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관전중
머리 싸매고 고민할수록 MINUS


이제 생각해야 할 건 두 개뿐이었다.

1 번, 이여주를 어떻게 불러내는가. (사실 이게 제일 중요함.) 정중하지 않으면서도 확실히 불러낼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야 한다. 악역의 마지막에 걸맞는 선전포고를.

2 번은 어떻게 확실하게 유티에서 제적당하며 안 다치고 실런으로 가느냐이다.

제적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지만…… 음. 실런으로 가는 건 전정국이 알아서 해 주겠지? 호호.

전정국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아니, 저기요. 살짝 불안한데. 나 막 날아가다가 스카이다이빙하고 그러는 거 아님? 그것도 그거 나름대로 스릴이야 있겠지만 죽으면 고생한 나만 손.


전정국
좀 적당히 해.


한예화
응, 미안……

사실 불러내는 건 잔바리 악역들을 이용해서. 야 이. 여. 주~ 너 한. 예. 화가 옥상으로 따라오라더라? 풉킥풉킥. 사탄들의 학교에 루시퍼의 등장이라. 풉킥. 뭐 이러는 게 제일 낫긴 하다.

아마 조지안에게 적격일 테다. 그렇다면 일단 플러번으로 가야겠군.

마지막 결전을 앞둔 여, 아니 악역의 심정으로 로비에서 일어나 복도 쪽으로 가려는데 마디가 굵은 손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별로 세게 잡은 것도 아닌데 갑작스러운 일이라 손을 빼려고 했다.


한예화
왁!! 아, 너는 좀, 얘기를 하고 손을 잡어!


전정국
얘기를 하려고 잡은 거잖아.

아 진짜 죽일까.


전정국
그러든가.


한예화
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너를 뭐 죽이긴 어떻게 죽여. 그냥 짜증나게 하니까 그런 거지.


전정국
왜, 저번에 보니까 할 수 있던데.

아. 나 능력이 있었구나. …… 방금 기억한 것 같지, 왜? 사실상 악역처럼 구는 데에는 살인 능력 같은 게 필요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여기가 뭐 범죄도시 세계관도 아니고, 사람을 막 썰어 죽이는 악역이 될 수는 없는 거잖아.


한예화
그거 한 번 하니까 쓰러지던데.


전정국
많이 안 해 봐서. 아마, 날 죽일 수도 있을 거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전정국을 바라보았다.


전정국
너도 죽으면.


한예화
지랄하네! 아, 나 잠깐 기대했잖아. 내가 그런 엄청난 능력을? 하면서.



전정국
왜. 로맨틱한데.

내가 말 한 마디에 넷째 돌잔치까지 상상한다는 사람은 봤어도 말 한 마디에 합동 장례식 상상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 사연사도 아니고 존나 피철철 사망으로.


한예화
아 됐어 안 해 장례식. 그래서, 할 얘기가 뭐였는데?

내 시선 끝에 서 있던 전정국은 답지 않게 숨을 골랐다. 넓은 어깨가 위로 올라갔다가, 떨어졌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전정국이 한 동작, 한 동작을 할 때마다 내 불안이 더해진다.

저기요, 저 존나 무서워요. 웬만한 독설도 안 가리고 하는 인간이 대체 얼마나 심한 반전의 이야기를 준비 중이길래……! 오징어게임에 김장훈 나온다 이런 소리를 해도 저렇게까지 머뭇거리지는 않겠다.

영원 같았던 망설임이 끝났다. 그리고 전정국의 차가운 목소리는 말도 안 되게 별것 아닌 이야기를 전했다.


전정국
조지안 만나러, 난 안 가도 되나.


한예화
아니, 이게 뭐라고 뜸을 그렇게까지 들여! 당연히 안 가도 되지! 내가 나가지 니가 나가?


전정국
나도 나갈 거라서.

그래 뭐 너는 입퇴학이 자유로운가 보지. 돈 없고 능력 없는 실런의 찌끄레기는 눈물을 흘려요. 유티는 반강제로 졸업해야 하는 학교인데 어떻게 저리 당당하게 나간다는지 원.

전정국은 조금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전정국
안 무서워.


한예화
그런 오해는 하지도 않았어. 니가 미친 게 아니고서는 조지안을 무서워할 리가 없잖아.


전정국
그냥,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아서.


한예화
정리?

잠깐 이해를 못 했다. 쟤야 손 한 번 까딱하면 짐은 무슨 집까지 옮길 수 있지 않나?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유티에는 박지훈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고 들었으니 그 애한테 알려 주고 나가는 게 상도덕일 것이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랬다. 근데 뭐, 여기나 거기나 비슷할 듯.

진짜 별것 아니었네. 우정이라 이거지? 나는 활짝 웃었다.


한예화
아, 당연하지. 얼른 가 봐. 나중에 봐!

전정국의 분홍색 뒷통수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 음, 근데 걸어가서 인사하는 게 더 낫지 않나? 걔 성격에 순간이동으로 작별인사하면 쌍방으로 어색할 것 같은데.

슉. 야, 나 나감. 방학 때 니네 집 앞에서 봐. 엥? 한예화가 나가는 거 아니었어? ㅇㅇ. 근데 나도 나갈 거임. 슉. 아니, 저 새끼가?

…… 그래. 뭐, 걔네끼리만 통하는 그런 게 있겠지.

나는 사기캐와 불닭볶음면의 영원한 우정을 빌어 주며 조지안을 찾아 떠났다. 어쩐지 친구라는 단어를 생각하니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한예화
조쟤얜. 조쟤얜.

벽의 이름표를 읽으며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조지안은 어쩐지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분명 이쯤이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지은이한테 한 번 물어봐야 되나.

평소에 너무 익숙한 방들에만 들어가버릇하니 새로운 친구의 기숙사를 찾아가기가 어려웠다.

아, 구0 맵스. 그립습니다. 저를 GPS 추적해서 얼른 경로 안내를 시작해주세요.

벽만 보고 걷고 있던 내 앞에 쿵, 하고 사람이 나타났다.

…… 뭐. 정확한 표현으로 말하자면 그 사람은 원래 서 있었고 내가 가서 부딪힌 게 맞겠지만. 난 남탓을 잘 하는 편이니 저 사람 탓이다. 아무튼 그런 거임.

나는 어쩐지 불안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익숙한 검은 눈동자와 뾰족한 눈끝. 햇빛 한 번 안 맞은 듯 하얀 피부. 아, 설마.


한예화
아……

말을 잃은 내게 그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던진다.


민윤기
왜?


한예화
뭐라고?


민윤기
왜 여기 있냐고.

아니 그걸 니가 나한테 물어볼 입장이 되니? 야, 너도 레임이고 나도 레임이잖아. 이여주는 리플럽이고. 그럼 넌 대체 플러번에 왜 왔을까?

어이가 없어서 숨을 들이키자 민윤기가 고개를 도리질치며 헛웃음지었다. 느릿한 움직임에서 짙은 감정이 묻어나왔다. 저건 무슨 뜻이지?

…… 자세히 보니, 어쩐지 자기 자신이 황당하다고 생각하는 듯한 웃음이다.


민윤기
아니, 됐다. 나한테 필요한 건 없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머리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이다. 친절? 악녀에게 남주가? 아니 뭐, 민윤기 자체가 나쁜 새끼라는 말은 아니지만 이러면 나한테 불리한데.

나는 목소리를 고르고 턱없는 요구를 했다.


한예화
이여주한테 내가 협박하고 있다고 전해. 내일 2 교시에, 3 층 왼쪽 계단에서 만나기를 바란다고. 꼭 혼자 오라고.


민윤기
뭐?

이렇게 남주가 나타나 주면 내 입장에서는 너무 고맙지. 조지안을 굳이 찾아갈 수고를 덜었잖아?

…… 뭐, 아직도 진짜 얘가 왜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내 퇴학이랑은 하등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

나는 민윤기의 얼빠진 표정에 대고 악역처럼 웃어줄까 하다가 참았다. 대신, 그가 괜한 걱정으로 이여주를 막지 않게 만들어야 했다.


한예화
걱정 마, 이여주는 절대 안 다칠 거야. 다치는 건 나야.


민윤기
…… 여주가 널 해칠 거라고 생각해?


한예화
아니 시벌. 그럴 리가 있겠니? 걔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민윤기
그럼 네가 왜 다치냐?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민윤기를 지나쳐 갔다. 내가 또, 읽씹은 잘 하는 편이라. 전달할 거 다 했으니 이제 마지막 정비를 하러 가야 하기도 하고.

…… 내가 왜 다치느냐고 물은 민윤기의 표정이 너무 절박해 보여서.

내가 그 말에는 차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한예화
야…… 나 진짜 못 간다니까. 지인짜 못 간다니까.


박지민
내일 나간다는 거 다 알아. 마지막으로 부탁할게.


박지민
내일 1 교시 쉬는 시간에 옥상으로 와 줘.

방에 들어오자마자 계획이 산산이 무너뜨려질 것 같은 선전포고가 들렸다. 나는 연신 머리를 쓸어넘기며 화를 표출하고 있는데, 지민이는 경직된 표정이다.

내가 지금 빡쳤다니까? 눈치를 좀 보고 니가 실수했다는 걸 느끼라니까??


박지민
올 거지?

음, 답이 없었다. 난 볼이 떨어져나갈 만큼 세게 고개를 저었다.


한예화
아니! 진짜 안 돼. 지금 말할 수 없는 얘기야? 어?


박지민
응. 내일 얘기해야 해. 내일에서야 완성이 돼.


한예화
너 진짜 어린애같은 거 알고 있지 지금.


박지민
응.

잠깐 지민이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그 멍한 무표정은 변할 기미가 안 보였다. 이런 상태의 박지민은 나도, 한예화도 도저히 이길 수 없다.

이제는 내가 한예화니까 필요 없는 구분이지.


한예화
알았어, 갈게. 그 대신 얘기 진짜 짧게 해야 돼.

지민은 언제 굳어 있었냐는 듯 활짝 웃는다. 나도 살짝 웃음을 지었다. 소설처럼 해피 엔딩은 날 수 없겠지만 우리에게 남은 최선의 선택을 앞두고 있다.

이제 마지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