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소 코디의 고충
누군가의 사정


김여주
"지금 여기서 이러실 때 아니에요. 곧 음방 무대 촬영 있다고요. 리허설도 그냥 흘려보내셨으면 촬영이라도 제대로…,"


박찬열
"야."

김여주
"···."


박찬열
"우리가 저번에 방송 한 번 나가줬다고 앞으로 계속 그럴 거라는 오만한 착각은 안 해줬으면 좋겠는데."

저번 라디오스타 촬영은 어찌어찌 넘겨서, 내친 김에 음악 방송 스케줄까지 잡아왔는데. 스케줄을 가지 않겠다는 이들을 보며 나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날 비꼬는 찬열씨의 말이 들려왔지만, 나는 그에 제대로 반박할 수 없었다. 이들이 한 번 방송을 나갔다고 해서 앞으로도 계속 나갈 거라는 보장은 없었는데.

내가 너무 안일했다. 정말 그 말대로 오만한 착각을 한 걸지도 몰랐다.

김여주
'···하지만 이미 스케줄이 잡혀 있어.'

그래도 이미 잡힌 스케줄을 펑크낼 수는 없었다. 음악 방송의 경우, 스케줄이 펑크나면 방송사와 소속사 측 모두가 큰 손해를 보게 되기 때문이었다.


김종대
"그리고 저번부터 묻고 싶었던 건데, 코디로 취직하셨으면 코디 일을 하셔야지. 대체 매니저처럼 구는 이유는 뭐예요?"

김여주
"…그쪽들이 매니저고 뭐고 활동 중단 선언 하면서 다 해고시켜 버렸잖아요. 나밖에 할 사람이 없는데."


김종대
"그러니까 그쪽도 나가면 되잖아요. 우리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멋대로 스케줄 잡은 행동은, 그쪽이 잘못한 거 맞아요. 저번에는 팬들 생각해서 어찌어찌 넘어갔다만 두 번은 없어요."

종대씨의 말에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래, 인정하긴 싫지만 이건 명백히 내 실수가 맞다. 어쨌거나 스케줄을 소화하는 건 이들인데 내 멋대로 이들의 스케줄을 잡아버렸으니.

그러나 이들 사정도 사정이겠지만, 나도 사정은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의지로 사정을 만들어냈지만 나는 운명에 의해 결정된 사정이다.

당장 큰 수술을 앞두고 있는 동생. 이게 내가 이 일을 포기할 수 없는 맹목적인 이유이다.

김여주
"스케줄 멋대로 잡은 건 미안해요. 하지만, 나도 물러설 생각 없다는 거 알아줬으면 해요. 나도 그만큼 절실하니까."

엑소
"···."

김여주
"그쪽들이 힘들었을 거 알아요. 그렇지만 그쪽들만 힘든 게 아니에요. 다들 각자 자기 사정이라는 게 있는 거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정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을 하죠. 저도 마찬가지고요."

엑소
"···."

김여주
"근데 그쪽들은 지금, 뭘 하고 있죠?"

내 말에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짓는 멤버들이었다. 이번 건에 대해서는 내가 잘못한 게 맞긴 하지만, 세세하게 잘잘못을 가린다면 이건 분명 나 혼자만의 잘못이 아니었다.

노래를 부르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는 건, 어딘가 잘못된 거니까.

김여주
'코이네이터 자살 건은 나도 유감이게 생각하고 있다고.'

이들과 사이가 좋았던 전 코디네이터가 죽은 건 정말로 유감이다. 하지만 이들은 전 코디를 놔줄 필요가 있었다.

이미 끝나버린 과거에 머물러 당장의 현재와 앞날을 생각하지 않는 건 멍청한 짓이었으니까. 또한, 힘들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아무 것도 안 하고 투쟁을 할 수는 없다.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본인 스스로가 이 상황을 어떻게든 극복해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김민석
"그래, 어디 한 번 들어나 보자. 뭐가 그렇게 절실한데?"

김여주
"···아픈 동생이 있어요."


김민석
"···."

김여주
"당장 수술 안 하면 죽을수도 있대요."


김민석
"···."

김여주
"한 아이를 책임지는 누나로서, 저는 동생의 수술비를 벌어야 해요. 이 각박한 현실에서 내게 내려진 마지막 줄이에요, 그쪽들은."

이들이 내 사정을 완전하게 이해해주는 것까진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공감을 해주고, 공감이 안 돼도 불쌍하게 여겨서라도 내게 주어진 그 마지막 줄을 조금 가까이로 잡아당겨줄 줄 알았다.

또 오만한 착각이었음을 금방 깨달았지만.


장이씽
"그래서 어쩌라는 거죠? 저희도 충분히 힘들어요. 오죽하면 활동 중단 선언을 내렸겠냐고요. 그만큼 저희도 힘들어 죽겠는데, 여주씨를 위해 우리가 여기서 더 힘들 수는 없어요."


박찬열
"뭔 말을 그렇게 착하게 해. 애초에 들을 가치가 없는 말이었는데."

김여주
"···."


박찬열
"결국 돈 때문에 팬들까지 들먹이면서 우리를 세상 밖으로 꺼내려고 애쓴 거잖아. 사람이 죽는 건 당연한 건데 꼴랑 그거 막자고, 참 나…."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서러웠다. 그동안 억지로 참고 막아온 곳에 금이 가, 한 순간에 감정이 휘몰아쳐 터져 나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찬열씨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성을 놓아버린 나는, 그대로 찬열씨의 뺨을 내리쳤다. 있는 힘껏, 내 모든 걸 담아서. 빠르게 꺾인 찬열씨의 목을 보며 멤버들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날리는 찬열씨를 보며 나는 빠르게 말을 뱉었다.

김여주
"어떻게 생각하는 게 그렇게 꼬였어요? 수술만 하면 동생 살 수 있어요. 수술만 하면 살 수 있는 사람을 누나가 돼서 그냥 지켜만 봐요? 수술만 받으면 살 수 있는 사람한테 어차피 죽을 사람이라고 하는 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모르냐고요."


박찬열
"···."

김여주
"그쪽은 어떨지 몰라도 나한테는 하나 남은 가족이에요. 내가 지금도 어떤 심정으로 찬열씨한테 말하는 건지, 찬열씨는 죽어도 이해 못하겠죠."


박찬열
"···."

김여주
"찬열씨는 저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한테 가장 심한 말을 뱉은 거예요."

말을 마친 나는 더 이상 그곳에 있기가 힘들어 방을 빠져나왔다.

밖에 빠져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애써 눈물을 그치려는 헛수고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진정이 되면 알아서 그칠 테니까.

김여주
'···왜 또 서럽게 눈물이 안 그쳐.'

그러나 한 번 터진 눈물은 쉽게 그쳐지지 않았고, 결국 나는 홀로 옥상에 올라가 숨이 멎을 듯 울어댔다. 소리도 질러보고, 마냥 아이처럼 목 놓아 울어도 보고. 그러나 울어도 나의 비극적인 현실은 하나도 바뀌는 게 없었다.

김여주
'최악에 최악이야.'

결국 그 날, 엑소 스케줄은 실행되지 못했다.

엑소가 음악방송 스케줄을 취소하고 내가 실장님께 된통 깨진 뒤, 나는 차마 엑소를 다시 마주할 수가 없었다. 스케줄을 잡아봤자 저들은 안 가고 뻐길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포기해버릴 수는 없었다.

대체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명확한 해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김준면
"…저기, 잠깐 시간 괜찮아요?"

그때, 나를 찾아온 뜻밖의 손님이 나타났다.

회사 복도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아있는 내게 시간이 있냐고 묻는 준면씨를 보고 난 그만 당황스러움을 표정에 다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나 그 표정도 곧 접어버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잘된 일이다. 언젠가 멤버들과 시간을 가지고 대화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김준면
"일단 지난번에 찬열이가 무례하게 군 건 사과할게요. 다른 멤버들도 멤버들이지만, 특히 찬열이가 전 코디랑 각별한 사이여서 좀 더 심해요."

김여주
"대체 어떤 사이였길래···."

저를 그렇게나 극도로 싫어하나요.

뒷말은 삼킨 채 이어지는 준면씨의 말에 집중했다.


김준면
"연인. 찬열이랑 전 코디는 사귀는 사이였어요. 비밀 연애를 해서 알던 사람은 멤버들 외에는 없죠. 그래서 더더욱 갑작스러운 죽음에 다들 혼란스러워할 수밖에 없었어요."

김여주
"···."


김준면
"전 코디가 저희 힘들 때마다 위로해주고, 언제나 저희 위해서 열심히 나서줬어요. 그래서 저희들 모두 전 코디를 정말 아낀 거예요, 활동 중단 선언을 할 만큼."

준면씨의 말에 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들이 전 코디를 각별히 아끼는 건 알겠으나, 찬열씨가 전 코디와 연인 사이였다는 것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의 행동이 어렴풋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내가 사정이 있는만큼 이들도 사정이 있다는 거,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자만했는데.


김준면
"전 어느 정도 여주씨를 받아들이기로 마음 굳혔어요. 그게 제가 여주씨를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해드리는 이유죠. 한 그룹의 리더로서 멤버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할 거예요. 하지만 결과는 여주씨의 손에 달려있다는 거, 알겠죠?"

준면씨의 말에 나는 희미해져가던 희망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준면씨가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내 마음을 이해했기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나는.

어쨌거나 예전에 소중한 사람이 죽는 끔찍한 경험을 했었으니, 내가 지금 어떤 심정인지 이해해주신 거겠지.

김여주
"···감사합니다."


김준면
"···."

김여주
"전 코디에 비하면 전 아무것도 아닌 사람일테지만, 엑소에게 피해 안 가도록 열심히 할게요."

내 말에 준면씨가 옅게나마 미소지었다. 불가능했던 일이 조금씩 실현되고 있었다.

세상에 사정이 없는 사람은 없다. 모두에게는 각자 나름의 사정이 존재하고, 사람들의 시선에 따라 그 사정은 다 다르게 비춰진다. 하지만 그 사정을 이해하고 나면, 그 뒤로는 '함께'라는 단어만이 남아있게 된다.

그 사실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