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만 나 재워줘요,
하룻밤만 나 재워줘요, | 53화



_한진의 사무실 안쪽, 그가 평소 휴식을 취하던 공간에 들어선 두 사람. 태연한 태도를 보이는 비서인 반면에, 정국은 그렇지 못하다.


전정국
…방법이 없어요? 하나도?

"…저도 갇힌 신세인데, 제가 뭘 알겠습니까."


전정국
그쪽을… 가뒀다고?

_정국이 점차 비서에게로 다가왔다. 믿을 수 없다는 어조였다. 마치 넌 알고 있으니, 내게 당장 불어라_라는 눈빛으로.

_마침내 비서의 등이 벽에 닿았을 때, 정국 또한 멈춰섰다. 있는 대로 말해, 빠져나갈 생각 말고.

"……정말 모릅니다."


_비서의 말을 듣던 정국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어이없다는 듯이 터뜨린 실소와 함께.


전정국
김한진이 당신한테… 명령했겠지.


전정국
나를 붙잡고 있으라고.

_왜, 날 붙잡고 있으면 당신은 살려주기라도 하겠대요? 웃음이 섞여있는 말투였지만, 이곳의 분위기는 웃음이 섞여있지만은 않다.



전정국
……잘 선택해요.


전정국
김한진이 과연 당신을 살려줄까.


그 친한 친구였던 나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었는데, 그쪽이라고 오죽하겠어.


"……."


전정국
…그쪽 뜻이, 당신도 죽길 바라는 겁니까. 정말.

_가까이 서서 추궁하던 정국은 이내 비서로부터 시선을 거뒀다. 도무지 입을 열 길이 없어 보이는 비서가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_이내 포기하고 물러서는가 싶더니, 다시금 비서를 쳐다본 그가 입을 열었다.



전정국
……당신이 죽고 싶어도 난 안 돼요.


전정국
내가 살려야 할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_도와줘요 나 좀. 목 끝까지 차오르는 울컥하는 무언가에 의해 말을 멈춘 그였다. 제발 제 앞에 있는 사람이 나에게 도움 주기를 바라며.



···


한 편, 여주의 상황.


_검은 천으로 된 봉투에 머리가 둘러싸여 의문의 남자들로 인해 어딘지 모를 곳으로 끌려오게 된 여주.

_최대한 힘이 닿는 데까지 반항을 해보지만, 건장한 성인 남성들을 여자 한 명이 어떻게 이기겠는가.


박여주
이거 놔! 김한진 그 자식이 시킨 거야, 이것도?

_끝내 낡은 원목 의자에 앉혀져 두 손 두 발 다 의자에 묶여버린 여주. 마침내 제 시야를 가리던 검은 천이 사라지자… 안도의 한숨도 잠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박여주
…….


박여주
…진짜, 넌 매번 예상을 뛰어넘는다.

_차에 실려 오는 내내 결박된 몸을 이리저리 비트느라 제법 지쳤던 여주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는데, 그런 그녀의 이마를 쓸어주며 비릿한 웃음을 짓는 누군가.



김한진
내가 조금, 그런 편이긴 하지.

_이제는 너랑 말다툼 상대할 기운도 없다는 듯이, 다른 곳을 응시하며 헛웃음을 내뱉은 여주.

_다시금 한진과 시선을 마주하더니, 입을 열었다.


박여주
네가 원한 게 애초에 나였구나…?


김한진
으응~ 과연 너였을까?-

_가소롭다는 듯한 웃음을 지은 한진의 손짓에, 어디서로부터 나온 검은 옷차림의 남성들이 기진맥진해 보이는 사람 둘을 바닥에 떨궜다.

_그들 또한 여주처럼 손발이 묶여있는 상태였고…, 그런 그들을 가만 보던 여주의 표정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박여주
……너 진짜 미쳤니?!

_입술은 다 터지고, 눈은 부어있고… 입었던 옷은 군데군데 까져있는 그들. 한눈에 봐도 한진이 시킨 사람들에 의해 몹쓸 짓을 당한 남성들은…

_여주가 아침 내내 그토록 찾던 기자 둘이었다. 현우와 지훈.


김한진
어, 조금 미친 것 같기도 해.

_현우와 지훈은 거의 반쯤 눈을 감아, 의식을 잃어가기 직전. 한참 떨어져있는 여주는 그들을 향해 목 놓아 소리쳤다. 괜찮아요? 내 말 들려요?


박여주
…정신 차려봐요, 제발!!


박여주
기자님들…!

_이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하나 둘씩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방울. 여주의 하얀 셔츠가 점차 투명하게 물들여지기 시작했다.


김한진
…눈물 나는 우정이다, 진짜.


박여주
…….


박여주
…개새끼…. 넌 진짜 개새끼야….

_한진을 두 눈 부릅 뜨고 응시하는 여주에, 한진이 재밌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그러니까~ 적당히 나댔어야지.


김한진
난 쟤네가 날 두고 등 돌릴 줄은….


김한진
이야~ 상상도 못 했거든 ㅋㅋㅋㅋㅋㅋ

_급기야 고개 젖혀 웃기 시작하는 한진에, 여주가 인상을 한껏 찌푸렸다. 진짜 소름 끼쳐.


김한진
소름 끼치는 건… 나야.


김한진
내가 믿던 사람들한테 배신을 당했다니까?

_그에 대한 대가를 마땅히 치른 것뿐이야, 저것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하는 한진이에, 여주가 입을 열었다.


박여주
…….


박여주
…넌 진짜, 갱생 불가네.

_보기 더러우니까 제발 내 앞에서 꺼져, 미친 새끼야….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가 완전히 끝 맺히기도 전에 살과 살의 둔탁한 마찰음이 울렸다.

_그와 동시에 여주의 고개는 돌아갔고, 한진은 태연한 미소를 지으며 제 손목을 돌렸다.


김한진
…왜 자꾸 새끼, 새끼거려-.

_참아주려 했는데, 듣기 좀 거북하네? 여주의 턱을 손가락으로 들어올린 한진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박여주
…….

_한진이 여주의 턱을 드는 바람에, 점차 거세지고 있던 빗줄기는 그대로 여주의 얼굴을 타고 흐르고.


김한진
하아-. 비가 계속 올 모양이네.


김한진
이러면 계획에 차질이 좀 생기는데-.

_여주의 턱에서 손가락을 뗀 한진은, 몇 번 여주의 얼굴을 쓸어주더니 여주로부터 멀어졌다.


김한진
불을 지르기는 조금 힘들겠다, 그치?


박여주
……뭐?


김한진
원래는~ 그냥 이 건물에 불 지르려 했었거든.


김한진
자꾸 이상한 일 들쑤시고 다니는 놈들만 여기로 모아서.

_한 번에 처리해버리려고. 근데 비가 오네? 여주를 향해 웃어 보인 한진.

_한진의 말을 듣고 있던 여주는 이제 더 이상 놀랄 것도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김한진
…일이 귀찮아지네. 따로 처리하려면.

_검지로 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던 한진은, 이내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제 주위를 지키고 있는 남성들에게 속삭였다.

_그리고선 다시금 여주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하는 말이…



김한진
…여기서 떨어져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박여주
…….

_이 상황에 구원자라도 나타난 걸까.

_마침 한진이 그렇게 여주에게 속삭이는 참에, 부러질 듯한 소리가 나며 열리는 옥상 출입문이었다.



찌인한 고구마가 있으면 찌인한 사이다도 있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