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만 나 재워줘요,

하룻밤만 나 재워줘요, | 55화

_그런 정국의 반응을 예상 못했다는 듯, 한진의 표정도 점차 굳어갔다. 그런 두 남자를 바로 앞에서 지켜보고 있던 여주의 표정은 더더욱.

_멈출 줄을 모르고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검붉은 액체가 물웅덩이에 색소가 퍼지듯 섞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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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정국 씨, 정국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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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정국 씨!

_한편, 팔과 다리가 묶여있는 탓에 여주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소리 지른다. 그런 와중에 초점이 없는 한진의 눈빛에, 여기서 더 문제가 벌어질까 봐 걱정되고.

_있는 힘껏 발버둥쳐도 소용이 없는 와중에, 저 멀리서 몸싸움이 벌어지는 걸 알아챈 여주. 머지 않아 그 중심에 서있는 사람이 지민인 걸 깨닫고서는 적지 않은 충격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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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안 돼. 이거 풀어야 해….

_자기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기에는 살려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안절부절못하는 와중에… 여주의 시선에 들어온 두 사람.

_기진맥진한 상태로 바닥에 쓰러져있는 두 기자를 향해 소리쳤다. 제발 정신 차려요! 나 좀 풀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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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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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하이씨…….

_하는 수없이 팔목을 단단히 묶어놓은 밧줄을 의자 손잡이에다 대고 계속해서 마찰시켜보는 여주.

_한편, 여주의 앞에 서있던 한진과 정국. 정국의 손이 빨갛게 물들여졌음에도 불구하고 한진은 칼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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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진

미쳤구나,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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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미친 건 너야.

_한진이 칼의 손잡이만 세게 움켜쥘수록, 정국이도 제 고통은 모르고 칼날을 더욱 세게 말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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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제발 그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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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네가 지은 죄 다 인정하고 벌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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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진

…내 죄를 인정하는 건 내가 알아서 해.

_충분히 묻어갈 수 있는 일을 니가 뭔데 나서. 한진의 말을 다 듣진 못한 채 정국의 의식은 점차 흐릿해져 갔다.

_그때 마침 손목의 밧줄을 풀어낸 여주는 발목을 옥죄이고 있는 밧줄을 풀어내기 바빴고.

_그런 여주를 가만 보던 한진은 정국으로 인해 빨갛게 물들어진 칼을 빼내려 애썼지만, 정국은 제 힘을 다해 끝까지 칼날을 붙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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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박여주 다치게 할 생각이라면 접어.

_가만 정국을 노려보던 한진은, 빈틈을 타 그의 손으로부터 칼을 빼들었다.

_마침 그때, 발목의 밧줄까지 풀어낸 여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생각할 새도 없이 의자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려 한진을 향해 내던졌고.

_그때 한진이 바닥으로 넘어지며 떨군 칼을 재빠르게 먼 곳으로 던져버리는 여주였다.

_한진이 정신 못 차릴 동안 정국의 상태를 살피는데… 그 예쁘던 손이 칼에 깊이 파인 자국으로 가득했다. 정말 손이 잘릴 정도의 자국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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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안 돼. ㅇ, 이게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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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여주 씨야말로.

_감각조차 없는 손을 여주의 다친 어깨에 가져다 댄 정국이 눈물인지 빗방울인지 모를 액체를 흘렸다.

_여주는 제 상태는 뒷전, 만신창이인 정국의 손을 보고 절망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던 참_ 그들에게 다가오는 지민이었음을.

_여주가 다친 걸 보고서는, 지민은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꾹 다물더니 한진을 한 번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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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지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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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지민아, 이 사람… 이 사람 얼른 병원 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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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데리고 가야 하는데…!

_멈출줄 모르고 흐르는 핏방울에, 여주는 소리 내어 울었다. 정신 차려요, 정국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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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얼른 가.

_누나가 전정국 데려가야한다는 지민의 당부에, 여주가 물었다. 그럼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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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나는 기자분들 데리고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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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가서 신고 좀 해줘, 여기 다친 사람들 많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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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정말 괜찮겠어?

_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여 보인 지민. 그는 한진에게로 다가갔고, 여주는 지민을 신경 쓸 새 없이 점차 의식을 잃어가는 정국을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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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정국 씨, 정신 차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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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아파도 조금만 참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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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내가 미안해요…. 그러니까 제발,

_한꺼번에 많은 양의 피를 쏟아낸 정국은 점차 눈에 힘이 풀려가고 있었다. 여주의 품에 안긴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겹게 입을 떼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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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미안해요, 여주 씨.

"……내가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한 애인이 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정말 많이."

···

김한진과 전정국.

공통점이라곤 없어 보이는 둘의 인생에, 한때 두 사람도 맞는 부분이 있었고 사이가 돈독했던 때가 있었다.

열일곱, 두 사람은 같은 나이에 솔로 가수로 데뷔를 했다. 정국은 성공적으로 대중에게 제 노래를 알리는가 하면, 한진은 그와 달리 무명의 시간이 길었다지.

소속사와 합의 끝에 한진은 모델의 길로 들어섰다. 긴 피지컬과 우월한 외모로 각종 패션 기업의 러브콜을 받아 가며 모델로서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고.

모델계에서는 이름만 불러도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의 유명인이 된 한진은, 제 자금으로 소속사를 하나 세웠다.

그게, 지금의 정국의 소속사 HJ 엔터테인먼트.

마침 기존의 소속사와 계약 기간이 끝났던 정국을 노린 한진은, 오로지 돈이라는 목적으로 정국에게 부탁을 한다.

어릴 때 같이 음악을 하며 몇 번 보던 사이, 즉 옛정을 봐서라도 내 소속사에 들어와달라는.

당시 둘의 나이 스물 둘. 정국은 순순히 계약서에 서명을 했지만…

진정한 비극은 그게 시작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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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이게 뭐야, 김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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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분명 계약서랑 내용이 다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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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진

…아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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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진

글쎄, 뭐가 달라? 난 잘 모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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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애초에 네 목적은 내 돈이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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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진

야-. 우리 사이에 말 서운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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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진

돈이라니. 다 너 잘 되게 해주려고 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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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다 내가 잘 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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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그딴 개소리 집어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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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네가 나한테 가져온 건 위조 계약서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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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내 수익을 네 몫으로 돌리고 싶은가 본데… 그렇게는 못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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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텐데?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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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진

잊었나 본데, 우리 계약 위약금 액수가 만만치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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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야, 김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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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진

정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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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진

위약금 못 물어내잖아,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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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진

그럼 그냥 이렇게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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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진

우리 아직 계약기간 6년 남았다-?

···

하루는 그랬다.

한진 또한 정국이 계약과 관련해 뭐라 말하는 게 은근 거슬렸던 거지.

그래서 이왕이면, 발목 제대로 잡으려고 자신이 다니던 인적 드문 길에 있는 술집에 정국을 끌어들이고….

그곳에서 정국을 반쯤 혼미한 상태로 만들어, 약을 하게 만든 것.

이후로 그 상황을 동영상으로 찍어두고, 정국이 회사와 계약을 해지하겠다는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한진은 협박하려 들었고.

어쩔 수 없던 정국은 순순히 한진의 계획에 따르는 수밖에.

하필이면 불행하게도, 그 약의 부작용이 불면증이었던 지라 수면제 없이는 잠을 잘 수 없는 삶을 살게 된 정국이었다.

무대 위에서는 한없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던 사람이,

소속사에만 가면 그저 돈 버는 기계의 위치가 되어 있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는 말.

한 편으로는, 자기 몰래 약에 맛을 들인 한진이 꽤나 걱정되었던 정국이 그를 말려보기도 했다.

정신 차려라, 이거 범죄다. 자꾸만 정국이 기회를 줄 때마다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며 신경 끄라는 일관된 반응의 한진이었지만.

그리고 스물 넷. 정국의 사망설이 보도된 올해.

살고 있는 삶이 도저히 죽은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여긴 정국은, 끝내 도피를 택했다.

한진에게 아무 말도 없이, 소식을 알리지 않고 잠적을 하게 된 것.

한 편, 한진은 그저 이런 정국의 행동이 가소롭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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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진

감히… 나한테 말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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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진

제 멋대로- 하겠다, 이거지.

그런 정국의 태도가 괘씸했던 한진은, 정국이 어디 한 번 잘 살아보라는 의도로 거짓 사망설을 보도했다.

정국은 여태 자기가 살아있다고 알릴 수도 있었지만, 그러다 한진에게 또 붙잡히면- 지금 이것보다 더 좋지 않은 삶을 살게 될까 봐.

숨어서 살기는 살아야 하고, 소속사의 감시 아래에 있는 멀쩡한 제 집에서는 살 수가 없고….

어쩔 수 없이 아무 곳이든 도망쳐야 하는 심정이었던 거지. 이렇게 최악 중에서도 최악뿐인 빛 하나 없던 그의 삶에…

그에게 유일한 희망인 여주가 나타난 것.

여주라는 사람의 존재는 잃을 게 없던 정국에게 생긴 지켜야 할 사람이자,

한진에게 유일한 그의 약점이자,

제 삶의 은인이자,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의 온 마음을 다해 사랑을 준 애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