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다고 한 적 없어

01. 블러드 다이애나

"둥근 저 달이 뜨는 날, 너에게 갈게."

보름이면 하루도 빠짐없이 테라스에 나가서 서 있었다. 추운 겨울에도 더운 여름에도 밝은 달이 하늘을 비출 때면.

내가 애타게 기다리는 그 사람이 사랑인지 아닌지조차도 기억나지 않는 그 오래전부터.

아주 어릴 때부터 이게 내 습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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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달 참 밝다...

사람들이 나를 부르길, Diana, 달의 요정이라 했다.

하이얀 피부가 달빛을 받아 달처럼 빛나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흰색 실크 원피스가 별처럼 반짝인다고, 그들은 나를 달의 요정이라고 부르곤 했다.

베키

다이애나 아가씨. 자꾸 그렇게 밖에 나가시면 감기 듭니다... 뭐라도 걸치고 나가셔요. 아가씨가 아프시면 저희가 혼난답니다.

어린 하녀와 베키가 내 겉옷을 들고 따라들어와 잔소리를 했지만 나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일 뿐 큰 관심은 두지 않았다.

곧 있을 루나 축제 준비로, 밤거리는 부산스러웠다.

베키

모레가 축제인데, 아가씨 피곤하시면 안 되잖아요. 들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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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으음...

베키

오늘 사냥 연습도 하셔서 피곤하시잖아요. 아가씨, 네?

그놈의 아가씨 소리 좀 그만할 수 없나. 슬슬 지겨워지려고 해.

내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피던 하녀가, 내 표정이 구겨지는 걸 보고는 겉옷을 두고 슬금슬금 물러났다. 내 성질이 고약한 게 사실이었으니.

베키를 멀리 보내기 위해, 쉽게 구하기 힘든 걸 말하고는 가지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말하기만 하면 뭐든 오케이다. 황명에 어긋나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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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나 잘생긴 남자 시종이 하나 더 가지고 싶어.

베키

...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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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지난번에 걔는 조금 괴롭히니까 너무 빨리 죽어버렸잖아.

베키

아...아가씨...지금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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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응. 지금.

베키

알았어요. 빨리 다녀올 테니까 방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계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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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응.

따분한 저택을 탈출하기에는 이만한 핑계가 없었다. 일개 하녀가 혼나든 말든 무슨 상관이람. 내가 좋으면 그만이었다.

달의 요정,

그 앞에 붙은 수식어는 '핏빛' 달의 요정이었다.

- 달의 요정님 나오셨네.

- 왜 그래. 다이애나님 불쌍하잖아~ 큭큭.

요정이라고 해서 좋을 것도 없었다. 비꼬는 말이었으니.

성질 더러운 여자라는 말을 그렇게 돌려서 하는 것이다. 집안 이름만 대면 벌벌대면서 길 놈들이 그딴 소리를 해대는 게 참 같잖다.

달의 요정이라 하면 딱 맑고 순수하고 빛이 나는 투명한 사람을 떠올리는데, 속까지 그렇지는 않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썩고 또 곪아있을지 어떻게 알아?

맘대로 재단하고 끼워맞춰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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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달 되게 밝네. 차라리 그냥 꺼져버렸으면 좋겠다.

기분이 뭣 같아서 차라리 달이 빛을 잃었으면 하고 바랬다.

달을 숭배한답시고 거대 규모의 축제를 준비하고 있는 성민들이 들으면 기함할 말이겠지만,

핏빛 달이 될 바에는 차라리 그게 더 낫지 않을까.

쓸데없이 부산스러운 거리도, 촛불 빛이 빛나고 있는 길가도 다 짜증이 올라와서 사냥복으로 갈아입고 창문을 넘어 말을 타고 달렸다.

동이 트면 내가 방에 없는 걸 보고는 혼비백산이 될 저택을 뒤로 한 채, 마냥.

달리고 달리니 어느새 어둠의 숲 앞이었다.

말을 숲의 입구에 매어놓고는 걸어서 깊숙이 들어갔다.

짙은 밤안개가 세 걸음 만을 남기고 시야를 죽여 무서울 법도 했지만, 차피 야생동물은 없었으니 숲 한가운데에 있는 연못을 향해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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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윤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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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어,

와-... 맑은 연못에 담긴 달을 흩뜨릴 요량으로 간 곳에는 빛나는 남자가 서 있었다. 떠 있었다고 해야 맞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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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

웬만한 여자들보다도 희고 맑은 피부.

그런 피부와 잘 어울리는 금발머리에 특이한 옷차림 그 위에 그려진 금빛 달.

유려한 턱 선과 함께 몸에서 은은하게 빛이 흘러나오는 그런 사람... 아니 요정이 연못 위에서 날고 있었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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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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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윤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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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누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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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윤기

......

가지고 싶다.

진짜 달의 요정이든 아니든 너무 아름다운 그 모습에 홀려서 그만, 말을 걸었다.

내 안에서 소유욕이 들끓고 있었다.

아무 반응도 없이 가만히 있던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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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윤기

......

그가 느릿하게 눈을 떠서 나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슬쩍 비틀 때, 내 숨은 얼어붙는 듯했다.

오감이 내게 말하고 있었다.

잘못 건드렸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