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다고 한 적 없어
02. 각인(刻印)


그가 내게 점점 다가왔다.


민윤기
......

연못 위를 한걸음 한걸음 걷는데, 한 치의 물결도, 한 솔의 바람도 일지 않았다.


여주
......

그와 나의 시선이 얽혀들어간 순간.

나는 흐읍, 하고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민윤기
......

적막이 흘렀다.


여주
어......

입을 열려고만 하면 나를 무섭게 쏘아보는 그 눈빛에 찍 소리도 못한 채 잠자코 있어야 했다.

요정이라기보다는...

악마라는 수식어가 더 잘 어울릴 것만 같은 그의 숨 막히는 아우라에 나는 마른침을 삼킬 뿐이었다.


민윤기
바라는 대로 꺼져줬는데.

그의 희고 기다란 손가락이 하늘을 가리켰다.

별이 총총히 박힌 검은 하늘에는 밝게 빛나던 둥근 달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남자의 금빛 머리칼도 검게 변해있었다.


여주
아.


민윤기
어때, 만족하나?


여주
꺼져 달라고... 내가.


민윤기
그래.

묵직한 목소리가 내 몸을 눌러 몸이 덜덜 떨려왔다.

소유욕 그딴 건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는 이미 나에게 완벽한 강자였으니까.

그것보다 이 남자는 대체 정체가 뭐지.


민윤기
내가, 궁금해?

피식, 하고 그의 입술 새로 바람빠지는 소리가 난다.

숨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의 거리를 한 뼘 남짓 남기고 다가와 잠시 멈춘 그였다.

이내 그는 나를 감싸 안는 듯이 팔을 두르고는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여주
아-.


민윤기
......

그의 손이 닿은 자리는 미치도록 뜨거운데, 정작 그의 입이 닿아온 목덜미는 미치게 차갑다.


민윤기
... 똑똑히 기억해 둬.

목의 여린 살덩이를 입술이 지분거렸다.

때론 말랑하게, 대부분 거칠게.

목구멍 저 안에서 이상한 간질거림이 올라와 입으로 야릇한 소리가 나려는 걸 간신히 삼켰다.


여주
ㅁ... 뭐하는.


민윤기
... 됐다.


여주
악!


민윤기
아파하지 말고. 옳지.

잔뜩 굳은 나를 놀리듯, 이를 세워 한차례 세게 깨문 자리를 부드럽게 쓸던 그가 쇄골에서 입술을 떼며 씩 웃었다.

그때 난 확신하고야 말았다.


민윤기
잘 부탁해, Diana.

명멸하는 달의 향기.

그가 내게 아로새겨졌음을.

내 망막에,

뇌리에,

지워지지 않을 낙인처럼.

정말이지,

아찔했다.


민윤기
핏빛 달이 뜨면, 날 찾아.


여주
......


민윤기
데리러 갈 테니.


민윤기
그럼,


여주
...... 뭐라고요?


여주
아니, 당신은 누구...

- 탁.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밝은 빛이 쏟아지며 날 감쌌다.

한차례 울렁이는 기분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떴을 때에

나는 방 한가운데였다.


여주
......

분명 꿈인 줄 알았다.

이 무슨 허무맹랑한 경험인지.

나는 방이었고 나가기 전처럼 흰색 슬립을 입고 있었으며 침대에 누워있었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현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말이 안 되었다.

무의식적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거울 쪽으로 걸어갔다.


여주
......


여주
어...?

새하얀 목선과 쇄골 그 사이에, 붉은 초승달이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분명히 그 남자가 만졌던 곳...인데.

아직도 그 뜨거운 촉감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새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새빨간 초승달은, 핏빛을 띈 채 한없이 붉어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여주
잘 부탁해...다이애나...?

쇄골의 옴폭 패인 가장자리에 자리한 붉은 초승달에서

차갑고도 뜨거운, 그 남자의 체온이 느껴졌다.

대체 누구길래 나한테 잘 부탁한다고까지 한 걸까. 그것도 다이애나...라는 내 별명 아닌 별명까지 부르면서.

베키
꺄악?! 아가씨. 어디 계셨던 거예요!


여주
......

그새 돌아와서 나를 찾아다녔는지, 거울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한 베키가 소리를 질렀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베키 옆에 있는 작은 남자애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베키
방에 계셨어요? 아니, 언제부터... 아까는 분명히 없어서 제가 엄청 찾았는데, 아가씨 찾느라 온 저택이 발칵 뒤집혔잖아요. 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어디 계셨어요? 여기 제가 모르는 숨을 곳이라도 있나요?


여주
......

베키
하아...아녜요. 무사하셨으면 됐어요.

아니, 하나도 괜찮지 않아.

두근, 두근,-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갖고 싶은 남자.

그거 뿐이었는데.

왜 기억에서 떠나가질 않는거야.

이상해.

이상하다고.

지금까지 이런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단 말이야.

대체 왜

떠올리기만 해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는 건데.


여주
당신...대체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