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의 김운학

10

도서관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눈앞의 책장은 전혀 읽히지 않았다.

단어들이 줄을 맞춰 나열되어 있음에도, 운학의 시선은 자꾸만 그 위를 미끄러졌다.

페이지는 한참을 같은 데 멈춰 있었고, 펜만 손가락 사이에서 빙빙 돌았다.

몇 줄 읽다가도 결국은 창밖으로 눈길이 가곤 했다. 하늘은 맑았지만 마음은 답답했다.

어제 라방에서 springletter가 남긴 댓글이 자꾸 떠올랐다.

— springletter: DJ님, 오늘도 덕분에 웃고 가요. 늘 감사해요.

사실 그 말 자체는 아무렇지 않아야 했다.

나도 매번 남기던 비슷한 말 아닌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문장이 마음속에 가시처럼 박혔다.

그 아이디는 이제 방송의 첫 댓글을 차지했고, DJ님은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는 답을 건넸다.

나는 그 웃음이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좋아하는 건 DJ라는 목소리였을까,

아니면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누나’라는 사람일까.

DJ와 누나가 겹쳐 보이던 순간에는 답이 분명한 듯했지만,

새로운 팬이 그 자리를 채우는 걸 보자 갑자기 모든 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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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학

“나는 그냥 청취자였던 건가.”

속으로 삼켰던 말이, 무심코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뭐라고 했어?”

맞은편에서 공부하던 누나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은 단순한 호기심 같기도 했지만,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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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학

“아, 아니에요.”

급히 펜을 집어 들고 억지로 웃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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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학

“그냥… 좀 졸려서요. 혼잣말 했어요.”

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노트북 화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짧은 순간이 지나고 나니, 공기가 어쩐지 더 무겁게 느껴졌다.

손끝은 계속 떨렸고, 내가 방금 내뱉은 말이 귓가에서 울리는 듯했다.

밤이 되어도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결국 익숙한 습관대로 휴대폰을 켜고 라디오에 접속했다.

DJ님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자, 처음에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런데 댓글창에 springletter의 메시지가 다시 뜨자, 가슴이 또 조여 왔다.

— springletter: 오늘은 바람 소리랑 목소리가 잘 어울리네요. 덕분에 하루가 가볍게 끝나요.

댓글창에서 springletter의 글귀가 올라올 때마다, 괜히 내 손가락은 휴대폰 위에서 망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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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냥 듣고만 있을게요.

짧게 남긴 그 말 뒤로, 나는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하지만 방송을 끄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댓글을 남기지 않은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도망친 거였다는 걸.

웃음을 나누는 게 두려워서, 더 이상 그 자리에 내 마음을 드러낼 용기가 없었던 거였다.

방 안은 불이 꺼져 있었고, 창문 너머로는 밤바람이 불어왔다.

책상 위 텀블러의 곰돌이가 내 눈에 들어왔다.

멍하니 바라보다가, 조용히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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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학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뭘까. DJ님일까, 아니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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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학

"누나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