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살인사건
에이-1


아. 또 이상한 꿈을 꿨네.

여주는 침대에서 힘없이 기어나와 알람을 껐다.

언제나처럼 장그러울 정도로 사실적인 꿈이었다.

한창 꾸고 있을 때는 이것이 꿈인지 의심할 수 없을 만큼 오감이 전부 뚜렷하다.(엄밀히 말하자면 감각 자체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느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지만)

하지만 이렇게 깨어나니 역시 꿈인 만큼 붕 뜬 것처럼 느껴졌다.

기억이 모호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같이 현실감이 없다.(일단 도마뱀이 말을 한다는 것부터가 확실히 현실성있는 꿈은 아니라는 증거다)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는 감각에 가깝다.

아무리 뚜렷하게 느꼈다고 해도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은 똑똑히 자각한다.

그건 그렇고 왜 이렇게 제정신이 아닌 사람과 동물이 사는 세계의 꿈만 꾸는 걸까?

그 세계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텐데도 도대체 어디인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꿈을 꾸는 동안은 ‘여기가 어디냐’는 의문조차 들지 않는데.

뭐, 꿈이니까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지만.

흔히 잠에서 깨면 꿈을 바로 잊는다 하는데 나는 계속 기억난다. 실감은 사라지지만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는 머릿속에 쭉 남는다.

이거 특이한 케이슨가?

최근에는 이 꿈만 꿨다. 혹시 매일 꾸는 건가? 설마.

어제는 그 세계 꿈을 꿨다. 이틀 연속으로 같은 꿈을 꿀 순 있지.

그저께는.. 그 세계 꿈을 꿨다.

그끄저깨는 어땠더라?

어쩐지 그 세계 꿈을 꿨던 것 같은데. 증거는 없지만.

…..

여주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이거 괜찮나? 괜찮은 거겠지?

심리학은 잘 모르지만 반복되는 꿈은 의미가 있다고 들었어.

분명 그 세계는 내 무의식의 상징이고,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걸지도 몰라. 그래서 내 무의식이 이를 알리려 하는 거야.

그럼 언제부터 이 꿈을 꾸기 시작했더라?

흠.. 꽤 오래전부터 꾼 것 같은데, 정확한 시점을 집기는 힘들어.

그럼 관점을 바꿔보자. 이 꿈 말고 기억나는 다른 꿈이 있나?

…..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네.

나, 그 꿈 말고 다른 꿈은 꾼 적이 없나?

아무리 그래도 그건 말이 안 되지. 그냥 지금 기억나지 않는 것 뿐이야.

여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고작 꿈일 뿐인데 굉장히 신경쓰이네. 이럴 줄 알았다면 꿈 일기라도 써 둘 걸.

그래, 꿈 일기.

지금부터라도 써 둘까? 뭔가 의미있는 결과가 나올 지도 몰라.

여주는 책장을 뒤져 아무 노트를 꺼냈다.

[5월 25일 - 흰토끼가 달린다. 빌에게 ‘스나크는 부점이었다’라는 암호를 듣는다. 험프티 덤프티가 살해당한다.]

‘스나크는 부점이었다’는 무슨 뜻일까? 부점인 스나크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쭉 부점일 텐데.

…아냐. 빌의 얼빠진 모든 말에 의미부여를 하다간 24시간이 모자랄거야.

아차, 시간이.. 빨리 가지 않으면 정말 늦을지도. 오늘은 실험 장치를 예약해 뒀던가.

여주는 자신이 기르는 햄스터에게 밥을 주고 서둘러 방을 나갔다.

여주가 대학 연구실에 도착했을 때 건물 안은 묘하게 어수선했다.

평소에는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직원들이 복도를 오갔고, 낯선 사람과 경찰관도 보였다.


김여주
무슨 일 있는거야?

여주는 한 살 많은 대학원생 디노에게 물었다.


디노
우지 교수님 연구실의 디에잇 씨가 돌아가셨대.


김여주
에?

여주는 귀를 의심했다. 디에잇과 그렇게 친했던 것은 아니지만 어제까지 쌩쌩히 살아 있던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충격이 컸다.


디노
나도 깜짝 놀랐어.


김여주
혹시.. 과로사..(조심스럽게)


디노
늘 다크써클과 어두운 기운을 달고 다니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하지만 아니야. 추락사래.


김여주
추락? 비행기 사고 같은?


디노
(귓속말로)옥상에서 떨어졌어.


김여주
설마, 자살..?


디노
음, 그건 조사 중인데 목격자 말로는 옥상 가장자리에 앉아서 다리를 흔들고 있었대.


김여주
목격자가 있어?


디노
응. 즉시 구급차를 불렀다는데 이미 늦어서.. 구급차랑 경찰차가 몰려와서 이 부근이 잠시 어수선했었나봐.

최근에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나?

여주는 문득 생각이 났다.

뭐였더라?


디노
분명 자살은 아닐 거야.


김여주
왜?


디노
자살할 사람은 아닌걸. 안 그래?


김여주
나는 디에잇 씨랑 그렇게 친하진 않아서..


디노
디에잇 씨는 무신경해. 주변 일에는 관심이 없다 해야하나. 옥상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도 그 사람다워. 어쩌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지 모르지.


김여주
오빠는 부주의로 인한 사고였다고 생각하는거야?


디노
내 생각은. 아무튼 오늘은 실험을 할 상황이 아닌 것 같아.


김여주
어? 그건 진짜 곤란한데. 오늘 증착 장치를 예약해 뒀다고. 오늘이 아니면 3주 후에나 쓸 수 있단 말이야.


디노
네 사정은 알지만, 오늘은 실험을 중지한다는 연락이 왔어.(자신의 문자내역을 보여준다)


김여주
하아.. 밤에도 안 되려나?


디노
야간 실험은 허가를 받아야 하잖아. 지금 신청해도 오늘 밤까진 힘들걸.


김여주
망했네. 학회 발표 날짜에 못 맞출 것 같아.


디노
흠.. 그럼 이번 주에 예약한 다른 사람에게 빌려달라고 해 봐. 여유가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디노는 풀이 죽은 여주를 달랬다.


김여주
음.. 그렇게 해 볼게. 고마워.


디노
아냐, 뭘. 내가 해준 게 뭐 있다고.

여주는 디노가 준 예약표를 보고 양보해줄 것 같은 사람을 골라 실험실을 돌아다니며 부탁해보기로 했다.

어느 실험실을 가도 학생들과 연구원들은 디에잇의 죽음에 대해 수근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여주의 머릿속에는 온통 실험 생각 뿐이었다. 디에잇 씨에게는 미안하지만 그의 죽음을 애도할 여유는 없었다.


김여주
목요일에 증착 장치를 예약하셨던데, 저랑 바꿔주시면 안 될까요? 학회 발표에 꼭 필요하거든요.

여주는 다른 연구실 대학원생에게 부탁했다.

미안. 나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거든. 학회 발표가 뭐야. 난 박사 논문 마감이 코앞이라고.


김여주
혹시 일정에 여유가 있을 만한 분은 모르실까요?

여유? 그런 사람은… 아, 아닌가…


김여주
누구든 괜찮아요. 지금 찬 물 더운 물 가릴 처지가 아니라고요.

뭐, 그렇다면. 여유롭다면 여유롭다고 느껴지는 사람을 알긴 하는데.


김여주
여유가 있는 건가요, 없는 건가요?

음, 별난 사람이긴 하지.


김여주
누군데요?

원우, 전원우. 아니?

이름은 안다. 같은 학년이지만 다른 학과에서 중간에 편입했기 때문에 그렇게 친하지는 않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느슨한 분위기에서 여유가 느껴지긴 했던 것 같기도..


김여주
일단 물어볼게요. 지금 어디 있는지 아세요?

그건 나도 모르겠네. 근데 빨리 찾는게 좋을걸? 내가 알기론 디에잇 씨랑 사이가 좋았어서, 경찰도 찾고 있는 모양이야.

그렇다면 시간이 없다. 경찰보다 먼저 찾아야 해.


김여주
감사합니다! 이만 가볼게요!

여주는 급하게 원우를 찾으러 나갔다.

다행히 원우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식당에서 멍하니 TV를 보고 있었다.


김여주
전원우!

여주는 원우를 발견하고는 뛰어가서 작지 않은 소리로 그를 불렀다.

원우는 천천히 여주가 있는 쪽을 돌아보고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김여주
안녕? 너, 모래 증착 장치를 예약했지? 그거 양보해 줄 수 있어?

원우는 다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김여주
목 아파?


원우
생각 좀 하느라.


김여주
뭘?


원우
여러가지를. 일단 장치 예약. 응. 아마 모레에 증착 장치를 쓸 예정일거야.


김여주
아마? 모레 일인데도 그렇게 애매해?


원우
모레 일은 모레 일이니까. 오늘 할 일만으로도 바쁘다고.


김여주
..지금 TV보는 건 뭔데?


원우
오늘 할 일 중 하나지.


김여주
느긋하게 TV나 보고 있어도 돼?


원우
왜? TV를 볼 수 없을 정도로 급한 일이 있나?


김여주
엄.. 네 친한 친구가.. 죽었다며.


원우
음?

원우는 또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김여주
또 뭐야?


원우
생각해야 할 게 하나 더 늘었네.


김여주
디에잇 씨 말이야.


원우
디에잇?


김여주
응


원우
나랑 친한 친구라니, 처음 듣는 소리네. 어쩌면 잊어버렸을지도.


김여주
그럼 내 착각이야. 그냥 친구였나보네.


원우
흠..


김여주
친구도 아니야?


원우
글쎄. 내가 잊어버렸을지도 모르지.


김여주
네가 생각하기엔 디에잇 씨와 어떤 관계인데?


원우
안면은 있는 사람. 너보다는 친하지. 적어도 복도에서 마주치면 인사는 하니까.


김여주
나랑은 인사하지 않았나?


원우
그것도 상당히 어려운 질문인데. 너랑 인사하는지 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도 답을 내놓아야 해?


김여주
그럴 필요 없어. 물론 내놓고 싶다면 그래도 되지만 그건 다음으로 미뤄두자.

하아, 이렇게 의미없는 대화를 최근에 또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원우
아, 생각났다!(여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김여주
뭐, 뭐야..(당황하며 눈을 피한다)


원우
넌 김여주야.


김여주
(황당한 듯)그걸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원우
응. 하지만 생각해내야 할 게 한 가지 더 있어. 그게 더 중요해.


김여주
증착 장치 예약 말이야?


원우
그건 벌써 생각났어. 난 증착 예약 창치를 쓸 예정이야.


김여주
바꿔줄 수 있을까?


원우
좀 곤란해. 다른 조의 증착도 맡아서. 나 혼자 실험하는거면 모르겠는데.


김여주
아아..(고개를 떨군다)어떡하냐, 진짜..


원우
무슨 실험을 할 건데?

여주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신의 실험 내용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원우
아하. 전극을 형성하기만 하면 되는 거네.


김여주
응. 맞아.


원우
그럼 스피터 장비를 쓰면 돼.


김여주
스피터 장비? 좀 거창하지 않아?


원우
거창하는 말든. 어쩌피 그것 말고는 방법도 없잖아. 스피터 장비라면 이번 주 중에 쓸 수 있을 거야.


김여주
(긴장이 풀어지며 살짝 웃는다)자기가 실험을 언제 예약했는지는 기억 못 하면서 다른 장치의 예약 상황은 알고 있는 거야?


원우
(샐쭉하게)기억 못 한 게 아니라 생각해내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린 것 뿐이야.


김여주
그게 그거지.

확실히 전극을 만드는 게 목적이니 스피터 장비를 써도 상관없겠네. 사용해 본 경험도 있으니 큰 문제는 없어.

실험을 제 시간에 끝낼 수 있겠어. 원우에게 물어보길 잘했다.


김여주
뭐, 아무튼 정말 고마워. 실험을 제 시간 안에 끝낼 수 있겠다.


원우
잠깐만.


김여주
왜? 뭐 더 할 말 있어?


원우
응. 잠시만 생각 좀.


김여주
아. 그러고보니 생각해내야 하는 게 하나 있다고 했지.


원우
응. 중요한 거야.


김여주
생각도 안 나는데 중요하다는 걸 알아?


원우
신기하게도 말이지.


김여주
오늘 사건에 관한 거 아니야?


원우
사건?


김여주
..그것도 잊어버렸어?


원우
아니. 오늘은 많은 사건이 있었으니까.


김여주
디에잇 씨의 사건만큼 중요한 게?


원우
아. 그 사건.


김여주
그거 말고 또 무슨 사건이 있는데?


원우
뭐, 자판기의 콜라가 전부 제로콜라로 바뀐 거라든가. 학교에 올 때 한 정거장 지나쳐서 내린 거나.


원우
(여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그리고 지금 네가 말을 건 거라든가.


김여주
그런 건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원우
중요함은 각자의 관점에 따라 다르지.

그럼 얘는 내가 말을 건 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건가.


김여주
내가 말을 건 게 중요한 일이야?

원우는 갑자기 눈이 커지며 몸을 움찔했다.


김여주
뭐, 뭐야?


원우
그래. 너에 관한 일이었어.


김여주
뭐가?


원우
정말 거의 다 기억났어. 조금만 기다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