을 꺼내들더니 입술에 혈색을 더하고선 거울 속 자신을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아 참, 한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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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네, 팀장님.

이때만 해도 어제 일 때문에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다. 그래… 기꺼이 욕이든 충고든 받겠습니다-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 회사 창립 60주년 맞아서 하는 축하연 말이야-."

"그거 어제 한 대리가 다녀온 식물원에서 하기로 결정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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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아, 정말요…?

다시 생각해도 우리 회장님 취향은 특이하시다. 무튼… 이게 문제가 아니겠지.

"오늘 그 식물원 담당자가 오신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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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그래요?

어제 그렇게 어색했던 만남을 또다시 가져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이제는 속뿐만이 아니라 머리까지도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불과 며칠 전의 외근을 다녀오겠다고 자신 있게 앞장섰던 내가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이 일을 내가 진행하는 게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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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지금 바로 회의실로 가 있으면 될까요?

"응, 아마 오셨을 것 같아."

"아… 그리고 듣기론, 또 한 사람이 더 오신다고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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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다른 분은 뭐 하시는 분인데요…?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가서 만나보면 소개해 주실 거야. 아무튼, 수고해. 라는 말을 끝으로 이곳을 먼저 벗어난 팀장. 숨을 몇 번 고르던 사라도 이내 이곳을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어두운 낯빛을 알아차린 정국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어디 안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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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아니. 별 거 아니야.

옆자리라서 칸막이 옆으로 고개만 내밀면 대화할 수 있는 거리에 있던 우리라, 수첩을 챙겨 회의실로 가려는 내 팔목을 붙잡는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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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정말 괜찮은 거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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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어. 정말 괜찮다니까.

나 회의 있어서 가봐야 해-. 넌 네 일이나 보세요. 장난스레 웃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날 걱정하는 듯한 네 눈빛에 왜인지 모르게 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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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누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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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있어, 그런 사람.

어차피 박지민이라는 걸 곧 너도 알게 되겠지만,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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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이만하면 나 좀 놔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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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내가 같이 안 가도 돼?

나 혼자서 할 수 있어. 픽, 웃어보이자 그제서야 천천히 내 팔목을 놓아주는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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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조심해. 오늘 너 상태 안 좋아 보인다.

친구 세월 못 속이는지, 몸 안 좋을 때마다 귀신같이 알아내는 얘를 보면 조금 신기하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바로 회의실을 향했는데…

머지않아 전정국을 데려오지 않기를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고.

제 첫사랑과 마지막 연인이 함께 있을 줄.

진짜 한사라 인생도… 만만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