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우주
제 1장:필연(必然) Ep.2


2020년 2월 27일 목요일.

인천 계양산 인근 인적 드문 곳에 위치한 3층 저택. 굳게 닫혀있던 정문이 열리고 천호(天狐) 모습의 준영과 상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退魔師 이상연
"계속 그 상태로 갈 거야?"


天狐
"아뇨~"

천호(天狐)의 눈동자에 갈색빛 아지랑이가 일었다. 희뿌연 안개가 천호(天狐)를 뒤덮었다. 곧 안갯속에서 준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天狐
"역시 사람 모습일 때가 좋다니까."

준영이 양 팔 위로 기지개를 쭉 펴며 외쳤다.


退魔師 이상연
"저택이 인적 드문 곳에 위치해서 참 다행이야."


天狐 배준영
"전 뭐 굳이 안 그랬어도 상관없는데."


退魔師 이상연
"어째서?"


天狐 배준영
"숲속 집에선 곳곳에 숨어있는 상급 요괴들 땜에 집에서만 사람의 모습으로 있었거든요. 하지만 여기는..."

준영이 성큼성큼 상연에게로 다가섰다.


天狐 배준영
"인간들 밖에 없잖아요. 제가 상급 요괴들한텐 질 수 있어도 인간한텐 절대 안 지거든요."

준영이 오른 검지로 상연의 얼굴을 가리켰다.


退魔師 이상연
"...."


天狐 배준영
"응? 형 귀 왜 빨개? 춥지도 않은ㄷ···"


退魔師 이상연
"할 말 다 했으면...그만 가지?"

상연이 헛기침을 하며 준영를 가볍게 밀어냈다. 준영은 옅게 미소 지으며 홱 뒤를 돌았다.


退魔師 이상연
"휴..."

상연이 기분 좋은 콧노래를 부르며 앞장 서가는 준영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준영아. 넌 모르지? 네가 사람으로 둔갑해있을 때 얼마나 이쁜지? 마음속으로 수십 번도 더 외쳤던 말. 상연은 지금 준영이란 이름의 천호(天狐)에게 매료돼도 단단히 매료돼 있었다.


退魔師 이상연
"넌 인간 세상에 내려오면 가장 하고 싶은 게 뭐였어?"


天狐 배준영
"뭐. 딱히 하고 싶은 건 없고...보고 싶은 건 있어요."


退魔師 이상연
"그게 뭔데?"

준영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꽃봉오리로 시선을 옮겼다.


天狐 배준영
"아빠가 엄마 성묘에 항상 놓고 오던 꽃이 있었는데...엄청 이뻤거든요."


退魔師 이상연
"기억나? 꽃 생김새?"


天狐 배준영
"음...분홍색 꽃이었고 꽃잎은 한 5개 정ㄷ···"

오싹- 갑자기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준영이 낯빛을 굳히며 우뚝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天狐 배준영
"야. 숨어있지 말고 나와."

유정현
"이런 곳에서 동족을 만나다니. 근데 웬 불청객이 계시네."

놀랍게도 둘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배우였다.


天狐 배준영
"배우? 요괴 주제에 아주 뻔뻔하시네."

유정현
"오호라. 노란머리 너 천호(天狐)구나?"

상연은 총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준영의 앞을 막아섰다.


退魔師 이상연
"어디 이 천호(天狐) 털 끝 하나라도 건드려봐."

유정현
"풉...어쩌나?"

정면을 향해있던 유정현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왼쪽 갈림길에서 다른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유정현
"너 같은 퇴마사는 다루기가 너무 쉬운데."

팟- 유정현이 왼쪽 갈림길로 손을 뻗었다. 영문도 모른 채 순식간에 유정현의 인질이 되어버린 운 없는 남자의 주머니에서 'Kim Young Hoon' 이란 글씨가 새겨진 여권이 떨어졌다.


退魔師 이상연
"저 치사한 xx가...!!"

상연이 외마디의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유정현이 영훈의 목에 시퍼런 칼날을 드리웠다.

유정현
"자. 험한 꼴 보기 싫으면 당장 그 총 내려."

상연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총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인질이 다치지 않는 게 최우선이었다.

유정현
"자. 이제 그 천호(天狐) 이리 데려와. 어서."

상연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준영에게로 손을 뻗었다.


靑龍 김영훈
"지금 감히 누구 몸에 손을 대는 거지?"

영훈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영훈의 오른손에 남색 빛 장검 한 자루가 소환됐다. 푹!- 영훈은 1의 망설임도 없이 유정현의 옆구리를 칼로 찔렀다.

유정현
"컥!...너는 ㄷ...대체??"


靑龍 김영훈
"사라져라."

영훈이 유정현의 옆구리에 칼을 더 깊이 쑤셔 넣었다.

유정현
"캬아악!!"

유정현은 큰 괴성과 함께 고른 가루가 되어 완전히 소멸됐다.


靑龍 김영훈
"후..."

영훈이 눈을 감으며 짧게 심호흡했다. 영훈의 손에 들려있던 검이 자취를 감췄다. 악의 기운도 선의 기운도 아닌 난생처음 느껴보는 이질적인 기운이었다. 상연은 잽싸게 바닥에 내려놓은 총을 집어 들었다.


退魔師 이상연
"야. 너 뭐야?"

저건 스피리투스 퇴마사 가문의 총? 영훈이 옅게 미소 지으며 둘과의 거리를 좁혔다.


退魔師 이상연
"안 멈추면 쏠 거야!"

영훈이 오른 검지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상연의 손에 들린 총이 덜그럭거렸다. 상연의 얼굴에 당혹감이 퍼졌다.


退魔師 이상연
"어...??"


靑龍 김영훈
"안심하세요. 전 그쪽들 해칠 생각 전혀 없으니까."


退魔師 이상연
"...."


靑龍 김영훈
"스피리투스 가문의 총을 지니고 있는 걸 보아...그쪽도 평범한 사람은 아닌 모양인데."


退魔師 이상연
"너. 정체가 뭐야? 지금 너한테서 뿜어져 나오고 있는 그 기운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운이야."


靑龍 김영훈
"그야. 당연하죠."


退魔師 이상연
"당연하다니?"


靑龍 김영훈
"퇴마사님. 오방신(五方神)에 대한 이야기 들어보신 적 있으시죠?"


退魔師 이상연
"오방신(五方神)이라면...동서남북의 방위를 나타내고 우주의 질서를 지킨다는 전설 속 동물?"


靑龍 김영훈
"역시 정확히 알고 계시네요. 오방신(五方神)들은 신이 정한 특정 사람의 몸에 깃들어 산다는 것도 물론 아실 테죠."


退魔師 이상연
"그럼...너 설마?"


靑龍 김영훈
"네. 맞아요. 제가 바로 동쪽을 수호하는 신 청룡(靑龍) 신의 권속인이에요. 사원도 아니고 이런 시골 동네에서 퇴마사와 권속인이 마주할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退魔師 이상연
"그야..."


靑龍 김영훈
"1%도 안될걸요. 어때요? 이제 저에 대한 경계심을 풀 마음이 좀 생겼어요?"

영훈의 언변은 흠잡을 데 없이 논리정연했다. 상연은 입을 다문 채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2층 계단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분주한 손길로 아침을 준비하던 주연의 고개가 돌아갔다. 영훈이 방긋 미소 지으며 주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半獸 이주연
"깨셨어요? 혹시 잠자리가 불편했다던가 그러진 않으셨죠?"


靑龍 김영훈
"응. 근데 주연아. 어색하게 않으셨죠가 뭐야? 너랑 나랑 1살 차이 밖에 안 나. 말 편하게 해. 청룡(靑龍)이 뭐 대단한 거라고."

식탁으로 시선을 돌린 영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靑龍 김영훈
"와. 이거 다 네가 만든 거야? 요리 솜씨 끝내준다."

식탁 위엔 주연이 아침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준비한 여러 가지 반찬들이 올려져 있었다. 주연이 힐끗 1층 준영의 방을 쳐다보았다.


半獸 이주연
"천호(天狐)님을 보좌하면서 이것저것 배웠거든요. 아버지가 사람이시기도 했고요."


靑龍 김영훈
"그렇구나."


半獸 이주연
"밥 금방 되니까 거실에서 조금만 기다려요."


靑龍 김영훈
"있잖아. 지금은 마음만 받을게. 내가 원래 아침밥을 안 먹어서. 대신 잠깐 나갔다가 이따 저녁엔 꼭 합석할게."

오방신(五方神) 중엔 사신(四神)이 아닌 사영(四靈)으로 구분되는 유일한 신이 있다.

그 신은 바로 황룡(黃龍), 황룡(黃龍)은 중앙을 수호하는 신수로 가장 강하다기보다 사방신(四方神)이 서로 충돌하지 않게 중재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나머지 사방신(四方神)에게 미래에 닥칠 위험을 미리 알려주곤 한다.

며칠 전, LA에 위치한 Urth coffee.


黃龍 최찬희
"형이 곧 마주하게 될 존재들...그들은 과거의 적들과는 다르데."

찬희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靑龍 김영훈
"다르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黃龍 최찬희
"그들이 노리는 건 사방신(四方神)이 아닌 권속인의 목숨...오직 그뿐이래."

영훈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黃龍 최찬희
"그리고 전에 형이 알아봐달라 한 거."


靑龍 김영훈
"응."


黃龍 최찬희
"운이 따라준 건지...현진이를 제외한 나머지 권속인은 지금 모두 대한민국 인천시에 머물고 있데."

퇴마 사무소에서 일하다 보면 우연히라도 권속인들을 만날 수 있지 않겠냐는 상연의 말에 영훈은 잠시 동안 사무소에 머물기로 했다.


靑龍 김영훈
"최대한 빨리...나머지 권속인을 찾아서 사무소를 나와야 해."

영훈은 사방신(四方神)과 연관 없는 자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건 원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