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내 차례에요, 아가

[ 36 ] 나에게 너란 존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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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후으-

풀썩, 하면서 침대에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여주를 살포시 내려놓은 태형.

여기까지 온 현실이 믿기지 않는 듯, 잠시 헛웃음을 지어보이더니 내 집 마냥 자고 있는 여주를 빤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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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참, 잘 자. 누구 속도 모르고.

태형은 침대에 걸터앉아 여주의 헝클어진 머리를 살살 정리해주었다. 미묘하게 창문 새로 들어오는 달빛 때문에 잠이라도 깰까 조심스럽게.

그러고는 '여주, 잘 자- 내일 보자.'하고는 이불까지 꼭 덮어주고는 나온다. 위에 두터운 옷 때문에 춥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처음 누군가를 집에 들이는 거라.

내일 여주가 놀랄 생각을 하니, 웃음이 먼저 마중 나왔지만 본인도 내일 출근은 또 해야하니. 그렇게 미소를 품으며 거실로 향한 태형이다.

그 다음날 아침. 해가 슬슬 마중 나오고 있을 시간. 침대 쪽에서 부스럭 부스럭, 작은 움직임이 일렁이고 곧이어 이불 밖으로 얼굴이 쏙 나왔다.

아직 잠이 덜 깬 상태로 눈을 가늘게 뜬 그녀는, 아마 일어나자 보이는 낯선 환경에 머릿 속으로 풀가동을 하고 있겠지.

구여주

그러니까... 내가 어제...... 아저씨랑 술 마시고...

또 뭐했더라. 그 뒤로 기억이 없네.

기억나는 거라곤 아마 당시에 먹었던 칵테일 색깔밖에 없을 걸. 아무리 머릿 속에서 쥐어짜내봐도 기억이 안 난다, 기억이. 어제 뭐 실수한 건 아니겠지.

...그나저나 여긴 어디야. 이제서야 장소에 대한 위화감을 느끼고, 속으로 뭐지... 뭐지... 하면서 생각을 해봐도 답은 안 나오고. 주변에서는 어디선가 익숙한 체취가 여주의 코를 찔렀지.

이불에서도, 베개에서도, 침대 시트부터 그냥 방 안 그 자체에서. 어디선가 익숙한 향기에 이불을 코에 박고 기억해내려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아본다.

구여주

......쓰읍, 뭐지.

구여주

어디서 많이 맡아본 향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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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뭐해, 거기에 코 박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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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내가 그렇게 보고싶었으면, 밖에 나와서 안기지 그랬어.

구여주

그러게ㅇ...

구여주

그러게ㅇ...

구여주

그러게ㅇ...네?!

구여주

에......? 어...? 엥......? 왜 거기있어요...?

구여주

어... 어... 그러니까......

시발. 나 아저씨 집 온 거였냐? 아 어제의 구여주 한대 맞자. 아니 뭘 어떻게 했길래 내가 여기에 있지...? 사귄지 하루만에...?

이...이거 진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닌가. 순간 속으로 이야기 해야하는 게 입밖으로 나와 태형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고. 여주는 속으로 온갖 욕을 내벹으며 자책하고, 태형이는 소리 내어 웃진 못하고 숨죽여 끅끅 거린다.

아, 귀여워. 아침부터 이렇게 웃어본 적이 얼마만이던가. 머릿 속이 복잡해 죽겠는 여주와는 달리 여유롭게 여주를 쳐다본 태형이였다. 하여간, 구여주 변한 게 하나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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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그치? 진도가 좀 빠르긴 했어.

구여주

...네...? 네......? 제가 지금 뭘 들은......

구여주

아니... 아니 저 술 먹고 그러는 막... 네? 아니 그런 사람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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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술 먹고 뭘 막 그러는데.

구여주

아니... 있잖아요...... 그런... 어...

그러면 술 먹은 사귀는 사이의 남녀가 그 다음날 한 집에 같이 있는데 의심을 안 해요...? 라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차마 입 밖으로는 못 꺼내고,

태형은 자기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여주를 보며 흥미로운 듯 벽에 기대어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구여주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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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응, 물어봐.

구여주

......

구여주

...저희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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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보기보다 응큼한 아가씨네, 구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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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하고 싶어? 하고 싶으면 지금도 가능하고.

구여주

아...아니요?!?!?! 미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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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내가 뭘 할줄 알고, 미쳤대.

앟하하하하... 시발...? 도리어 더 민망해진 여주는 눈을 질끈 감으며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태형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놀리는 맛이 쏠쏠하네. 아마 구여주를 놀리는 건 김태형 뿐일 것이다. 사실 여주 밥 먹일려고 깬 거 같길래 데리러 온 거였다만... 지금은 못 가겠네.

암튼 잠 좀 깼으면, 나와. 밥 먹게. 여주 탓에 아침부터 컨디션이 좋은 태형은 여주를 향해 싱긋 웃으며 방을 나갔다. 여주 또한 문이 다시 닫히는 걸 보고 몇 초간 정지해있더니,

구여주

아아아악!!! 구여주 미친년 진짜.

구여주

거기서 했어요? 라는 말이 왜 나오냐 이 바보야...... 아, 난 아저씨 얼굴 못 봐.

하며 이불킥을 시전했다고 한다.

후. 쪽팔리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진정시키고, 주방으로 나온 여주는 조금 두리번 거리더니, 태형이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태형은 여주가 나온 것을 보자, 앉으라며 웃음을 지었다. 누군 수치사하기 일보직전인데 아주 그냥 태평하네.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고 의자를 끌고 앉은 여주는 속 쓰린 걸 진정시키려 눈 앞의 국을 한 숟갈 먹었다.

구여주

크,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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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맛이 좀 어때. 괜찮아?

구여주

말해뭐해. 맛있다고 말하기도 입 아파요.

다행이네. 뿌듯한 미소를 지어보인 그는 자신도 그제야 한 숟갈 뜨기 시작했다.

그 넓은 집에 둘 뿐이였지만, 편안함으로 가득 메워졌다. 전에는 찾아볼 수도 없었던 온기가 한기서린 태형의 집을 물들였다. 둘의 사랑은 따뜻했다.

구여주

헉, 근데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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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응, 있잖아요.

구여주

아저씨 출근 안 해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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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응, 안 해도 돼요.

구여주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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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진짠데.

에이, 직장인이 출근 안 하면 어떡해요. 탁, 하며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여주가 단호하게 말하고, (실제로는 단호한 척에 가까웠다.)

태형은 탁 소리에 여주를 바라보았다. 얘가 진짜라니까 못 믿네.

구여주

대표라고 그렇게 막 마음대로 안 가면 못 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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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대표니까 마음대로 안 가는 거지.

하여간, 진짜. 한 마디를 안 져요. 여주는 태형의 말에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에 어깨를 으쓱하는 태형이고.

진짜 안 가도 되는 건가... 여주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태형은 괜찮다는 듯 여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주는 조금 헝크러진 머리에도 좋은지 베시시 웃었지.

태형이 차려준 아침을 간단히 먹고 나온 두 사람. 맞잡은 두 손을 꼭 잡고 나란히 걷는 것도 놓치지 않고 말이다.

마침 태형이는 회사도 안 가고, 여주는 이제 학교를 그만둘 거니까. 누구 하나 데이트 하자고 말은 꺼내진 않았지만, 날이 좋아 밖으로 나온 둘이다.

구여주

와, 날씨 너무 좋다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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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그러게, 해 있어서 그런지 별로 춥지도 않고.

구여주

헤, 봄 되면 더 예쁘겠죠? 막 벛꽃도 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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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그 때도 같이 꽃보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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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엄청 예쁠 걸. 내가 장담해.

구여주

좋아요! 같이 나들이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구여주

아! 여름엔 바다도 갈까요? 겨울에 여름 계획 얘기하니까 좀 웃기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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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응, 좋아. 다 좋아.

같이 다 하자. 나랑. 태형은 맞잡은 손을 더욱 꽉 잡으며, 여주의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였다. 차가운 향기 훅 닿은 여주였지만, 한기에 맞지 않게 따스히 웃었다.

연애라는 것이 원래 이렇게 따숩한 거였나. 차갑고 축축하기만 하던 지난 삶이 무색하게 서로의 존재가 밝게 빛났다.

서로 너무 비슷했고, 내 치부를 안아주는 사람이였다. 너는 그랬다. 내가 너에게 어떤 존재일지 몰라도, 너는 나에게 안식처였다.

큽. 너네만 따수우면 됐다. 추운 건 내가 할게.

🌸 손팅 🌸

++ 3357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