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마지막이길 바라"
06. 침묵 전쟁의 서막



"오늘이 마지막이길 바라"



제 6화. 침묵 전쟁의 서막



정말이지, 막장 드라마 각본을 이렇게 써도 욕 먹을 수준이었다. 이게 무슨 클리셰 범벅이냐고.


한사라
…아. 하하.


한사라
안녕하세요, 한사라 팀장입니다.

우선 이 당황스러운 상황을 사람 좋은 웃음으로 무마시키려 했다. 올라가지도 않는 입꼬리를 올려가며 그들의 자리를 안내한 후에야 자리에 앉았다.



박지민
어제도 보셨겠지만… 박지민입니다.





김태형
김태형입니다. 이번에 박지민 씨랑 같이 일하게 됐어요.

이건 또 무슨 조합인가. 두 남자가 같이 일을 하게 돼서… 앞으로 계속 이 둘을 봐야 한다?


한사라
…그렇군요.

두 남자의 시선은 오로지 나를 향했다. 정말이지, 많이. 아니, 존나 부담스러웠다. 지금 이 둘은 각각 내 전남친이었고 짝사랑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고…!

혹여나 이 둘과 내 관계를 아주 잘도 알고 있는 전정국이 마주친다…? 그날 부로 한사라 인생 마감. 어색하다 못해 그냥… 죽고 싶을 것 같다.

이건 진짜 미친 거 아니냐고. 이제 어이 없다 못해 환멸할 지경. 이 세상 하늘이 내 전생의 원수였던 게 틀림없ㅇ…


한사라
…우리 그럼 진행을, 좀 해볼까요?



···


대략 두 시간 후.

회의실에서 순서대로 나온 나와 남자 둘. 다행히 사적인 이야기는 오고 가지 않아서 그런지, 회의는 막힘이 없었다.

단지 내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었을 뿐. 두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고 태연했다.


김태형
점심 시간이네요.


김태형
팀장님 저희랑 점심 같이 안 하실래요?


한사라
아… 점심이요?

먹다가 얹혀서 먹은 거 도로 다 뱉어낼 일 있나요. 속으로 뭐라 대답해야 하지 뭐라 해야 하지 머리 굴리다 이내 입을 열었다.


한사라
저는 따로 먹을 사람이 있어서….

그냥 말만 이렇게 하면 두 사람이 안 믿을 것 같길래, 냅다 전정국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발 받아라 받아라 빌면서.



한사라
아, 여보세요?


한사라
나 지금 예약한 곳으로 출발하려고.

응, 지금 막 회의 끝났어. 전정국 말은 들을 생각도 안 하고 속사포로 내 말만 밀어붙이기 바빴다. 핸드폰 너머로 느껴지는 정적이 그가 한껏 당황했음을 알게 해줬다.


한사라
아, 너 이미 도착했다고?


한사라
알았어, 금방 갈게.

내 말에 어리둥절하다가 겨우 내뱉은 말이 "…뭐하냐, 너." 이 진지한 한 마디. 그때 더 잔소리 듣기 전에 후다닥 끊어버렸다.


한사라
…^^


한사라
그럼 저희는… 다음에 뵙죠.

꾸벅, 이제 이쯤이면 가주라…라는 마음으로 인사를 건네곤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김태형과 박지민 이 두 사람이 먼저 뒤도는 걸 확인하고서 뒤 돈 나도 사무실로 올라가려 하는 참…


한사라
…?!



미친. 전정국이 여기로 걸어오고 있었다.


혹여나 저 둘과 마주칠까 마음이 조급해진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아직 날 발견 못한 그를 향해 달려갔다.

오도도도- 오늘 스니커즈를 신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으로 그에게 다다르자마자 그를 이끌고 서둘러 이 층을 벗어났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애 다짜고짜 붙잡고 아무 식당으로 들어온 지금.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은 나는 숨을 고르기 바빴다.


한사라
…아 힘들어.


전정국
달리기도 못하는 애가 뛰기는 왜 뛰어가지고.

자리에 주저앉다시피한 내가 숨을 몰아쉬고 있으면, 천천히 자리에 앉는 정국이었다.


한사라
…나 물 좀.

내 말 한 마디에 즉각 반응한 녀석은 물컵에 물을 따르더니 나에게 건넸다. 그리고선 자연스레 메뉴판을 꺼내들었고.


전정국
뭐 먹을래?


한사라
…뭐 있는데?

이제 겨우 진정돼서 메뉴판 보려 고개 쑥 내미니까 오히려 얘가 자세를 뒤로 빼더라.


한사라
이거 맛있겠다, 순두부.


전정국
그럼 넌 이거 하고…


전정국
난 비빔밥으로.

곧이어 직원을 부른 정국이 주문을 하고… 나는 조금의 틈을 타 핸드폰에 쌓인 알림을 여럿 보고 있었다.



전정국
몸은 좀 어때, 괜찮아?


한사라
…어?

아까 아침에 컨디션 안 좋던 나를 꽤 걱정했는지, 무심한 듯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지는 그가 조금 웃겼다.


한사라
아- 괜찮아.

더 충격받는 일이 생겨서 그런지, 제대로 가누기도 힘들던 몸이 어느 순간 싹 나은 모양인가 봐...


한사라
그냥 아침에 먹은 게 잘 소화가 안 됐나 보지.


전정국
아침에 뭐 먹었는데.


한사라
크루아상 한 개.


한사라
…아, 그거 유통기한 지났었나?

곰곰이 유통기한을 떠올리는 동안, 그런 내 태도가 어이없다는 듯이 막 웃기 시작한 녀석이었음을.


한사라
웃지 마- 나 아침에 지인짜 아팠어.


전정국
알지, 그렇게 보이더라.


머지 않아 음식이 나오고… 이제 막 식사를 시작하려던 참.

내 앞에 수저를 놓아주던 네가 입을 열었다.



전정국
아까 박지민이랑 회의했다며.


한사라
…?

커흡. 맛보려고 한 숟갈 떴던 국물이 목에 걸려버렸지 뭐야. 고춧가루가 걸렸는지, 매워 죽을 지경이었다.


한사라
…알고 있었어?

그런 나를 보더니 비워진 잔에 물도 채워주고, 휴지도 건네주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의 전정국.


전정국
모를 수가 없지. 팀장님한테 들었어.


한사라
……와우.

그만 넋이 나가버려서 영혼 없는 박수를 짝짝 쳤다. 나 앞으로 어떡하지. 회사 관둘까. 진짜 그냥 아무도 모르게 떠나 버릴까.

그 순간에 오만 가지 생각을 다 했다.



한사라
…너, 그것만 들었어?


전정국
뭐가 더 있어?


한사라
…….


한사라
……어.

불행하게도 그렇단다.



전정국
왜, 무슨 일.


한사라
…그게 그러니까 말이지?


한사라
듣고 놀라지 마.

내가 조금씩 뜸을 들이니까, 보통 일이 아님을 직감한 정국이 먹다 말고 숟가락을 내려놓더니 날 응시했다.

그렇게 정적의 기류가 흐르고… 마침내 결심한 내가 입을 열었다.



한사라
…김태형도 있더라, 거기에.

박지민이랑 같이 일한다더라, 걔가.



이걸 지금 말하고 있는 나 자신도… 이게 뭔가 싶다. 정말.

제법 울고 싶다.



++ 이제 매 화 만나는 네 사람 간에서 미묘하게 흐르는 기류가 관점 포인트가 되실 겁니다.

++ 세 남자 간의 은근하디 은근한 신경전이 킬링포인트.


+++참고로, 정국은 사라를 거쳐간 모든 남자들을 알고 있는 정말 오래된 찐친이에요. 물론, 사라의 학창시절 첫사랑인 태형이는 말로만 들었지 한 번도 보진 못 했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