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는 전정국의 전여친인 설정! 상상은 자유니까..^^)
여주는 청첩장을 받은 날부터 조금 불안했다.
지인의 결혼식.
갈까 말까 몇 번이나 고민했지만, 결국 안 갈 수는 없었다. 오랜 친구의 결혼식이기도 했고, 이미 참석하겠다고 답도 해둔 상태였다. 단지 문제는 장소가 아니라, 그 자리에 있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전정국.
이름만 떠올라도 여주의 마음 한쪽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헤어진 지 꽤 됐다. 이제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길을 걷다가 비슷한 뒷모습을 봐도, 누군가 그의 이름을 입에 올려도, 예전처럼 하루를 다 망칠 정도는 아니었다. 정말 괜찮아졌다고 믿었다. 적어도 오늘 아침까지는.
하지만 식장 앞에 도착한 순간부터, 여주는 괜히 숨이 답답했다. 익숙한 얼굴들이 보일 때마다 시선이 먼저 사람들 사이를 훑었다. 혹시 왔을까. 아니면 안 왔을까. 보고 싶지 않은데, 먼저 확인하고 싶은 그 모순된 마음이 스스로도 싫었다.
축의금을 내고, 신부를 만난 뒤 식장 안으로 들어선 여주는 한쪽 구석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주변은 축하하러 온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지만, 이상하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손에 쥔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던 여주는 괜히 물 한 잔을 들이켰다.
그러다 문득,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별것 아닌 반응일 수도 있었다. 늦게 도착한 하객 몇 명이 들어왔을 뿐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여주는 이유 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대로 굳었다.
전정국이었다.
검은 수트 차림의 정국은 예전보다 더 차분해 보였다. 웃고 있는 얼굴도 아니었고, 특별히 무표정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인사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낯설었다.
여주는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심장이 놀랄 만큼 크게 뛰었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아무 준비도 없이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정국은 아직 여주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 사실에 안도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그냥 끝까지 못 본 척 지나가 줬으면 싶다가도, 정말 그렇게 지나치면 그것대로 서운할 것 같았다. 여주는 제 속도 이해할 수 없었다.
결혼식이 시작되고,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앞으로 향했다. 축가는 아름다웠고, 분위기는 따뜻했다. 여주는 박수를 치면서도 몇 번이나 의식적으로 숨을 골라야 했다. 같은 공간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정이 이렇게 흔들릴 줄 몰랐다.
예식이 끝난 뒤 하객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주도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 사이를 따라 나가려 했다. 적당히 축하만 전하고 조용히 빠질 생각이었다. 오늘은 그게 최선이었다.
그런데 복도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순간, 맞은편에서 누군가 멈춰 섰다.
여주는 본능처럼 고개를 들었다.
정국이 바로 앞에 있었다.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피할 틈도, 모르는 척할 틈도 없었다. 잠깐 스쳐 지나갈 거라고 생각했던 재회가, 그렇게 정면으로 와 닿았다.
정국도 잠시 굳은 듯했다. 놀란 기색이 아주 짧게 스쳤다가, 곧 익숙한 무덤덤함 뒤로 감춰졌다. 하지만 여주는 알 수 있었다. 저 사람도 지금 자신만큼 당황했다는 걸.
몇 초가 길게 늘어졌다.
먼저 입을 연 건 정국이었다.
“오랜만이네.”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마음을 긁었다.
너무 담담해서, 마치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들려서.
여주는 손끝에 힘을 주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랜만이다.”
제 목소리가 생각보다 멀쩡하게 나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떨릴 줄 알았는데, 오히려 지나치게 차분했다. 정국은 그런 여주를 잠깐 바라봤다. 여전히 눈빛은 읽기 어려웠다.
“잘 지냈어?”
흔한 인사였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이렇게 어렵게 들릴 줄은 몰랐다.
여주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잘 지냈냐는 말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잠깐 막혀 버렸다. 정말 잘 지냈는지, 아니면 그냥 버틴 건지, 그걸 굳이 이 사람 앞에서 구분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뭐.”
결국 그렇게 얼버무리자 정국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겠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게 편하면서도, 또 이상하게 서운했다.
여주는 그 감정을 들키기 싫어 먼저 시선을 피했다.
“너도 왔구나.”
“어.”
“응.”
짧고 무난한 대화.
누가 들어도 아무 문제 없는 재회였다.
하지만 여주에게는 그 짧은 문장 하나하나가 오래 눌러 둔 기억을 건드렸다. 예전엔 누구보다 편했던 사람이 이제는 이렇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복도 끝에서 누군가 정국을 불렀다.
정국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여주를 바라봤다.
“가봐야겠다.”
여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잘 가.”
정국은 잠시 더 서 있는 듯하더니, 결국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고 돌아섰다. 여주도 그 뒷모습을 오래 보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데도 한 번 익숙해졌던 걸음걸이와 어깨선은 너무 쉽게 눈에 들어왔다.
정국이 사람들 사이로 멀어지고 나서야, 여주는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정말 괜찮아진 줄 알았다.
이제는 다시 마주쳐도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고작 몇 마디였을 뿐인데, 여주의 마음은 결혼식장에 들어오기 전보다 더 엉망이 되어 있었다.
여주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천천히 손에 쥔 휴대폰 화면을 켰다. 아무 의미 없이 검은 화면만 바라보다가 다시 꺼 버렸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방금 전, 정국이 돌아서기 직전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 삼킨 것 같았다는 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