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주들이 왜 그럴까
13 : 믿을 수 있는 내 편


김달래
박지민, 박지민, 박지민···.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석자였다. 종례를 어떻게 마쳤는지도 모르고 줄곧 이 상태다. 혹시라도 내가 놓친 부분이 있을 것 같아 한시도 한눈을 팔 수 없었다. 어쩌면 그러길 바라는 걸지도.

이제야 두 남주들에게 물들어 지나 싶었는데 뜬금없이 등장한 색이라니. 나중에 나올 주요 인물일지도 모르지만.. 한숨을 깊게 눌러쓰며 읊조렸다. 이쯤 되니까 슬슬 지쳐갈 기미가 보인다.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점점 늘어간다.

김달래
···아, 모르겠다.

툭.

“아야!”

날카로운 비명이었다. 그 비명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채 고개를 아래로 젖혔다. 바닥에 엎어져 있는 어린 여자애가 제 엉덩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헐. 어찌저찌 할 바도 모르고 일단 무릎을 굽히었다. 절로 말이 더듬어졌다.

김달래
괘, 괜찮아요? 어디 다친 곳 없어요?

“쓰읍.. 잠, 시만여···.”

말까지 끊어가며 그리 말했다. 단순히 숨을 고르고 있다고 보기엔 너무나 다급해 보였다. 헐떡이던 등 언저리가 점차 자취를 감춰갔다.

“후.. 놀라게 해서 미아내요. 괜차나여.”

김달래
···다행이다. 근데 부모님은 어디 있어요?

“부모님이여?”

김달래
네. 여기 근처 어린이집 다니는 것 같은데.

“..곧 올 걸여. 나 자브러.”

김달래
잡는··· 다고요?

“녜에.. 엄마랑 아빠는 바빠서 못 오구 오빠가 데릴러 오긴 한데.”

김달래
그럼 얼른 오빠한테 가야죠.

“오빠 시러요.”

아. 내뱉지 못한 탄식이 가슴에서 울려댔다. 저 옹알거리는 목소리로 누군가가 싫다는 말을 할 줄이야. 그것도 가족을. 순수한 눈망울을 마주칠 때마다 속내를 알아챌 것만 같았다. 어떡하지.

“언니, 언니가 버기에 저 못 뛰는 거 가타요?”

김달래
···누가 못 뛴다고 했어요?

“아녀. 오빠가 달리능 거 시러해요. 하지 말래여.”

“근데.. 이유도 안 아려줘요.”

불현듯 그 얼굴에 슬픔이 스쳐갔다. 이렇게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뚜렷한 아이에게 왜 우회적인 말일까 하던 생각은, 곧 이해로 번졌다. 치맛 자락을 움켜쥐고 있는 양손을 잡았다. 그리고 더욱 눈을 마주쳤다.

김달래
아껴서 그래요.

“절여?”

김달래
네. 어쩔 땐 내 말이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있어서 망설여지거든요.

“오빠가.. 정말 저릉 아끼는 거까요.”

김달래
당연하죠. 그래서 이렇게 데리러 오는 거 아니겠어요.

“···구럼 저는 멀 해야 해여?”

알 수 있었다. 티는 안 내고 있지만 호기심으로 눈이 반짝인다는 것을. 잠시 답을 물러섰다. 내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 상황이 우습게 느껴졌다. 이후 어떻게 보면 나에게 필요한 말을 입 밖으로 보냈다.

김달래
기다려주는 거 어때요. 말해줄 때까지.

김달래
···그래, 그리 길지 않을 테니까.

미래에 눈이 멀어 현재를 놓치고 있던 건 난가.

13 : 믿을 수 있는 내 편

ᅠᅠᅠᅠ

해는 뉘이어 어느새 어둠이 깔려 있었다. 하루 종일 책상에 엎어져 이름표를 만지작였다. 몇 시간 전 그 아이가 떨어트리고 간 이름표를 말이다. 김태은. 오래돼 해져 있는 글씨를 해석하다시피 알아냈다.

김달래
여주고 남주고.. 당장 이 생활을 어떻게 이어나갈지도 모르면서 스토리 걱정은.

자책했다. 1년 뒤에나 시작될 이야기에 많은 걱정을 쏟아붓고 있었다. 이제 뭘 해야 할까.

덜컥이는 소리와 함께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던 불빛이 점점 굵어졌다. 곧 방 전체를 감쌌다. 석진의 얼굴을 힐긋 쳐다보고 말았다. 이에 소리 없는 숨을 몰아쉬는 그다. 평소 같지 않은 제 동생에게 천천히 다가온다.


김석진
과자 맛없었어? 하나도 안 먹었네.

김달래
···아. 미안.


김석진
됐어, 너도 인간인데 입맛 없을 때가 있겠지.

여러 디저트가 쌓여 있는 그릇을 치운다. 기껏 신경 써서 만든 것이기에 속이 상할 법도 한데. 어쩜 저리 생각할 수 있는가. 석진은 우울이 묻어 나오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김석진
그건 뭐야?

김달래
이 공책?


김석진
응. 요즘 많이 보여서.

김달래
그냥.. 정리서야, 정리서.

김달래
당사자는 불쾌할지도 모르지만, 나랑 가까운 사람들을 적어가고 있거든. 그 해당 인물과의 관계나 관심사가 바뀔 때도 있고.


김석진
그럼 오늘은 바뀐 사람이 있어?

김달래
···많지.

박지민이라는 한 장이 추가됐고, 김태형은 딸기와 관련된 음식을 좋아한다거나, 미처 적지 못한 여주의 존재도 적었다. 하루가 멀다 하게 빼곡해지는 종이를 볼 때마다 심란하기만 했다.


김석진
달래야.

김달래
왜?


김석진
네가 새 학기에 접어들고 힘들어한다는 거 잘 알아. 근데 혼자서 감당하지 마.

김달래
···.


김석진
너 아직 어리광 부려도 될 나이야. 부모님이 우릴 같은 집에 살게 하신 의도도 이 뜻이 아닐까 싶어.


김석진
적어도 난 네 편이니까.

이후로 기억이 없다. 확실한 건 그 말을 듣자마자 난 그동안 묵혀두었던 울분을 다 토해냈다는 거다. 끝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준 석진의 모습까지도, 눈에 선하다. 이젠 알아. 따가울 정도로 부운 눈가가 돼서야 깨달았다.

내가 가야 할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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