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줄게, 나쁘게.

Episode 176 ˚ 어린 어른

환자복 차림의 여성은 여주를 보더니 앉아 있다가도 슬리퍼를 신으며 일어섰다. 마치 여주가 누군지 안다는 듯이 반기는 태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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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

아, 여주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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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주

어, 일어나지 마세요…!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가려고 하다가 제지당한 상황. 지수를 향해 앉아있으라며 일어나기를 말린 여주가 인사하며 유자차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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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주

이거… 지수 씨가 좋아한다고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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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

아 어떡해… 고마워요.

주사 바늘과 테이프가 붙어있는 손의 얇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컵을 쥔 지수는 여주에게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조심스레 녹차 라테는 선반 위에 올려둔 여주는, 컵 캐리어를 고이 접어 테이블에 올려뒀다. 그리고선 의자에 앉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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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주

…지민 씨랑, 민규는 갔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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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

아, 네_ 몇 분 전에….

조심스레 컵을 제 입에 가져다댄 지수에, 여주의 시선이 지수의 마른 입술로 향했다. 건조해서 다 튼 그녀의 입술이 유난히도 하얬다.

그런 여주의 시선을 의식한 지수는 조심스레 손등으로 제 입가를 닦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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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

그나저나 여긴 어떻게 오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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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주

아, 서우가 아파서 입원을 했거든요 오늘….

그와 동시에 벌어진 지수의 입술 사이로 짧은 탄식이 내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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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주

문득 지수 씨 생각나서, 지수 씨 남편분한테 허락받고 와봤어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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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

아…ㅎ 지민이가 허락해 주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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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주

네-. 지수 씨도 저 보고 싶어한다면서….

맞아요, 제가 여주 씨 뵙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거든요. 그럴 때마다 지민이가 제 몸 상태를 보고 말하라고 제지했는데… 이렇게나마 볼 수 있어 다행인가.

여주가 사 온 유자차가 담긴 컵을 만지작거리던 지수가 여주에게 시선을 옮기곤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잠시 한숨을 내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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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

…아, 서우 안 본지도 오래 됐는데… 잘 지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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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

서림이도… 못 봐서 속상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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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주

서우 잘 지내죠, 서림이도 물론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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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

서림이는 딸이라고 그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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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주

맞아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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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

저는 딸이 없어서… 아들이랑은 또 다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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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주

딸은… 딸대로 예쁘고, 아들은 아들대로 예뻐서 좋죠-.

여주의 말에, 다시금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지수. 여주 씨 너무 행복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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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주

행복하죠… 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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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주

지수 씨도 민규 덕에 행복한 것처럼요…!

···

병실에서 나와, 병원 가장 꼭대기 층으로 걸음을 옮긴 두 사람. 두 사람은 나란히 통유리 앞에 선 채, 창문 너머 같은 곳으로 시선이 향했다.

바쁘게 도로를 질주하는 차량들, 레고처럼 작게 변해버린 사람들의 모습을 한동안 보던 여주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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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주

병원에서 나가면… 뭐부터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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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

…민규랑 지민이랑 여행 갈래요, 가족여행.

가족여행 마지막으로 간 지가… 민규가 말을 못 할 때였던 걸로 기억해요. 씁쓸한 미소로 말을 잇는 지수에, 여주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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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

우리 엄마는 민규가 처음 태어났을 때, 민규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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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

…딸은 생사가 오가는 와중에 걷지를 못하는데, 손자는 갓 태어나서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으니…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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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주

어머니 입장으로써는… 꽤나, 마음 아프셨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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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

그래도 지금은, 민규랑 얼마나 잘 놀아주는지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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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

엄마도 엄마인지라… 그때는 자기 자식을 아프게 만든 사람이 손자일지라도 반가워할 수가 없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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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주

그렇겠어요…. 얼마나 걱정되셨을까.

지수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지난날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깊게 파고들었다.

마치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지수의 표정은 그렇게 슬퍼 보이지도, 행복해 보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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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

아, 여주 씨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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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주

네? 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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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

그런… 이야기 없나 해서요. 너무 제 이야기만 늘어놓은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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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

여주 씨 부모님은 태형 씨 아이 가졌을 때 아무 말도 안 하시던가요…?

지수의 질문에, 여주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지수는 오늘 처음 보는 여주의 낯선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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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주

제 소식… 모르실 거예요,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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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주

먼 타지에 계시거든요…. 연락 안 한지도 꽤 됐는데.

지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주를 쳐다봤다. 아, 한국에 안 계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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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주

…친 부모님은 아니고, 제가 어릴 때 저를 입양하신 분들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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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주

원래는 한국에 계시다가… 제가 성인이 되자마자 외국으로 가셨어요.

가족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라는 걸 두 분 보면서 많이 배웠죠. 너무나도 따뜻한 마음을 가지신 분들이었거든요.

여주가 말하는 내내, 여주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지수는 말 하나하나에 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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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

좋았던 분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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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주

엄청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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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주

제게 과분한 사랑들을 주고 가셨죠-.

원래 본 고장이 미국이었거든요, 두 분은. 제가 안정적으로 살림을 차려갈 때 그곳으로 돌아가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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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

근데 연락은 왜 안 하고 지냈어요- 여주 씨 보고 싶어 하실 수도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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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주

아…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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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주

자꾸 타이밍만 엿보다가… 이렇게까지 늦어졌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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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

그게 뭐야… 너무 허무하잖아요….

여주 보다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지수가 지금이라도 연락해 보는 건 안 되겠냐면서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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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

마지막으로 연락은 언제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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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주

글쎄요… 가물가물한데, 2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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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

…아구구, 딸 목소리도 잊으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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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

하루라도 빨리 연락 드려요. 네?

여주가 멋쩍게 웃어 보였다. 2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를 동안, 제 자신이 부모에게 연락 한 번을 안 했다는 게 조금 부끄러운 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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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주

…알았어요_

그제서야 지수가 환히 웃었다. 그런 지수를 바라보던 여주도 활짝.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한 걸음씩 가까워지고 있던 두 사람의 배경으로 어느덧 해가 지던 시점이었다.

대화를 마무리 짓고, 다음을 기약한 두 사람은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난 후에야 헤어졌다.

전보다 가벼워진 발걸음의 여주, 외투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기분 좋게 서우의 병실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을까.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는, 서림이를 보며 꺄르르 웃고 있는 제 남편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며 문을 열어젖혔다.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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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어, 자기. 이제 왔어?

일 하고 있어야 할 양반이 대체 소아과 병동에는 무슨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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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주

…너 또 말 안 듣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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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아이- 아주 잠깐 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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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갑자기 시간이 남아 돌아서, 내 새끼들 잘 있나~ 확인해 볼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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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주

잠~깐 확인하셨으니까 이제 가면 되겠네?

태형의 품에 있던 서림이를 안아든 여주가 문을 향해 손짓했다. 어서 가보세요, 의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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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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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서…우가! 내가 보고 싶어서 못 보내겠다고 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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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그래서 계속 여기 있었던 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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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우

압바. 나 그런 적 업써.

단호박 김서우. 병상에 누운 채 말똥말똥한 눈빛으로 태형이를 주시하다 겨우 연 입이었다.

풋, 작게나마 웃음을 터뜨린 여주가 서림이 머리를 넘겨주며 소파에 앉았다.

그런 여주를 가만 보던 태형은 더이상 할 변명거리가 없다 싶었는지, 바로 여주에게 다가가 옆에 앉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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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그나저나, 자기는 어디 다녀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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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주

잠깐 누구 좀 만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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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누구? 이 병원에 아는 사람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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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주

있지- 아주 잘 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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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누군데?

태형은 은근 신경 쓰기 시작했다. 나 몰래 아는 사람? 그럴 리가 없는데. 누군데? 속으로만 오만 가지의 질문을 내던지며.

그럼 태형의 호기심 반, 의문 반으로 가득한 눈빛을 알아챈 여주가 웃으며 답했다. 지민 씨 와이프, 지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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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아, 지수 씨.

내심 안도한 태형이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남자가 아니어서 행복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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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만나서 무슨 이야기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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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주

그냥… 잡다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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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주

말도 잘 맞고… 시간도 엄청 빨리 지나가고…

간만에 많이 행복했어. 함박웃음을 짓자, 그런 여주를 보던 태형이도 옅게 웃음 지었다.

한동안 집 안에서 서우와 서림이만 돌보다, 말 잘 통하는 친구를 만나 걱정 없이 이야기 나눴을 여주를 상상하니 괜히 자기가 다 뿌듯했던 거지.

여주에게서 소녀같은 면모가 보여지자, 아차 싶어 그 순간 깊은 생각에 빠졌을 테다.

…여주도 아직 두 아이 엄마라기에는, 어린 어른임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태형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