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미학

#7 - 미증유

봄밤의 바람은 아직 옅은 겨울 내음을 띠고 있었다.

벤치에서 나를 일으켜 세운 원우는

아주 잠시 동안 고민하다

조금 걷는 게 어떻겠냐며 말을 바꿨다.

김여주

어어? 아까는 빨리 들어가라고 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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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우

그냥, 조금 걷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서…

김여주

진짜 어이없어, 전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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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우

……

괜히 입술을 삐죽 내밀며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가니

내 뒤에서 눈치만 보고 있을 원우의 모습이 눈앞에 선해서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김여주

안 오고 뭐해? 걷자며.

설마 나 혼자 걸으라는 소리였어? 요즘 세상 흉흉하다고 나 걱정할 때는 언제고. 흑흑 이 누나는 너무 슬프다.

하며 되도 않는 우는 시늉을 하면

사람 좀 그만 놀리라며 원우가 툴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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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우

너는… 다른 건 다 몰라도 배우는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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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우

배우는 네 길이 아닌 것 같다.

김여주

마음만 먹으면 나 잘한다니까?

김여주

무대 찢을 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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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우

발연기로 찢겠지.

김여주

아오, 진짜 이걸. 콱 쥐어박을 수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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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우

못 쥐어박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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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우

키가 안 돼서.

실로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며

공원 산책로를 몇 바퀴나 돌았을까.

시답잖은 대화가 더 이상 시답지 않게 될 때.

원우는 항상 그런 때를 잽싸게 알아채고

그제야 내게 손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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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우

슬슬 갈까?

김여주

……

내가 그의 손을 내칠 수 없도록.

김여주

그래. 가자.

참 약았다 생각하는 동시에

나는 그런 원우를 애정한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집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턱 끝까지 차오른 다녀왔다는 인사는

꾹꾹 눌러삼켜둔 채,

신발을 벗고 방으로 곧장 직행하려던 순간.

엄마

어디 갔다 이제 오니?

김여주

……

엄마가 직접 중문 앞까지 행차하신 덕에

머릿속으로 그려둔 몇 가지 계획은

싸그리 쓰레기통으로 처박혔다.

엄마

대답 안 해?

엄마

어디서 뭘 하다 이렇게 늦었냐고 묻잖아.

김여주

…과외 선생님한테 다시 문자하신 거 엄마죠.

김여주

제가 오늘 오실 필요 없다고 말씀드렸었는데 오셨더라고요.

엄마

너 그 과외 한 번에 돈이 얼마씩 들어가는 줄이나 알기나 해?

김여주

엄마한테 그 정도 돈은 별로 안 중요하지 않았어요?

김여주

이번에 투자하신 게 잘 안 됐나 봐요.

미처 삼키지 못하고 뱉은 말에 엄마는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벙쪄있는 엄마를 지나쳐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가

방문을 열기 직전에서야

1층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이번 일… 아빠한테는 안 말할게.

엄마

그리고 말 돌리지 말고 바른대로 얘기해.

엄마

어디서 뭘 했는지, 누구랑 있었는지.

김여주

……

김여주

원우랑 있었어요.

엄마

이 시간까지? 솔직하게 얘기해. 화 안 낼 테니까.

김여주

못 믿으실 거면 애초에 왜 물어보셨어요?

김여주

제가 못 미더우시면 원우한테 연락해 보시던가요.

원우 연락처쯤은 있으시잖아요. 호구조사는 저 어렸을 때 이미 다 끝내셨으면서.

뒷말은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엄마도 대충 알아챈 모양이었다.

엄마가 구태여 더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러했으니.

불을 안 킨 1층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다행히 엄마의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빠르게 방문을 닫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달빛 하나에 의존해 휴대폰을 충전기에 꽂고

눈을 감은 채로 찬찬히 숨을 쉬었다.

쿵쾅대던 심장박동이 가라앉을 때쯤에야

슬며시 눈을 뜰 수 있었다.

김여주

…씻어야 하는데.

내일을 준비해야 하는 것쯤은 잘 알고 있지만,

오늘따라 몸이 내 의지를 따라주지 않았다.

결국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기로

스스로 타협한 후에

나는 곧장 잠에 빠졌다.

그리운 사람들이 보고 싶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