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살인사건
A-1


맞은편에서 흰토끼가 달려온다.


흰토끼
(조끼에서 시계를 꺼내보며)큰일났다! 또 지각이야!

이 토끼만 특별히 시간 개념이 없는 건지, 원래 토끼라는 종족의 특성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는 늘 이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와 처음 만났을 때도 저러고 있지 않았던가?

앨리스는 어이없다는 듯이 멀어져가는 흰토끼를 바라본다.

그렇지만 언제 처음으로 만난 건지의 기억은 모호하다. 매우 오래된 일이기 때문이라는 기분이 든다.

그 이전의 일은 더 애매모호하여 더 기억나지 않는다.

좀 지루하긴 하지만 차분한 일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흰토끼
메리 앤! 비켜! 늦었단 말이야! 알잖아!

앨리스가 입을 열려고 하던 차에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건다.


빌
암호를 정해야해.

돌아보자 도마뱀(도마뱀 치고는 조금 크고, 두발로 걸어다니지만) 빌이 서 있다.


앨리스
대뜸 암호라니 무슨 소리야?


빌
응. 암호란 같은 편이란 걸 알아보기 위해 비밀스럽게 정해놓는 말이야.


앨리스
그게 아니라 왜 암호가 필요한지 묻는거야.


빌
음..(잠시 골똘히 생각한다) 적을 같은 편이라고 착각하면 큰일나니까 그렇지.


앨리스
적이 있다고?


빌
그건 몰라. 하지만 나는 구별해내는 방법을 아니까 만약 있다면 쉽게 알아낼 수 있어.


앨리스
그래? 어떤 방법인데?


빌
간단해. 암호를 말해서 올바르게 말하면 같은 편이고, 틀리면 적이야.


앨리스
에휴, 그럴 줄 알았어.


빌
그치.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간단한 논리지.


앨리스
너, 지금 네가 아는 모두에게 이 얘기를 하면서 돌아다닌 거니?


빌
설마. 모두에게 말하면 의미가 없지. 이 이야기는 같은 편에게만 했어.

모두에게 말하면 의미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아는구나. 그렇다면 빌은 날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는건가?


빌
암호는 뭐가 좋을까?

앨리스는 눈을 반짝이며 암호에 대해 말하는 빌이 귀찮아진다.


앨리스
난 암호 없어도 돼.


빌
왜?


앨리스
잘 봐봐 빌,


빌
그래. 어디를 보면 될까?(두리번거린다)


앨리스
음. 내말은, 내 이야기를 잘 들어보라는 뜻이었어.


빌
그래. 이야기를 들어볼 준비가 됐어. 근데 들을 이야기가 안 보여.(빌은 두 손을 뻗는다)

앨리스는 그냥 무시하기를 택한다.


앨리스
빌, 암호를 왜 정해야 하는 건데?


빌
그야, 암호가 있어야 적과 아군을 구분할 수 있잖아.


앨리스
구별할 수 있지. 난 같은 편이잖아.


빌
아니아니, 암호를 정해두지 않으면 앨리스 네가 같은 편인지 모른다니까.


앨리스
그럼 적이라고 생각하던가.(살짝 귀찮다는 어투로)


빌
그건 곤란해. 앨리스는 같은 편이니까.


앨리스
거봐. 암호를 말하지 않아도 같은 편인 걸 아네.


빌
아니야. 암호는 아군과 적을 판단하기 위한 방법이니까 반드시 필요해.

하.. 여기 사람(빌은 동물이지만)들은 왜 하나같이 다 성가시게 구는 걸까? 뭐,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사람과 자신이 그런 줄 모르는 사람으로 나뉘지만 말이야.

장난치는 사람이 귀찮게 굴면 무시하겠지만, 정말로 모르는 사람을 무시하는 건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이야.

문제는 빌이 후자라는 사실이지. 하지만 암호라니, 정말 귀찮아.

아, 괜찮은 변명이 생각났다.


앨리스
암호는 다음에 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빌
왜?


앨리스
얘가 있어서.(자신의 호주머니를 가리킨다)


빌
호주머니가 암호를 말하고 다닐까봐? 호주머니는 대개 과묵하니까 괜찮아.


앨리스
호주머니에 든 게 문제야.(호주머니를 살짝 벌린다) 보여?


빌
이 털 뭉치를 말하는거야?


앨리스
맞아.


빌
털 뭉치도 과묵한 녀석이니 괜찮은걸.


앨리스
털 뭉치 아니야.


빌
아까는 털 뭉치라고 했잖아.


앨리스
내가 아니라 네가 그랬지.


빌
아까 내가 털 뭉치라고 하니까 네가 ‘맞아’라고 했잖아.


앨리스
그건 호주머니의 내용물이 ‘털 뭉치’가 아니라 ‘털 뭉치 같은 것’이라는 뜻이었어.


빌
그럼 ‘맞아’가 아니라 ‘아니야’라고 했어야지.


앨리스
(한숨쉰다)아니야. 하지만 호주머니에 든 건, 겨울잠쥐야.


빌
겨울잠쥐? 그런 뚱딴지같은 녀석 이야기는 왜 하는거야?


앨리스
쉿!(호주머니를 가리키며) 다 들을거야. 여기 들어있으니까.


빌
이런! 왜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지금에서야 한 거야?


앨리스
왜긴. 네가 일일이 말허리를 자르지 않았다면 5분 전에는 말했을 거야.


빌
음, 그래도 상관없어. 겨울잠쥐는 자고 있으니 내가 험담을 한 것도, 암호의 내용도 듣지 못 할 거야.


앨리스
하지만 가끔 깨기도 해.


빌
지금은 자고 있는걸?


겨울잠쥐
나 안 자!

앨리스와 빌은 말없이 겨울잠쥐를 관찰한다.


빌
잠깐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었나.


앨리스
잠꼬대가 아니었을까? 가끔 이러거든.


빌
아무튼 겨울잠쥐때문에 암호를 정할 수 없다는 거지?


앨리스
그렇지.


빌
그렇다면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


앨리스
뭔데?


빌
겨울잠쥐를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는거야. 그럼 겨울잠쥐가 암호를 듣더라도 아무 문제 없지.


앨리스
그렇게 쉽게 믿어도 되는거야?


빌
넌 겨울잠쥐를 의심해?


앨리스
아니.


빌
그래. 나도 겨울잠쥐를 의심하지 않아. 설사 얘가 적이라고 해도, 무섭지 않잖아. 그럼 적이든 아군이든 상관없지.


겨울잠쥐
얕보지 마!

앨리스와 빌은 말없이 겨울잠쥐를 관찰한다.

겨울잠쥐는 눈을 감은 채로 숨을 색색 내쉰다.


빌
혹시 자는 척 하는 건가?

앨리스는 겨울잠쥐 핑계를 대며 암호 이야기를 피하는 것이 점점 한심스럽게 느껴진다.

이렇게 끝도 없이 의미없는 이야기를 할 바엔 암호를 듣고 빌을 빨리 떼어내는 편이 낫다.


앨리스
알았어. 겨울잠쥐는 잠들었고, 만일 암호를 듣는다 해도 위협이 되지 않아. 그러니 지금 여기서 암호를 알려줘.


빌
좋아. 딱 한 번만 말할 거니까 잘 들어.


빌
…‘딱 한 번만 말할 거니까’라는 표현을 전부터 꼭 써보고 싶었어.


빌
그런데 왜 딱 한 번만 말하는 걸까? 중요한 말이라면 세 번 정도는 말해도 되잖아.


앨리스
세 번이나 말하는 게 귀찮아서 그런 걸거야.


빌
아하. 귀찮아서 그런 거구나. 이제 속이 후련해졌어.


앨리스
귀찮은 건 정말 싫어.


빌
그래? 귀찮은 일이 그렇게 많나?


앨리스
뭐, 여러 가지가 있지.

예를 들면 암호를 알려주고 싶어하지만 좀처럼 말해주지는 않는 도마뱀과 아무 영양가없는 이야기를 세월아 네월아 하는 거지.


앨리스
아무튼, 빨리 암호를 알려줘.


빌
알았어. 일단 내가 먼저 ‘스나크는’이라고 말하는 거야. 그럼 네가…

앨리스는 갑자기 입이 마구 근질거린다.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이 단어를 내뱉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것만 같다.


앨리스
..‘부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