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만 나 재워줘요,
하룻밤만 나 재워줘요, | 54화


[이번 화에는 보시기에 다소 불편한 요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은 보시지 않기를 권장합니다.]


_어느새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는 비로 인해, 옥상 바닥 군데군데 물로 얼룩진 웅덩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_옥상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정국이었음을.




_손은 묶여있는 와중에 빗방울은 계속해서 얼굴을 타고 흐르길래 여주는 시야 확보가 제대로 안 되고….

_여주의 앞에 서있던 한진도 문이 열리는 쪽을 향해 뒤돌았다.

_정국이 한진에게 다가오려고 발걸음을 떼기 무섭게, 양옆에 있던 남자들로 인해 팔이 묶여버렸고.


김한진
뭐야-. 네가 여긴 어떻게 왔지?

_골치 아프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운 한진이 중얼거렸다. 이 비서를 협박이라도 했나.

_그 말과 동시에 여주의 뒤로 다가가 서는 한진. 정국과 마주 본 채로 꽤나 비열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다.

_그런 한진의 반응으로 인해 방금 막 옥상에 올라온 남자가 정국임을 알아 차린 여주. 복잡한 마음에 아랫입술을 피가 고이도록 깨물었다.

_그에게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도, 한진이 정국을 이용한 것도, 정작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금도. 다 억울하고 분한 제 감정을 억누르기 위함이었다.


전정국
……할 이야기가 있으면 나랑 해.

_그런 여주를 보고 있는 정국의 심정은 오죽할까. 일분일초가 다급해지는 와중에, 오히려 그의 심기를 더 건드리고 마는 한진이었음을.

_여주의 고개 옆으로 제 고개를 가까이 한 한진은 여주에게 말했다. 정국에게 시선은 둔 채로.


김한진
어떡하지-. 그렇게는 못해주겠는데.

_들으란 듯이 낄낄 웃은 한진은 USB 두 개가 담긴 지퍼백을 여주의 눈 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_기자들과 여주가 한진에 관한 자료를 모두 담아두었던, 한진의 정체를 세상에 알리기 위한 근거.

_현우와 지훈으로부터 얻어낸 모양이었는지, 세상 통쾌하다는 듯이 웃어 보이는 그.


김한진
어때, 눈앞에서 너의 수고가 날아가는 순간을 보게 된 소감이.


박여주
…….


박여주
……진짜, 멍청해.

_그에 덩달아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은 여주. 동시에 한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박여주
…내가 그런 거 하나 복제를 안 해뒀을까, 설마.


박여주
너무 좋아하네…….

_여주는 한치의 떨림도 없는 눈빛으로 한진을 노려봤다. 그런 두 사람의 대화 내용도 모르고 멀리서 보고만 있는 정국의 입장에서는 애가 타고.


김한진
…내가 그거 하나를 못 찾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박여주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서 말이야.

_한진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여주를 어떻게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가득했다.

_그렇게 두 사람의 숨 막히는 신경전이 오고 가는 와중에… 무언가를 꺼내드는 한진.



박여주
……하.

_제 목 밑으로 보이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칼날에, 여주가 놀란 탓에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_여주의 머리채를 잡고 뒤로 젖힌 한진은, 날카로운 칼날을 여주의 목에 가까이 들이밀었고.

_건장한 덩치의 남성들에 의해 발목이 붙잡혀 볼 수밖에 없는 정국이는 온갖 힘을 다 써보지만, 그게 먹힐 리 없다.


전정국
……이거 놔.

_한진으로부터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는 여주를, 그리고 꿈쩍도 못하는 자신을_ 수시로 번갈아보던 정국은 끝내 망설이더니 제 옆에 있는 남성의 복부에 발을 내리꽂았다.

_정국의 옆에 있던 남성이 순간 중심을 잃으면, 그 틈을 타 반대편에 있던 남성에게로 뒤를 도는데…

_아니나 다를까, 저를 붙잡고 있던 녀석들 중 한 명이 또 다른 남성을 제압하고 있는 게 아닌가.

_순간 당황한 정국이, 유독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자신을 도와주는 그를 확인하는데…




_익숙한 얼굴에, 반응조차 얼어버린 정국이었다.



박지민
…지금 그럴 때입니까? 정신 차려요.

_그것도 잠시, 지민의 일침에 정국은 우선 여주를 향해 달려갔다. 지민이 여긴 알아서 한다고 했으니.





전정국
칼 내려놔, 김한진.


김한진
…내가 니 뜻대로 해야 할 이유는 또 뭔데.ㅎ

_제 경호원 중에 정국의 편이 심어져 있을 줄은 예상 못 했는지 당황한 기색도 잠시, 꽤나 여유로워 보이는 한진.



전정국
칼로 찌르려면 차라리 나를 찔러.


전정국
애초에 니가 원한을 품던 사람은 나잖아.


김한진
…그래ㅎ 너였지.


김한진
아직도 유효해, 내가 너한테 원한이 있다는 건. 근데…



김한진
이제는 네가 약점이 생겼잖아.


김한진
네가 지켜야 할 사람이 여기 있는데 내가 뭣하러 널 찔러.

_네 약점을 건드려야 네가 더 미치겠지, 안 그래? 한진의 눈빛에는 더 이상 이성이라곤 남아 있지 않았다.

_오로지 그의 목적은 정국을 해하려는 것일 뿐.



박여주
……찔러.

_그때, 여주가 입을 열었다. 눈을 지그시 감더니, 다시 뜨고서는 한진을 똑바로 응시한 채로.


박여주
찌르려면 찔러, 얼마든지.


박여주
김한진 네가 내키는 대로 해-.


전정국
박여주 씨!



박여주
…네가 원하는 게 나라면.


박여주
……그렇게 해.


전정국
박여주 씨, 그만해요.

_여주의 눈가에는 투명한 물이 고여갔다. 정국은 당장이라도 한진을 밀쳐내고 싶었지만, 그러다 칼날이 가까이 있던 여주에게 박힐지도 모르는 거니까.

_앞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박여주
왜, 막상 찌르려니 겁 나…?


박여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는데 ㅇ….

_그때였다. 정말이라도 여주의 목에 칼을 가져다 댈 것만 같은 한진의 기세에, 정국이 끝내 그의 앞으로 다가선 게.


_여주의 목 부근을 향하던 칼의 방향이 뒤틀리며, 칼날이 여주의 어깨를 스치자 옷이 찢어지며 어깨 부근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고…

_뒤틀린 칼의 방향은 정국을 향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국이 칼날을 양손으로 무작정 잡아 제 쪽으로 가까이했다는 말이다.


_옥상 바닥에는 빗물과 뒤섞인 검붉은 선혈이 작은 지름의 원을 만들어내며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우리 조금만 견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