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하이픈 정원] 좋아하면 멍청해진다

1화. 정원 선배, 아니 정원 대리님

3월의 첫 월요일,

나는 출근 시간보다 사십 분이나 일찍 회사 앞에 도착했다.

 

HY 본사 로비는 생각보다 훨씬 높았다.

통유리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 아래, 사원증을 목에 건 사람들이 바쁘게 게이트를 통과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 사원증이 없었다.

대신 인사팀에서 받은 임시 출입증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김여주?"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박종성! 너 진짜 붙었구나?"

"야, 붙었다고 몇 번을 말했냐. 나 영업팀이야."

 

종성은 대학 1학년 때부터 붙어 다닌 동기였다.

같은 날 최종 합격 문자를 받고 서로 전화기를 붙잡은 채 소리를 질렀던 게 엊그제 같았다.

 

"넥타이 삐뚤어졌어."

"진짜? 아침에 세 번이나 다시 맸는데."

 

내가 넥타이를 바로잡아 주자 종성이 어깨를 으쓱했다.

 

"점심 자주 먹자. 신입끼리 뭉쳐야지."

"콜."

 

 

 

-

 

 

 

종성과 헤어져 12층에 내렸다.

브랜드마케팅팀.

나를 데려다준 인사팀 직원이 사라지자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김여주 씨? 반가워요. 최정민 팀장입니다."

 

팀장님은 짧은 단발에 안경을 쓴, 첫눈에도 일 잘하게 생긴 분이었다.

 

"우리 팀은 사수 제도로 운영해요. 처음 몇 달은 사수한테 붙어서 배우면 돼요. 양 대리!"

 

파티션 너머에서 누군가 일어섰다.

그리고 나는 그 얼굴을 단번에 알아봤다.

 

큰 키, 단정하게 넘긴 앞머리, 무표정하면 조금 차가워 보이는 눈매.

대학 때보다 어깨가 넓어지고 분위기가 단단해졌지만 틀림없었다.

 

"정원 선배!"

 

생각보다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손까지 흔들고 있었다.

사무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꽂혔지만 상관없었다.

낯선 회사의 첫날, 아는 얼굴을 만났다는 게 그냥 너무 반가웠으니까.

 

선배는 잠깐 멈췄다. 정말 아주 잠깐.

 

"……오랜만이네요, 김여주 씨."

 

어?

 

"아는 사이예요?"

"대학 후배입니다."

 

선배가 담담하게 대답하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엉겁결에 그 손을 잡았다. 악수는 짧고, 정확하고, 사무적이었다.

김여주 씨. 그리고 존댓말.

 

대학 때 선배가 나를 뭐라고 불렀더라.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사실 우리가 그렇게 친했던 것도 아니었다.

같은 과 두 학번 위 선배. 과 행사 때면 늘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사람.

그래도 마주치면 꼭 먼저 인사해 주던, 친절한 선배.

 

딱 그 정도였다.

그러니까 이게 맞는 거다.

여긴 회사고, 저 사람은 내 사수니까.

 

그런데도 괜히 머쓱했다.

흔들던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서, 나는 슬그머니 등 뒤로 감췄다.

 

"여기 앉으면 돼요."

 

선배가 안내한 자리는 선배의 바로 옆자리였다.

모니터와 키보드, 새 다이어리와 볼펜 세 자루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오늘은 시스템 세팅이랑 팀 업무 흐름만 볼게요. 처음부터 다 외우려고 하지 마요."

 

선배의 설명은 깔끔했다.

사내 메신저, 결재 시스템, 공유 폴더 구조, 주간 회의 일정. 필요한 말만, 정확한 순서로.

내가 받아 적느라 손이 바빠지면 말을 멈추고 기다렸고, 고개를 들면 다시 이어 갔다.

 

"질문 있어요?"

"아뇨, 지금은 괜찮아요."

"그럼 생기면 물어봐요."

 

그게 다였다.

대학 얘기도,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는 인사도 없었다.

 

 

 

-

 

 

 

점심시간에는 같은 팀 안유진 과장님이 나와 입사 동기 현서를 구내식당에 데려가 주셨다.

 

"여주 씨 사수가 양 대리라니, 운 좋은 거예요. 우리 팀 에이스거든."

"그렇게 일을 잘하세요?"

"실수를 안 해. 4년 동안 그 사람이 뭘 놓치는 걸 본 적이 없어."

 

과장님이 자리를 비우자 현서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근데 대학 선배라며? 되게 반가워하더라. 너만."

"……티 났어?"

"엄청."

 

나는 숟가락으로 괜히 국을 휘저었다.

그러게.

반가운 건 나뿐이었나.

 

 

 

-

 

 

 

오후 세 시쯤, 유진 과장님이 팀 단톡방에서 커피 주문을 받았다.

나는 메뉴판 사진을 한참 들여다봤다.

캐러멜 마키아토.

대학 4년 내내 시험 기간이든 아니든 내 손에 들려 있던 메뉴.

달고 진한 그 맛이 떠올라 입안에 침이 고였다.

 

그런데 단톡방에 올라오는 주문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아아요.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저도 아아.

 

신입이 첫날부터 휘핑 얹은 달달한 커피를 시키면 어떻게 보일까. 괜히 철없어 보이지 않을까.

나는 손가락을 멈췄다가, 결국 이렇게 쳤다.

 

저도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곧 커피가 도착했다.

한 모금 마시자 쓴맛이 혀끝에 확 퍼졌다.

표정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들었는데, 옆자리 선배가 나를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착각이었는지 선배는 이미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

 

 

 

여섯 시가 조금 넘자 사무실이 하나둘 비기 시작했다.

 

"김여주 씨, 오늘은 들어가요. 첫날부터 늦게까지 있을 필요 없어요."

"대리님은요?"

"저는 이것만 마무리하고요."

 

나는 가방을 챙기며 망설였다.

같이 나가자고 할까.

대학 얘기라도 조금 하고 싶은데.

 

하지만 선배는 이미 모니터에 집중하고 있었고, 그 옆모습은 말을 걸 틈을 주지 않았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네. 내일 봐요."

 

엘리베이터 앞에서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선배였다.

손에 서류 봉투를 하나 들고 있었다.

 

"이거 두고 가서."

"네? 저 아무것도 안 두고 왔는데……"

 

선배는 대답 대신 봉투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직전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모르는 건 바로 물어봐요. 괜히 혼자 붙잡고 있지 말고."

"……네."

 

문이 닫혔다.

 

지하철에서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A4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결재 올리는 순서, 공유 폴더에서 자주 쓰는 경로, 팀장님이 보고서에서 특히 신경 쓰는 부분까지.

오늘 하루 들었던 내용이 한눈에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었다.

 

인수인계서에서는 본 적 없는 문서였다.

오전에 받은 팀 인수인계서는 몇 년째 덧붙이기만 한 듯한 두꺼운 파일이었는데, 이건 달랐다.

신입이 당장 헷갈릴 것만 골라 따로 정리한 문서.

 

이걸 언제 만들었지.

하루 종일 옆에서 자기 일만 하는 줄 알았는데.

 

종이를 접으려다 맨 아래 귀퉁이에 작게 적힌 한 줄을 발견했다.

 

첫날 고생했어요.

 

나는 그 짧은 문장을 한참 내려다봤다.

 

김여주 씨, 하고 선을 긋던 목소리.

사무적인 악수. 그런데 이 메모.

거리를 두는 건지, 다정한 건지.

 

나는 메모를 봉투에 다시 넣어 가방 제일 안쪽 칸에 넣었다.

구겨지지 않게.

 

반가운 건 나뿐인 줄 알았는데.

 

정말 모르겠다, 정원 선배.

아니 정원 대리님

 

 

 

 


 

 

 

바로 새 작품 들고 왔습니다!!!

보넥도 멤버들 신청이 많았는데 태산 작품을 완결해서 다른 그룹 아이돌로 들고 와 봤습니다 ㅎㅎ

정원군도 정말 잘생겼더라구요 ㅎㅎ

이번에는 회사물로 가 보겠습니다!! 로멘스에 좀 더 집중해서 만들어 볼 예정이예요 ㅎㅎ

이번 작품도 재밌게 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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