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의 김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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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문을 나설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다.

하늘은 푸르스름하게 어두워지고 있었고, 캠퍼스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나는 그 불빛을 따라 걷다가 문득 멈춰 섰다. 오늘따라 곰돌이 스티커가 붙은 텀블러가 더 무겁게 느껴졌다.

손에 잡히는 무게가 아니라, 마음속에 쌓여가는 무게였다.

며칠 전부터 나는 댓글창에서 점점 목소리를 줄였다.

방송을 켜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짧게 “잘 듣고 있어요.” 정도만 남겼다.

DJ님—아니, 이제는 분명히 알게 된 누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도서관에서 웃어주던 표정과, 방송에서 다른 청취자들에게 건네던 웃음이 겹쳐지면서 내 마음은 복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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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학

“내가 단순히 청취자라면, 그냥 듣고만 있어도 됐을 텐데.”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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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학

“근데… 난 그게 안 되잖아.”

걸음을 멈추고 휴대폰을 켰다.

마침 라방 공지가 올라와 있었다.

제목은 ‘서로 다른 자리에서, 같은 음악을 듣는 밤’.

공지의 문장 하나에도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는 방송이 시작되기 전까지 창가에 앉아 조용히 이어폰을 꼽았다.

그리고 정각이 되자 익숙한 인사가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11시의 시간을 함께해주셔서 고마워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참아왔던 감정이 터져 나왔다.

이건 단순히 청취자로서의 감정이 아니었다.

나를 불러주는 이름, 나를 바라보는 눈빛,

그리고 내 웃음을 기억해주는 마음.

그 모든 게 라디오 속 DJ가 아니라, ‘누나’라는 사람에게서 왔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댓글창은 평소처럼 빠르게 올라갔다.

springletter가 웃는 이모티콘을 남겼고, 다른 청취자들이 오늘의 노래를 추천했다.

하지만 나는 단 한 줄도 남길 수가 없었다.

글자를 치려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쓰고 싶은 건 단 한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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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님, 아니… 누나. 나는 그냥 청취자가 아니라, 누나라는 사람을 좋아하게 됐어요.

하지만 그 말을 적는 순간, 화면 너머의 관계가 무너질까 두려웠다.

지금까지 쌓아온 익숙함이 깨지고, 방송에서조차 더 이상 함께할 수 없게 될까 두려웠다.

방송이 끝나고, 나는 혼자 캠퍼스를 걸었다.

가로등 불빛이 길게 늘어져 그림자가 두 개로 겹쳤다.

그 그림자 속에서 문득 용기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잃어도 말해야겠다.

그 결심이 발끝에서 차갑게 번졌다.

며칠 후, 도서관에서 다시 누나를 마주했다.

오랜만에 눈이 마주쳤는데, 그 순간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

누나는 잠깐 웃더니, 펜을 내려놓고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운학아.”

그 부름에 심장이 크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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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학

“응?”

“나는… 이제는 잃을 각오라도 하고 말하려고 해.”

그 말은 뜻밖이었지만 동시에 내가 기다리던 말이기도 했다.

순간 모든 소리가 사라진 것 같았다.

펜 굴러가는 소리도, 도서관의 기침 소리도, 시계 초침 소리도.

오직 그녀의 목소리만 또렷했다.

나는 손끝을 꽉 쥐었다.

그리고 마침내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