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마지막이길 바라"

08. 무의식

"오늘이 마지막이길 바라"

제 8화. 무의식

06:14 AM

평소보다 늦게 잠들었던 어제. 사라는 평소처럼 일어나 어제 미처 치우지 못한 와인잔과 술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바빠서 몰아둔 설거지도 하고, 건조대에서 가져온 옷을 차곡차곡 개어 옷장에 정리하는 것까지.

중간중간 떠오르는 어제의 기억에, 이 텅 빈 공간이 사라가 내뱉은 옅은 한숨으로 메워지기도 했다.

그리고 역시나 오늘도 정국으로부터 도착한 문자. 몇 시즈음 나올 수 있냐는 질문에, 사라는 평소와 다른 답을 보냈다.

'오늘은 너 먼저 가 있어.'

아직 마음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어제의 통화로 인해 더더욱. 심란하고, 복잡하고, 자기도 제 감정을 모르겠는 와중에…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이렇게까지 공과 사를 구분하고 싶지는 않았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던 거겠지.

집안일을 끝내고, 이제 출근 준비를 할 시간. 옷을 다 갈아 입고 가방을 챙기려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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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아.

어제 회사에서 겪었던 것과 같은 통증이었다. 아니 어쩌면 더 심해진 것 같기도 했다.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른 사라는 급기야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너무 아프면 말도 안 나온다는 그 말이 지금과 딱 맞아떨어졌다. 얼굴이 사색이 된 사라는 가방에 있을 핸드폰을 찾기 위해 가방을 일부러 바닥에 떨궜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쏟아진 소지품 더미에서 핸드폰을 찾아내어, 여전히 배를 움켜쥔 채 통화를 눌렀다.

시야는 흐려지고, 정신은 아득해지는 와중에… 누구에게라도 연락을 해야겠다는 의지는 들었던 사라.

누구에게 건지 모를 통화 연결음이 끝없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 잠깐의 시간동안, 사라에게서는 식은땀이 물 흐르듯 흐르고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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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제발. 제, 발….

그리고 마침내 상대편에서 받아든 전화. 그게 누구든 간에 사라는 제 정신이 끊기기 직전까지 외쳤다.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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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제가, 지금… 너무 아파요…….

···

"……께서는, 지금 휴식이 필요하신 상태입니다."

"환자분이 깨어나시면 좀 더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요 근래 몇 달간 자주 아프셨겠어요."

"…요즘 많은 사람들이 앓고 있긴 하지만, 완치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경우가 많아서…."

"혹시, 환자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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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

눈을 떠보니 익숙하지 않은 천장과 배경이 나를 맞이했다. 코 끝에 닿는 이질적인 냄새가 절로 눈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시선을 옆으로 돌리니, 하얀 가운을 입은 누군가와 그 앞에 서있는 또 다른 남자.

똑바로 쳐다보려 해도 흐릿한 시야로 인해 볼 수가 없었다. 아무리 눈을 깜빡여봐도… 이제는 어지러울 지경.

우선 내가 깨어났다는 걸 어필하려 있는 힘껏 목소리를 냈더니, 동시에 나를 향해 다가오는 그들.

그와 동시에 기억이 끊겼던 듯하다, 아마.

또다시 내가 눈을 떴을 때에는 창밖의 모습이 꽤나 어두워 보였다. 아까는… 자세하진 않지만 낮이었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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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

미친. 김태형이 대체 여긴 어째서, 왜 온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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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김태형?

애써 당황한 모습을 뒤로하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으니까, 깨어난 날 보고 덩달아 놀란 눈빛의 그는 벽면에 붙어있는 간호사 호출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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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정신이 좀 들어, 한사라?

큼지막한 그의 손은 내 이마를 향했다. 이마를 덮은 따뜻한 촉감이 마음을 안심하게끔 만들었다.

내가 무의식중에 전화를 걸어도, 하필 너에게 걸었던 거였구나.

어쩌면 나는 널 아직까지 그리워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너는 날 그간 잊고 있었을지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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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응, 괜찮아.

그의 도움으로 상체를 일으켜 앉자, 뒤늦게 밀려오는 갈증으로 인해 목이 바짝 말라가고 있음을 알았다. 나 물 한 잔만.

침대 옆에 위치한 선반에 놓인 생수병 하나를 까더니, 내게 내민 그는 다시금 의자에 앉았다. 오늘 안 깨어나는 줄 알았어.

그의 말에, 내가 뭐라 더 말하기 전에 들어오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분들.

내 앞에 서더니, 이내 차트를 확인하며 입을 떼시는 선생님이었다.

"환자분, 상태는 좀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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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괜찮아요.

"평상시에 혹시, 속이 쓰리거나 더부룩하다거나… 그런 증상이 자주 있던 편이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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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어, 그랬던 것 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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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아… 복통은 자주 있는 편이긴 한데….

"커피 자주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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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거의 매일… 두 잔씩은 마시는 것 같아요.

"아픈 증상은 얼마 정도 유지되고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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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1년… 가까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동안 병원은 한 번도 안 오셨고요."

뭐지, 이 어디서 겪어본 분위기…? 마치 엄마아빠한테 혼나고 있는 기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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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넵. 제가 좀 바빠ㅅ……

"바빠서 병원 진료 한 번을 안 오셨더니 결국 이렇게 쓰러져서 응급실로 실려 오셨죠, 환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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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ㅎ

변명할 여지를 안 주시고 그냥 팩트를 말씀하시면 제 뼈가 좀 아픕니다... 의사 선생님.

"지금으로써는 신경성 위염을 동반한 만성 위염으로 보여요. 자세한 건 위내시경을 해봐야 알 것 같지만…"

"지금은 환자분이 위염일 확률이 100에 가까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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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그럼 위내시경은 언제…

"내일 바로 진행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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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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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그… 내시경하면 금식… 해야 하지 않나요?

"맞아요. 오늘 6시 전에 저녁 드시고, 그 이후로는 아무것도 드시지 마세요."

반나절만에 일어났더니 냅다 금식하게 생겼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침대 끝자락 붙어있는 환자 차트에 끼워지는 금식 알림표.

지금은… 막 5시를 넘긴 시간. 1시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저녁을 해결해야 한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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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너무 가혹한데요…….

"내일 오전 10시에 간호사 안내받고 따라오시면 됩니다. 오늘은 입원하시고."

이제 내 말은 들은 체도 안 해, 나쁜 사람.

그렇게 할 말만 하고 나가버리는 듯한 의사… 인 줄 알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시 오셨다.

"커피는 절대 드시지 마시고요. 소화 더 안 되니까."

이 말을 남기고서는 유유히 사라지는 선생님.

문이 닫히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의사가 나가자 마자 태형의 시선은 나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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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먹고 싶은 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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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딱히 없어. 그냥 죽 먹으려고.

병원에서 하는 식사는 소화도 안 될 것 같고, 내일 위내시경 생각하니까 있던 밥맛도 다 떨어지고.

그냥 배만 채워야겠다 싶어 죽을 살 생각으로 두리번거리며 지갑을 찾고 있는데…

다름 아닌 김태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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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그 몸으로 어딜 가. 내가 사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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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어? 됐어……. 너한테 더 무슨 빚을 지려고.

전화해서 도와달라 한 것도 미안해 죽겠는데.내가 일어나려 바닥에 있을 신발을 찾고 있으니까, 그 새에 내 슬리퍼를 집어 저 멀리로 갖다 놓는 그였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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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진짜 가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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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죽 아무거나 괜찮지?

무슨 일이 있어도 날 말리고 갈 기세길래, 하는 수없이 입술만 앙 다물고 그를 올려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나를 향해 미안해하지 말라며 환한 웃음을 내비치는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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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

++ 대환장 어남짐 어남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