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전생이, 일진의 아내?
빨간 실



유정
…그래도 소저, 반드시 마마의 곁을 지켜야만 합니다.

애락궁 안에서는 00과 태형이 담소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 밖에 선 지민이, 손 안의 금칠이 되어 있는 옥 반지를 매만졌다.

깊은 증오와 짜증이 담긴, 손가락의 놀림.


유정
공주 마마와 함께하는 것이, 이 어린 이의 유일한 낙이옵니다. 부디 저를 궐 밖으로 내쫓진 말아주시옵소서.


지민
유정이 너는, 세상이 두렵지도 않으냐?

지민이 유정을 내려다보았다. 첩의 충신, 더한 설명이 필요할까. 이 충성심으로 가득한 어린아이를 어쩌면 좋을까.

유정은 공주와 태형이 함께하기를 빌었다. 토신에게 빌라면 토신에게 빌고, 왕에게 빌라면 왕에게 빌었다. 평생 도와주고 살 수만도 있었다.


지민
네 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지는구나. 나에게 독이 되니까.


지민
나는 00이와 함께 살아가려고 한다.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죽고, 저 아이도 죽게 하려고 한다.


유정
…후회하실 겁니다.


지민
글쎄다.

지민은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태형
가락지를 한 번 차 보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그대에게 아주 잘 어울릴 거 같습니다.


000
태형아, 내 몸을 씻을 때 가락지를 잃은 거 같다… 미안하구나.

지민이 옥 반지를 매만졌다. 둘이 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적도 없었던 어린이같은 손장난을 해내었다.

이 반지는 태형이 죽어라 전을 모아 산 것이니 아마 조금이라도 마음이 꺾이겠지.


태형
괜찮습니다, 그대.

지민이 옥 반지를 쥔 손에 힘을 실었다. 장식에 손바닥 부근이 찢겼다.

그러고선 지민이 유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지민
유정아. 내 네가 있는 것에 늘 고맙게 여긴다. 하지만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 공주의 충신은 필요가 없지.

하지만 곧 모든 게 바뀔 것이다. 넌 나를 도와줄 수밖에 없게 되리라.

지민이 뒷 말을 삼키고 유정을 바라보았다, 곧, 한 무수리가 그들에게로 걸어갔다.

무수리는 그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조용히 애락관 안을 들여다보았다.


부새여
태형, 아름다워. 아름답다. 정말.

빗자루까지 집어던진 그녀는 황홀한 표정으로 안을 들여다본다. 지민이 유정과 함께 뒷쪽으로 들어가 숨었다.

정말 아름다운 사각관계네요. 오각관곈가. 유정이 한숨을 쉬었다.


지민
저 년은 내 곧 목을 치던지 해야지.


유정
머리 묶고 치라 그러십시오. 잘린 부위가 더 잘 보이도록 말이옵니다.


지민
…무슨 뜻이냐?


유정
말 그대로이옵니다. 머리, 묶고 치라 하시옵소서.

유정이 서서히 잉크가 번지듯 멀어져갔다.

허리가 당겼다. 아무리 넓은 침대라도 둘이 누워 있으니 영 불편한 게 아니었다.

김태형은 아무리 봐도 일어날 생각이 없는 거 같아, 내가 먼저 일어났다.

왜 이번엔 내가 주연이 된 꿈을 꾸지 않은 걸까.

그보다 석진 선배와 대화를 좀 해야 했다.

나는 천천히 김태형을 침대로 밀어넣고, 머리를 정리해준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에 묻은 먼지 등등도 털어냈다.


000
석진 선배, 어디 있지.


김석진
여기 있는데, 너랑 얘기할 시간은 없을 거 같네. 박지민이 나를 급하게 부르거든.

석진 선배가 문틀에 서서 내 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난 깜짝 놀라서 뒤로 엎어져버렸다. 덕에 김태형의 잠을 조금 깨우게 되었다.


000
…박지민이랑, 선배가요?


김석진
어. 나를 열심히 찾는 거 같네. 나를 너무 보고 싶어해. 박지민이.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석진 선배가 나가게 했다. 그리고 나도 천천히 걸어나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의심스럽긴 한데.

타닥 타닥. 거실로 나가자 경쾌한 타자 소리가 들렸다.


000
응…?


배수지
아, 이제 일어나니?

수지 언니가, 사나 언니와 정호석 사이에 둘러싸여서 타자기를 두드리고 있다. 뭐지, 뭐 하는 거지.

수지 언니의 척 봐도 비싸 보이는, 키보드 사이사이에서 반짝거리며 빛까지 나오는 노트북 화면에는 노이즈가 가득한 영상 같은 것이 비쳤다.


배수지
난 네들 그 방에서 뒤진 줄 알았어. 약속 못 지키는 줄 알고 식겁했잖아.


김유정
약속 막 하는 거 아니라니까.


배수지
니가 할 말은 아니지 않냐. 약속이라기보단, 막 살아서 망한 케이스 아니야?


미나토자키 사나
수지, 저거 너 아냐?

사나 언니가 화면에 비치는 한 여성을 가리킨다.

CCTV 화면인 건지, 지직거리며 화면에 노이즈가 한 번 꼈다 풀릴 때마다 수지 언니가 비틀거리다가 다시 고개를 흔들며 제대로 걷기를 반복한다.


배수지
이야. 제대로 보니까 또 저런 예쁜 또라이가 따로 없네. 나 왜 저러냐.


000
나도 같이 볼래요. 조금만 비켜주세요.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자, 의외로 순순히 자리를 내주는 호석과 수지 언니.

화면에는 이리저리 비틀거리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반대쪽 방향으로 달려가는 수지 언니가 비친다.


배수지
야. 좀 앞을 봐야겠는데. 좀 당겨 볼게 내가. 기다려 봐.

그 때, 방에서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박지민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황급히 그 방으로 달려갔다.


박지민
씨발, 김석진…

박지민과 김석진, 둘이 엎치락뒤치락 바닥을 뒹굴고 있다.

나는 뛰어가서 누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박지민을 막아섰다.


박지민
…000.


김석진
고마워.

박지민이 나와 석진 선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눈에는 악이 가득 받쳐 있다.



박지민
…씨발, 너무한 거 아니냐고. 이건 진짜.

박지민이 눈이 빨개져서는 금방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갈 것처럼 나를 쏘아보다가, 뛰쳐나간다.

좀 괜찮아졌구나, 하고 마음을 놓는데 석진 선배가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따뜻한 손길에 나도 모르게 힘이 빠져 한 발 물러섰다.

석진 선배는 계속 내 머리를 만져 주다가, 갑자기 유정 선배에게 다가갔다.


김석진
난 유정이 되게 좋아했어. 태형이가 사랑하는, 00이. 잘 지켜 줬거든.

석진 선배가 유정 언니의 머리카락을 끌어올렸다.


김석진
머리, 묶어 봐.


000
선배 지금 유정 언니 의심하는, 거에요?

내가 눈을 크게 뜨고 말뒤를 끊어도 석진 선배는 계속 유정 선배만 바라봤다.

내가 유정 선배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 달라고 쳐다보자,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은 유정 선배가 내 앞에 비쳤다. 깊고, 짙은 웃음.


김유정
어떻게 알았어?


000
…부새여?

내가 유정 언니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진짜, 진짜 부새여가 유정 언니라고?


000
그럼, 진짜 유정 언니는 어디 있어요?


김유정
내가 알겠니,

유정, 아니 부새여의 환생은 놀라우리만치 뻔뻔했다. 드러났다고 저러는 꼴이라니.


000
…석진 선배는 알죠?


김석진
네가 모르는 게 너무 놀랍다. 유정이는 칼을 맞고 죽었어.


000
배에 흉터가 난 건, …설마. 진짜 설마.

나는 뒤를 돌아봤다.

맞추신 분들도 있더라구요, 유정이는 「전생의 감정은 현생으로 넘어오지 않고, 그냥 네가 겪었다는 게 슬플 뿐이다.」라는 말을 했어요.

하지만 훨씬 전에 석진이가 밝혔던 말과는 너무 다르죠. 석진이는 「감정, 고통, 특징 모두 현생으로 넘어온다」고 했으니까요.

그럼 진짜 유정이는 누구일까요? 정주행하면서 알아보시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