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마지막이길 바라"
11. 우정은 사랑이 될 수 있을까



병실이 몇 호라고 말해준 적도, 어디 병원으로 오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여기. 나를 찾아온 박지민.

옥상에서 내려와 병실에 와보니, 김태형과 전정국은 어딜 가고 없었다.

그리고 잠깐 쉬고 있으니, 머지 않아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지민이었다. 양손에는 커피잔을 들고서.



병상에 앉아있는 날 슥, 보더니 문 닫고 이내 아무말없이 내 옆에 다가오는 그.


한사라
나 커피 못 마시는데.


박지민
따뜻한 물이에요.

위 아픈 사람한테 누가 커피를 사다 주겠어요. 어이없다는 듯이 입가에 미소를 띤 그가 내게 잔을 내밀었다. 앉으면서 하는 잔소리는 덤. 사라 씨 커피 하루에 다섯 잔을 기본으로 마실 때부터 알아봤어.

잔을 받아들자마자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에, 뚜껑을 열어보니까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물이었다. 향을 맡아보니… 보리차.


한사라
고마워요, 잘 마실게.


…


“오늘이 마지막이길 바라”


제 11화. 우정은 사랑이 될 수 있을까




한사라
…그, 있잖아요.


박지민
사과하려는 거면 됐어요.

아 이런. 얘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한사라
……그래도.


박지민
사과할 일 아니에요.


박지민
네 부름에 너한테 간 건, 내 선택이었어.


한사라
…….

그렇게 나오면, 내가 뭐라 더 할 말이 없어진다.


한사라
오는 길에, 내가 혹시 실수한 거라도….


박지민
……그런 거 없어요.

대답이 조금 늦었다. 마음에 걸려서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더니, 갈곳을 잃은 그의 눈동자. 거짓말 못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무슨 실수를 했든, 내가 네게 무슨 말을 했든 간에 더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걸 알게 되면 내가 더 미안해질 것 같았다.


박지민
사과 받으려고 온 거 아니고,


박지민
괜찮은가 싶어서 보러 왔어요.


한사라
……왜,

정적이 가라앉았다.


한사라
…왜, 다시 간 건지 물어봐도 돼요?


서로 말실수 안 하려 온 신경을 다해 존댓말을 써보는데… 이게 왜 이렇게 이질감 드는지 모르겠다. 하긴, 서로 간에 존댓말을 쓰는 건 처음이니.

나를 업고서 응급실에 왔다던, 내 전화를 듣고 망설임없이 달려왔다던, 내 안부를 걱정하던 너는 왜 내 곁에 없었는지가 궁금했다.



박지민
있어봤자 좋을 게 없었으니까.

눈 뜨자마자 보이는 사람이 나라면, 사라 씨 마음이 불편할 게 눈에 훤한데 내가 어떻게 그래요. 지민이만의 특유의 목소리는 꽤나 나른했다.


한사라
그래도 말은 해주지….


한사라
하마터면 다른 사람한테 고마워할 뻔했잖아.

다른 사람? 대화 내내 내 시선을 마주하지 않던 그가 다른 사람이라는 말에 고개를 들어 날 응시했다.



박지민
다른 사람 누구.

와, 한사라 진짜 이제 막 나간다. 어떻게 전남친을 앞에다 두고 다른 남자 이야기를 뭐 이래 아무렇지도 않게…. 심지어 첫사랑. …이별의 이유.

위에 염증이 생긴 게 아니라, 이정도면 뇌도 검사해 볼만 하다.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


한사라
…아, 그야 당연히… 간호사… 님이지.

어라? 내 말 듣더니 얘가 피식,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뭐야 왜 웃는데.


박지민
전부터 말하지만, 거짓말 참 못해.


한사라
……너도 만만치 않거든요.



박지민
오다가 병원 앞에서 김태형 봤는데.


차라리 날 죽여줘. ㅎ





전정국
…우리가 이렇게 편할 사이는 아니라는 거. 알고 있지.

정국의 굳은 표정을 보던 태형이, 그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럼 우리가 불편해야 하나.


전정국
적어도 편하지는 못해.

잔 안에 담긴 각진 모양의 얼음이 황갈빛 액체에 순식간에 잠겼다. 그런 잔을 잡고서 돌리던 정국이 한 모금 머금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고.


전정국
넌 알잖아, 나를.

그 말에 태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이어 제 잔에도 술을 따르면서 건네는 말이 글쎄,



김태형
아직도 여전한가 봐, 짝사랑은.


보아하니 친구 그 이상의 관계 발전은 없던 것 같던데. 사라를 가리키는 말. 정국이 다른 곳을 응시했다. 그런 정국을 가만 보던 태형은 연이어 술을 들이키고.


김태형
언제까지 그렇게 답답하게 살 계획인데.


전정국
평생.

정국이 미간을 찌푸리며 애써 시선을 피하며 술을 들이켰다. 의아한 표정의 태형이 고개를 기울이면, 이때다 싶어 한 마디 하겠지.


전정국
말했잖아. …친구 마저 잃는 건 싫어.


김태형
…어리석기는.

헛웃음 지으며 이내 정국으로부터 시선을 거둔 태형이 다시금 제 잔에 술을 따랐다. 한편 태형이 꺼낸 말로 인해, 태형에게로 시선을 옮기는 정국.


전정국
어리석다니. 누가.


김태형
너.

나보다 한사라를 오래 봤으면, 이제는 알아야지. 뜬금없는 태형의 말에, 정국이 입 안에서 혀를 굴렸다. 못마땅하다는 의미였다.


김태형
사라는 한 번 친구하면, 그 사람은 친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걸 잘 알텐데.


김태형
애초에 옳고 그름에 선을 확고하게 지키는 성격이라.


김태형
그런 애랑 잘 될 생각을 하겠다고? 심지어는 10년지기 친구가.

진작에 네가 마음을 접었어야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태형. 그런 태형을 가만 보던 정국의 표정이 어째, 얼이 빠진 사람같았다.

그리고선 표정을 풀며 곧 헛웃음 터뜨리겠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허무하게 웃을 테다. 손에 쥐고 있던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전정국
…어리석은 건 내가 아니라, 너였네.



전정국
애초에 한사라는 너를 친구로 생각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 (김태형 씨는 한사라가 자신을 짝사랑 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죠)

+++ 읏. 벌써부터 숨 막혀오지 않나요. 네 사람의 관계성이… 참. 나만 그런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