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결혼식
2단계


퇴근길이라 그런지 차가 많이 밀린다. 느리게 가는 차 안에서 여주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꼭 해야 할 이야기니까.


민윤기
다 왔는데 안 내리십니까.


민윤기
회장님.


민윤기
야... 정여주.

정여주
어떤 비서가 그렇게 예의없이 회장 이름을 막 부릅니까?


민윤기
난 또, 푹 주무시는 줄 알았지.

정여주
수고했어. 내일부터는 안 나와도 되니까 푹 쉬어라.


민윤기
아, 그것 참 말이 묘하네. 자르겠다는 소리처럼 들리는 건 기분 탓인가?

정여주
예예, 당연하죠. 너 아니면 누가 내 뒤치다꺼리를 해주겠어. 가봐.

여주가 차문을 열며 하는 말에 윤기가 장난스레 뒤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아직 잠이 다 깨지 않아 몽롱했던 여주는 다소 성의 없이 대답하며 차에서 내렸다.

정여주
당분간은 볼 일 없겠네, 심심해서 어쩌나.

여주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답지 않게 태형이 선물한 인원용 엘리베이터 키를 본인 자리에 두고 왔기 때문이다.

정여주
내가 확실히 정신이 없긴 없구나…. 오늘따라 더 느린 것 같네 이 엘리베이터는.

40층에서부터 내려오기 시작하는 숫자를 보며 여주가 투덜거렸다. 괜히 신발 앞코로 바닥을 툭툭 차보기도 했다.

정여주
40층이면 회장실인데. 태형이가 내려오나.

혹시나 태형이라면 놀라게 해줄 생각으로 벽 가까이 붙어 서있던 여주는 문이 열리자마자 내리는 사람과 부딪혔다.

정여주
아...! 죄송합니다!


전정국
괜찮으세요? 제가 너무 빨리 내렸죠.

정여주
아뇨, 아뇨. 제가 친구인 줄 알고 장난치려다가 그만... 괜찮으세요?


전정국
네, 물론. 지금은 괜찮아 보이시는데, 나중에라도 안 좋은 것 같으면 연락 주세요.

정여주
아, 안 그러셔도 되는데...


전정국
일단 받아요. 사람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정여주
아... 저기.

그는 여주의 손에 제 명함을 쥐어주고는 그대로 회전문을 통해 나가버렸다. 여주는 차마 버리지는 못한 명함을 손으로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정여주
어, 지민 씨도 아직 퇴근 안 하셨어요?


박지민
예... 아시다시피 사안이 사안인지라 제가 자리를 비울 수가 없네요.

정여주
지민 씨 계신 줄 알았으면 먹을 거라도 사 왔을 텐데. 저녁은 드셨어요?


박지민
요즘 마침 식단관리 중이라 괜찮습니다. 기다릴 텐데 어서 들어가 보시죠.

정여주
네, 그럼 수고하세요.

여주는 여전히 내리자마자 눈이 마주친 지민을 보고 놀란 듯 말을 꺼냈다. 일처리가 빠른 지민 씨가 남아있을 정도면 꽤나 심각한 일인 건데.

쉽지 않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여주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중요한 얘기를 하려는데 도무지 상황이 따라주질 않는다.

올라오는 짜증을 억누르며 다시 미소를 장착한 여주는 회장실 문을 열었다.

정여주
나 왔어!

여주는 문을 엶과 동시에 발랄한 목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태형은 피식 웃으며 미간을 문지르던 손을 내리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태형
왜 이렇게 늦었어.

정여주
으으, 말도 마. 차가 얼마나 밀리는지, 나 차에서 깜빡 졸았다니까?


김태형
이리와.

여주가 늦은 것을 책망하려고 꺼낸 이야기는 아닌 듯 태형은 고갤 끄덕이며 제 팔을 벌렸다.

정여주
일은 어때? 또 머리 아파? 내가 좀 도와줄까?


김태형
급한 건은 이미 다 끝냈어. 질질 끌어서 좋을 건 없으니까 좀 더 하려는 거지.

정여주
그랬어? 피곤하겠네 우리 태태. 배는 안 고파?


김태형
그러게, 이상하게 안 고프네. 배고픔을 느낄 겨를도 없나 보다 지금은.

정여주
진짜 안 먹었어?


김태형
넌. 먹었어?

정여주
아니, 난 미팅 끝나고 윤기랑….


김태형
……

정여주
... 먹었는데도 배가 조금 고픈 것 같네.


김태형
왜 갑자기 눈치를 봐. 나 그런 거 신경 안 쓰는 거 알잖아.

정여주
그래도... 안 그래도 예민할 텐데 조금이라도 신경 거슬릴만한 말은 안 하고 싶어서 그렇지.


김태형
그런 생각해주는 걸로도 충분해. 거르지 말고 그냥 다 얘기해줘. 숨기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정여주
그럼 오늘 내 미팅 어땠는지 얘기해줄까?


김태형
화제 돌려.

정여주
아이, 왜. 30초 전엔 거르지 말라며.


김태형
일 얘기는 제외야.

정여주
나 출장 어땠는지 얘기하고 싶었는데...


김태형
그건 들어줄게. 해봐.

정여주
완전 지멋대로….


김태형
나 다시 일할까?

정여주
아니 아니, 이리 와서 앉아봐.

서로 껴안은 채 대화를 이어가던 둘은 여주가 먼저 태형의 품에서 빠져나오면서 떨어졌다. 소파에 앉은 여주는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태형을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김태형
무슨 얘기길래 이렇게 들떴어. 너 이럴 때마다 불안하더라 난.

정여주
불안할게 뭐 있어. 내가 뭐 하는 것도 아닌데.


김태형
아닌데. 너 이럴 때마다 꼭 사고 치던데.

정여주
아, 그래서 들을 거야 말 거야.

여주가 눈을 흘겨뜨며 쳐다보자 그대로 입을 다문 태형이었다. 여주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채 태형의 손을 깍지 껴잡고 얘기를 시작했다.

정여주
내가 이번에 출장 가서 확실히 느낀 건데 말이야.


김태형
응. 그게 뭔데?

정여주
놀라지 말고 잘 들어.


김태형
헤어지자 이런 거면 혼난다.

정여주
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태형아. 우리 결혼하자.

여주의 말을 끝으로 회장실은 정적으로 가득 찼다. 조용히 대답을 기다리는 여주와 침묵하는 태형의 숨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

여주는 생각보다도 더 냉랭한 반응에 속이 쓰렸다. 평소 이런 주제에 대해서 전혀 말을 꺼내지 않는 태형이었기 때문에 결혼에 큰 뜻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기뻐할 거라 생각했다.

두 사람이 사귀기 전부터, 표현을 하지 않는 태형은 항상 먼저 다가와주는 여주가 고마웠다. 다른 사람들처럼 표현해달라고 매달리지 않고, 애정을 갈구하지 않는 점 또한 그랬다.

여주는 매번 본인의 진심을 다 꺼내어 보여주며 태형을 기다려주었다. 그래서인지 고백을 먼저 한 것도 여주, 사랑을 말하는 것도 여주, 둘 사이에 오고 가는 모든 것들은 대부분 여주가 시작을 끊고는 했다.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태형의 반응이 전혀 없다는 것 정도랄까.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제가 먼저 말을 꺼내기만 하면 태형이 기꺼이 받아줄 것이라 생각했던 여주는 초조함에 저도 몰래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굳은 표정을 한채 생각에 잠긴 듯한 태형과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여주의 숨소리만이 가득한 방안에 일순간 한숨소리가 퍼졌다. 여주와 깍지 낀 손을 푼 태형은 제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긴 후 마침내 입을 열었다.


김태형
나는 너도 딱히 결혼 생각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정여주
전에는 그랬는데, 생각이 바뀌었어.


김태형
그러니까. 갑자기 왜, 하….

정여주
나 너랑 아이가 갖고 싶어. 너랑 가정을 꾸리고 싶어, 태형아.


김태형
그만해. 아니다, 지금이라도 얘기를 해서 다행이네. 이번 기회에 정확히 말해두겠는데,

정여주
그럼 헤어지자 우리.


김태형
... 뭐?

정여주
헤어지자고. 결혼할 거 아니면 헤어지자 우리.


김태형
제정신이야 지금? 나랑 헤어지겠다고?

정여주
응, 난 결혼이 하고 싶은데 결혼 생각이 없는 너한테 언제까지고 묶여있을 순 없잖아.


김태형
왜 이래 너 진짜. 결혼 때문에 나랑 헤어지겠다고?

정여주
난 너도 나랑 어느 정도는 같은 생각일 줄 알았어. 끝까지 결혼하겠다는 얘기는 안 하네 김태형.


김태형
정여주.

정여주
그럼 나 이만 가볼게. 정리는 천천히 하자. 넌 한창 정신없을 때고 나도 한가하진 않으니까. 너희 집에 있는 물건은 택배로 보내주던가, 귀찮으면 그냥 버리던가 해줘.

차가운 말투로 티 내지 않으려고 하지만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을 한 여주는 누가 봐도 상처 받은 사람처럼 보였다. 여기에 더 있다간 정말 엉엉 울게 될 것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여주를 태형이 불러 세웠다.


김태형
일단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가. 자고 일어나서 다시 얘기해. 이렇게 감정에 휩쓸린 상태에서 할 얘기 아니잖아. 더 이상 후회할 일 만들지 마.

정여주
후회? 그래, 넌 항상 그런 식이지. 끝까지 이성적이라 참 좋겠다 너. 그래도 네가 너무 좋으니까, 너도 날 사랑한다는 걸 아니까 버텼는데. 지금 보니까 잘 모르겠다.

정여주
넌 내가 헤어지자고 말하는 이 상황에서도 날 잡아야겠다는 생각보다 내가 너랑 헤어지고 후회할 거라는 생각이 먼저 들지? 나 이번에는 절대 먼저 안 돌아와. 너야말로 후회하지 마.


김태형
여기서 나가는 순간 다 끝이야. 너랑 나랑 다 끝이라고.

정여주
바라던 바야.

여주는 끝까지 말로만 저를 붙잡는 태형에 애달프게 눈물을 흘리며 선전포고하듯 먼저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을 던졌다. 문 앞에 서자 모든 게 끝이라며 협박하는 태형의 말에도 여주는 아랑곳 않고 문을 열고 나갔다.

태형은 처음으로 저에게 독한 말을 내뱉는 여주를 보며 초조함을 느꼈다. 이러다가 정말로 저와 여주의 사이가 끝날 것만 같아서 끝까지 붙잡아 보려고 했지만, 여주는 거기에 더 화가 난 것 같아보였다.

내가 어떻게 해야 했을까. 소파에 앉아 천장을 올려다보던 태형은 눈을 감으며 무거운 숨을 내뱉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여주의 마음 하나 못 알아채는 자신이 답답했다.

등장인물 소개
민윤기. 28, YJ 비서실장. 여주보다 1살 많은 나이지만 고등학교 때 1년 꿇어서 여주랑 같은 학년으로 다녔기 때문에 반말이 더 익숙하다.

등장인물 소개
전정국. 26, TH 경호실장. 외부인 출입통제를 위해 새로 고용된 경호실장. 뛰어난 실력으로 이 업계에서 소문이 자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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