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ent survivre en tant que figurant

# 4

- 작가가 조금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썼습니다.

- 대체 무슨 글인지 작가도 모릅니다.

- 왜 썼는지 작가도 모릅니다.

- 클리셰 덩어리입니다.

- 가볍게 읽어주세요... 어차피 개연성 개나 준 엉망진창인 글입니다...

-TRIGGER WARNING! 2010년대 초에 유행하던 인터넷 소설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폭력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엑스트라로 살아남는 법

: 어느 날 소설 속 엑스트라가 되어버렸습니다.

W. 그쁨





"…저기, 그냥 근처 카페 같은 데로 가는 게-,"

"음, 미안. 그건 좀 힘들 것 같네!"

방긋방긋 웃으며 단칼에 제 부탁을 거절하는 나를 보며 김석진은 찍소리도 못 하고 내 뒤를 졸졸 쫓았다. 찰박찰박, 그새 고인 물웅덩이를 마구잡이로 밟고 지나갔다. 그만큼 마음이 다급했다. 김석진의 우산에 나란히 들어가 있다는 사실에 더욱 그랬다. 비가 올 거란 생각도 못 한 나한테 우산이 있을 리가 만무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혹시라도 김석진에게 딱 달라붙은 채 한 우산 아래 있는 꼴을 우리 학교 학생에게 들키기라도 하는 날엔 내 조용하고 만족스러운 엑스트라 생활이 끝나게 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걸음이 빨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우리 또래의 학생이 지나갈 때면 우산을 앞으로 숙여 얼굴을 가리는 일도 그와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나온 결과였다. 물론 그 덕에 나보다 훨씬 키가 큰 김석진은 허리를 아주 반으로 굽히다시피 해야 했지만.

골목을 몇 번이나 꺾고, 꺾고, 또 꺾어, 사람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지나다니지 않는 골목 깊은 곳에 문 닫은 문방구가 하나 보였다. 자물쇠로 단단히 잠긴 문방구 앞 처마 밑에 들어서고 나서야 나는 걸음을 멈췄다. 김석진이 덩달아 처마 밑으로 끌려들어 왔다. 그제야 내가 허락도 없이 김석진의 손목을 붙잡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나는 그새 붉은 손자국이 남은 김석진의 손목을 보며 때늦은 사과를 건넸다. 어, 손목 막 잡은 거 미안. 그 말에 김석진은 잠시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어벙한 표정을 짓다가 겨우겨우 입을 떼 대답했다. …어, 괜찮아.

"그보단 이야기 좀 하자고 했다가 이런 곳까지 오게 된 게 좀 더 당황스러운데."

"음, 그것도 미안,"

나도 너랑 굳이 이런 곳에서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는데.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아예 이야기 자체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없었는데 말이야. 비뚤어진 생각들을 속으로 눌러 담고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내보였다. 진정하자, 나는 김연주다, 소설 엑스트라다,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다….

"굳이 이런 골목까지 숨어들어서 할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굳이 여기로 온 이유라도 있어?"

왜겠냐고, 학교에서의 네 미친 인기 때문이겠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날 보는 김석진의 면전에다 대고 그런 말을 해봤자 역효과만 날 것이 뻔했기에 나는 적당히 사실을 섞은 핑계를 대며 그 질문에 답했다.

"으응…, 사실 눈에 띄는 게 좀 부담스러워서…."

"눈에 띌게 뭐 있어, 같은 반 친구끼리 이야기 좀 하는 건데."

"어, 그러기엔 네 인기가 너무 많아서, 혹시 보고 오해하는 애들이라도 생길까봐 그랬어."

"오해라면?"

"…소문이라는 게 원래 좀 그렇잖아? 우리가 무슨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 퍼진다거나? 실제로는 아무 사이도 아니지만 말이야."

그냥 너랑 엮여서 소문나는 게 싫다는 말을 잘 포장해서 하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횡설수설 내뱉은 내 말에도 김석진은 여전히 납득한 표정은 아니었지만, 일단 넘어가 준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나랑 엮이는 게 불편하다는 거네?"

맞는 말이긴 한데…, 시발, 혹시 이거 플래근가? 나 지금 '나한테 관심을 가지지 않은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에 한 발 더 가까워진 건가? 미친, 안 돼.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그렇다기보다는~, 하며 다급하게 말을 이으니 김석진이 눈썹을 까딱거리며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존나 재수 없다. 근데 또 잘생기긴 더럽게 잘생겨서 더 열이 뻗쳤다.

"나도 그렇지만, 너도 소문 때문에 불편할까 싶어서-,"

"…흐음,"

"네가 불편한 게 아니라! 너랑 엮이는 게 불편한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나는, 네가! 나랑 그런 소문이 나는 게! 혹시라도 불편하면 어쩌나 싶어서-,"

"응, 이해했어."

"으응…?"

"네 말은, 내가 불편할까 봐 배려해 준 거란 말이잖아. 맞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되물어오는 김석진에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횡설수설 나불댔던 내 말들을 조합해보면 그런 뜻이 되긴 하지. 속 사정은 전혀 아니지만. 아무튼 김석진에게, 내가 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서 좋을 게 없다는 상황을 이해시키는 데는 성공한 듯싶었다. 그런 줄 알았다.

"근데 나는 상관없는데?"

"…어?"

"너도 딱히 내가 불편한 건 아니라며. 나도 괜찮으니까 그냥 카페 가서 편하게 얘기하는 게 어때?"

뭐요, 시발. 말문이 턱 막혔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린다는 게 이런 거겠지. 혼신의 힘을 다해 설명했던 모든 것들은 김석진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설마하니 장난이라도 치는 걸까 싶어 김석진의 표정을 샅샅이 훑었지만, 접어두었던 우산까지 팡-, 하고 펼치며 가자는 듯 나를 보는 그 얼굴에 장난기라곤 1도 없어 보였다. 와, 환장하겠네.

표정관리가 점점 힘들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닥치고 내 말 듣고 얌전히 여기 있으라며 이 처마 밑에서 김석진을 탈탈 털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난 지금 소설 속 엑스트라에 빙의해 있었고, 소설 속에서 나는 원래의 내가 아닌 김연주다. 이딴 삼류 소설의 여주인공이 되지 않고 한낱 엑스트라로 남으려면 내가 몸을 사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어떡하지? 그냥 김석진을 따라 모른 척 카페로 가자니 조용한 엑스트라의 삶이 박살 나는 건 그쪽도 매한가지였고, 모르쇠 하고 여기서 버티자니 김석진이 참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어서 가자는 듯 눈을 빛내고 있었다. 진짜 어떡하냐…? 멘탈이 파사삭-, 하는 파열음과 함께 조각조각 부서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 웃음소리가 들렸다. 청량한 그런 웃음소리가 아니라, 푸웁, 하며 웃음을 참는 것에 더 가까운 소리가. 데굴데굴 굴리던 눈동자를 김석진에게 고정했다. 장난기 가득한 눈이 휘어져 있었고, 입꼬리가 예쁘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래, 웃고 있었다, 김석진이.

"아, 미안."

"……."

"장난이었는데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길래."

…원래 이런 캐릭터였나? 웃음기 가득한 장난 어린 얼굴을 마주하고 나서 정신이 멍해진 것 같았다. 웃는 얼굴이 잘나 보여서? 아니, 어이가 없어서. 내가 생각했던 '김석진'이라는 등장인물과는 너무 달라 보여서 그랬다. 아니, 원래 얘 잘생기고, 공부 잘하고, 친절한데 은근 벽 있는, 그런 최종 흑막 같은 캐릭터 아니었냐고. 얼빠진 낯으로 김석진을 보는 사이 그는 펼쳤던 우산을 다시 접으며 내게 다가왔다. 코앞까지 다가온 얼굴에 억지로 시선을 마주했다. 개구쟁이처럼 눈을 접으며 김석진이 말했다.

"긴가민가 했었는데, 확실히 알 것 같아."

"…뭘?"

"너,"

설마하니 벌써부터 '나한테 관심을 가지지 않은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루트로 들어가 버린 건 아니겠지? 에이, 내가 뭘 했다고 벌써부터 그러겠어. 분명 김석진은 다섯 살 난 아이의 장난 어린 미소를 얼굴에 걸고 있는데도 어쩐지 그 웃음이 유독 싸하게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뒤로 몇 걸음 휘청이며 몸을 물리니 김석진은 벌어진 거리만큼 다시 다가왔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그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내 발걸음이 돌처럼 굳었다.

"너 이 세계 사람 아니지?"

이쯤 되니 더더욱, 이 소설이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소설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김석진을 보았다. 여전히 빙긋 웃고 있는 얼굴이 참 잘나 보였다.





📘 📗 📕





이건 또 무슨 전개지. 황당함에 말을 잃고 김석진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떠보는 건가? 그저 사람 좋은 미소만 방싯방싯 띄우고 있는 김석진의 얼굴에서는 무언가를 읽어낼 수가 없었다. 눈을 도르륵-, 굴림과 동시에 머릿속도 바쁘게 돌아갔다. 뭘 알고 저런 질문을 한 걸까, 아니면 그냥 한번 찔러보는 걸까?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걸 티 낼 만한 행동을 내가 했었던가? 아니, 애초에 김석진은…, 나한테 관심도 없었잖아? 당최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으니 머릿속은 복잡해지고, 침묵은 길어져만 갔다. 그래도 시치미를 떼던, 맞다고 시인을 하던 무어라 대답 정도는 해야 되겠다는 생각에 나는 또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뭐라고 대답하지. 무슨 대답이 최선일까. 맞아, 나 사실 다른 세계 사람이야…? 여주인공 되기 딱 좋은 멘트다.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볼까? 김석진도 그냥 찔러본 거면 내 입으로 내 정체를 털어놓는 꼴 아닌가. 그렇다면 셋…

"그게 무슨 소리야?"

고개를 20° 정도로 기울이기까지. 좋아, 완벽하다. 당황스러움에 이리저리 굴러가던 눈동자도 숨긴 얼굴에는 이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만 남아있었다. 사실 연기에 엄청난 재능이 있었던 거 아닐까? 하는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김석진을 보았다. 얼굴에 있던 장난스러운 미소는 사라지고, 이제는 입꼬리만 살짝 올린, 평소 김석진의 표정만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다.

"시치미떼도 소용없어.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여기서 잠깐 딴소리를 좀 해보겠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감'을 믿는가? 100퍼센트의 성공률을 자랑하지는 못하지만, 12년간의 초, 중, 고등학교 생활과 4년간의 대학 생활로 인해 나는 내 직감이 어느 정도 발달해왔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위급 상황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데는 내 직감만큼 탁월한 게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또, 이 직감이란 형태는 이따금 상당히 추상적인 것들을 근거 삼아 발동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의 말투라던가, 행동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있다. 여기서 왜 갑자기 직감 운운하며 말을 길게 늘이냐고? 그야, 지금 이 상황에서 내 직감이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김석진의 말을 모르쇠 하는 반응으로 넘어가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뭐, 예를 들어보자면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평온한 얼굴 유지하고 있는 김석진의 표정이라던가, 이미 확신을 품고 내뱉은 듯한 말투, 그리고 올곧게 나를 바라보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 따위가 그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저건 단순히 무언가를 떠보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는 분위기였다. 음, 젠장. 어떡할까 하는 생각도 잠시였다. 어쨌든 나는 불가능이라는 두꺼운 벽 앞에서 한 줄기 빛을 찾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되려 빠르게 포기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사람에 가까웠다. 그랬기에 이어진 내 행동도 그런 내 성격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구멍가게 문 앞에 쭈그려 앉은 나는 얼굴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김석진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어떻게 알았냐?"

세상, 그 거지 같던 소설 등장인물 말투에서 벗어나니까 그렇게 속이 시원할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말투를 무슨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것마냥 정직하게 적어둔 작가 때문에 소설 속에 자연스레 묻혀가기 위해 억지로 작위적인 말투를 따라 해야만 했는데, 원래의 내 말투로 돌아오고 나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평범한 반 친구 1의 얼굴도 벗어던졌다. 김연주의 순진한 눈망울은 어디 가고, 거의 동태 눈깔, 그 엇비슷한 눈을 한 채 저를 올려다보는 내 모습에 김석진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너 원래 이런 이미지였던가?"

"그게 중요하니?"

다 들킨 마당에 연기할 필요도 없겠다, 뇌를 거치지 않고 말을 내뱉는 내 화법에 김석진이 푸하-,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내 옆에 제 긴 다리를 접어가며 같이 쪼그려 앉았다.

"진짜 이 세계 사람 아니야?"

"어."

"그럼 다른 세계에서 왔겠네?"

"어."

"거기도 여기랑 비슷해?"

"…야, 혹시나 싶어서 물어보는 건데,"

너 혹시 나 떠본 거냐? 질문 폭탄을 퍼붓는 김석진에게 내가 조용히 물었다. 내가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는 걸 확신한 게 아니라, 그냥 떠본 것뿐이었는데 내가 걸려든 거면 널 연기 천재로 인정하겠단 생각을 하며 내뱉은 내 말에 김석진이 웃더니 대답했다. 떠본 거 아니야.

"원래부터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어떻게 알았냐고-,"

"네가 원래 있던 세계에도 인터넷 소설이라는 거 있었어?"

"어, 있었어."

"그래?"

"응."

"그럼 우리 같은 세계에서 왔을 수도 있겠다."

고개를 팩, 하니 돌렸다.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김석진의 얼굴이 보였다. 뭐라고? 되묻는 내 말에 김석진이 차분히 대답했다.

"너랑 나랑 같은 세계에서 넘어왔을 수도 있겠다고."

내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서, 내가 김석진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다면, 김석진과 내가 같은 세계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아니 잠깐만. 그럼 김석진도 나처럼 소설 속에 들어온 사람이라는 소리야? 와, 남주인공 후보가? 진짜 어떻게 되먹은 소설이야? 얼이 빠진 표정으로 김석진을 쳐다보았다. 말문이 턱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 탓에 입만 뻐끔대며 김석진에게 삿대질을 하니 김석진이 작게 웃으며 내 손가락을 곱게 접어주었다. 진짜야. 김석진이 말했다. 

눈을 떠 보니 이 소설 속에 들어와있었다고 했다. 여기까진 나랑 똑같았는데, 다른 점이 있다면 김석진은 이 소설의 주인공 중 하나였고, 나는 고작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에 불과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이야기를 시작으로 김석진은 묻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이거 참, 다영인가 뭔가 하는 친구가 생각나는데. 아무튼, 김석진의 이야기를 들으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몇 가지 있었는데, 개중 가장 놀라웠던 것 몇 가지를 이야기해보자면, 가장 놀라웠던 점은 역시 김석진과 같이 소설에서 주연으로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은 좋던 싫든 간에 소설에 적혀있는 대로 행동하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했다. 물론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 시간에는 제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었기에 나를 찾아온 것이라고. 뭐, 나는 정말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에 불과해서 그런 제약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두 번째로 놀라웠던 점은, 이 소설이 대체 뭐 하는 소설인지에 대해 꾸준히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나와는 다르게, 김석진은 지금 이 소설의 원작을 읽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만 이상한 점은,

"뭐야, 그럼 줄거리 알고 있단 소리잖아! 뭔데! 나도 알려줘!"

"…싫어."

김석진이 끝까지 줄거리를 알려주지 않았다는 점. 오래전에 읽은 거라 기억이 안 난다는 말을 덧붙이긴 했지만, 나는 어쩐지 발갛게 달아올라있는 김석진의 귀가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다고 느꼈다. 뭐, 사실 여기가 19금 소설 속이라던가? 아님 말고!

아무튼, 김석진이 그 이후에 소설을 줄거리에 대해 입을 여는 일은 없었다. 치사하게 지만 알고 있겠다 이거지. 불퉁한 표정을 지으며 나는 김석진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다. 꽤 얌전히 김석진이 하는 말들을 듣고 나니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나는 나름대로 분량 제로인 엑스트라로서 이 소설 속에 잘 녹아들어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째 김석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내가 꼭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처럼 행동했다는 말로 들리는 것이었다. 대체 내가 빙의자인 건 어떻게 알았는데? 내 질문에 김석진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티 나던데?

"사실 우리한테 관심도 없으면서 애써 관심 있는 척하는 것도 눈에 보였고, 주변 여자애들 따라 리액션을 하긴 하는데 영혼이라곤 1밀리그램도 담겨있지 않고,"

"……."

"또 뭐더라, 가끔 김여주랑 있을 때 눈이 마주치면, 동공에 초점 풀려있는 것도 보였고…."

"……."

"가끔 소설 장면일 때 마주치면, 진짜 못 볼꼴 본 것처럼-,"

"됐어, 거기까지."

친절하게 과거의 행적들을 하나하나 짚어주는 김석진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 티가 났다고. 나름 혼신의 연기를 펼치고, 이 소설 속에 잘 녹아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개뿔이었다는 사실을 남의 입으로 확신하고 나니 얼굴이 홧홧 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쪽팔림을 무릅쓰고 제법 뻔뻔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서 들려오는 김석진의 비웃음은 가뿐히 무시한 채로.

쪽팔림과는 별개로, 이 세계에 나와 같은 빙의자가 있다는 사실은 꽤 유용한 정보였다. 물론 그게 김석진, 즉, 이 세계의 주인공급 인물이라는 점은 좀 아쉬웠지만. 아무튼,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끼리 잘 지내보자는 둥의 말을 하는 김석진에게 나는 기꺼이 내 번호를 내주었다. 물론, 학교에서 아는 척하지 말 것, 엑스트라로 조용히 살고 싶으니 기꺼이 협조할 것 따위의 조건을 덧붙인 채 말이다. 물론, 곱게 협조해 주지 않겠다는 듯 김석진이 싫은데?를 남발하며 내 성질을 박박 긁어대긴 했지만, 그래서 결국 주먹으로 김석진의 팔을 몇 대 때리고 나서야 그의 협조 아닌 협조를 얻어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는 비공식적 친구 사이가 되었다. 뭐, 그렇게 됐다. 근데 얘 진짜 원래 이런 캐릭터였나?

살다 살다 소설 주인공이랑 친구를 다 해보네. 나는 쪼그려앉아있던 다리를 쭉 펴고는 저려오는 다리를 주먹으로 몇 번 콩콩, 내리쳤다. 찌르르-, 한 감각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그럼 내일 보자, 저릿한 감각을 없애기 위해 발을 몇 번 구르곤 가방을 앞으로 고쳐메며 내가 김석진에게 말했다.

"잠깐, 같이 가! 너 우산 없다며, 그러고 가게?"

가방을 품속에 꼭 껴안곤 당장에라도 빗속으로 뛰쳐나갈 준비를 하는 날 보며 김석진이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당황한 손이 내 어깨 언저리를 방황했다. 우산? 없지! 하는 내 말에 김석진이 옆에 세워두었던 우산을 허둥지둥 쥐는 게 보였다. 이거라도 쓰고 가! 하며 제 우산을 내미는 김석진이었다. 당연히 내가 그 우산을 받는 일은 없었다.

"야!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안 걸려."

난 엑스트라거든, 여주인공이 아니라. 내 대답에 벙진 표정을 짓는 김석진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다음에 보자! 하는 말을 내뱉기 무섭게 나는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뽀송뽀송했던 머리카락이 빗물에 젖기 시작했다. 어쩐지 더 무겁게 느껴지는 가방을 들고뛰는 내내 내 머릿속은 김석진의 생각으로 가득했다. 아, 오해는 하지 말길 바란다. 핑크빛 가득한 로맨스적 의미로 생각한 게 아니라, 그냥 이 세계에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이 있다는 데서 온 생각들에 불과하니까.

이 세계에, 나 말고 또 다른 빙의자가 있었다.





📘 📗 📕





내가 김여주 같은 소설 속 여주인공이었다면 어제저녁에 비를 잔뜩 맞은 걸로 감기에 걸려 골골대며 남주인공들의 걱정 어린 관심을 죄다 받아낼 수 있었겠지만, 나는 이 소설의 엑스트라, 그것도 소설 내에서는 존재감이 공기와 비슷한 수준의 엑스트라였기 때문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지 멀쩡하고 튼튼함 빼면 시체인 내가 비 조금 맞은 걸로 감기에 걸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김석진

[괜찮아?]

반짝이는 핸드폰 화면에 나는 정면을 향해있던 시선을 조금 아래로 내렸다. 아이고, 이거 김석진 이름이 너무 대놓고 나와있는데. 혹여나 내 옆자리의 최은지라던가, 내 뒷자리에 앉은 이유진의 눈에 이 이름이 들어간다면 펼쳐질 끔찍한 상황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름 바꿔야겠네.

[뭐가]

남주후보 3

[너 어제 비 맞고 갔잖아. 감기 안 걸림?]

[ㅇㅇㄱㅊ]

쓸데없는 걱정을 다 한다 싶었다. 더 이상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서랍에 넣어놓고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보냈다. 아마도 김석진의 것일 시선 하나가 등을 매섭게 찌르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끝까지 김석진이 앉아있는 쪽으로는 시선 한 자락도 보내지 않았다. 학교에선 아는 척 안 한다며, 이놈아. 벌써부터 괜히 번호를 줬나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래서 얘들아-,"

아마도 같은 엑스트라 신세에서 벗어나긴 그른 것 같아 보이는 반장이 교탁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벚꽃의 꽃말이 중간고사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나? 바닥에 떨어져 짓밟힌 채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벚꽃잎들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벌써 5월이라고, 내가 이 고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지도 벌써 두 달이나 지났다. 슬슬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는 이 5월에는, 인터넷 소설 속에 존재하는 고등학교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의 고등학교에서도 열리는 중요한 행사가 있다. 그게 뭐냐면-,

"한 명당 종목 하나씩은 필수로 참여해야 돼! 앞에 종이 붙여놓을 테니까 참가하고 싶은 종목에다 자기 출석번호 적어주라!"

"그리고 반티 정하는 것도 지금 빨리 정하고 끝낼게, 괜찮지?"

바로 체육대회다. 이 뜨거운 땡볕 아래서 평소라면 절대 입지 않을법한 옷들을 주워 입고 땀을 뻘뻘 흘려야만 하는, 그 체육대회 말이다.

"2반은 간호복이랑 의사 가운으로 한대! 사진으로 봤는데 예쁘더라! 연주 너는? 뭐 하고 싶어?"

"…글쎄…."

마음 같아서는 그냥 학교 체육복이나 입고 싶다마는. 뒷말을 삼키고는 잔뜩 들뜬 이유진을 향해 어설픈 미소를 보여주었다. 어차피 나 같은 엑스트라 23쯤 되는 애가 의견을 피력해봤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문 채 절망적인 눈빛으로 반 아이들이 신명 나게 반티 사이트를 뒤적거리는 것을 구경했다. 물론, 내 뒷자리에 앉은 이유진도 잔뜩 들떠서는 한마디씩 보탰다. 하필이면 이런 쪽에도 현실 반영이 된 것인지, 반 아이들이 열광하며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모니터에는 가지각색의 반티 사진이 모여있었다. 군복에 한복, 환자복, 짱구 잠옷 등등…. 스물네 살이나 처먹고는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저딴 옷을 입고 운동장을 활보할 생각을 하니 쪽팔림에 눈물이 다 나더라.

"야야, 이거 어때?"

"에이, 누가 요즘 반티로 몸빼바지를 입어!"

차라리 몸빼바지가 낫지, 그건 잠옷으로라도 입을 거 아니니. 허탈한 눈빛으로 점점 좁혀지는 반티 후보들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뒤에서 이유진이 행복한 고민을 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눈여겨보던 편하고, 심플한 디자인의 반티들은 이미 후보에서 제외된 지 오래였다. 영혼 없는 눈빛으로 마지막까지 남은 반티 후보 두 개를 번갈아가며 보던 나는 조용히 책상 위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그럼 이걸로 할게? 하는 반장의 목소리에 반 아이들은 좋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나는 생각했다. 꿈이겠지, 꿈일 거야.

"개 잘 어울리는데,"

"좀 닥쳐."

자연스레 내 방 침대를 차지하고는 날 보며 낄낄대는 김석진을 사납게 노려봐주었다. 김석진이 왜 내 방에 있는지에 대해 설명을 좀 해보자면 음, 늘 말했다시피 엑스트라로서의 조용한 생활을 이어나가고 싶어 하는 나 때문에 우리가 밖에서 얼굴을 맞대고 하하 호호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김석진의 집에 가자니, 김석진의 집 근처에서 포진하고 있는 그의 팬들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일개 학생이면서 집 근처에도 팬들이 존재한단 말이야? 경악을 금치 못하며 외치듯 물은 내 말에 김석진이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진짜 집 안까지 따라오는 일은 없다고 답했다. 여하튼 그러한 이유로, 결국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우리 집이 되어버렸다. 물론 내 의지는 단 1도 반영되지 않은 결과였다. 무작정 쳐들어오는 김석진을 막기엔 난 이미 이 소설에 너무나도 시달린 나머지 잔뜩 지쳐버린 상태였단 말이다.

"지는 경찰복이다 이거지? 주인공이다 이거지? 주인공 버프로 이딴 거지 같은 반티는 피했다 이 말이지?"

"꼬우면 너도 주인공 하던가."

"재수 없어, 씨발…."

역시 소설의 주인공들이 대거 포진해있는 반 답게, 그 누구보다 체육대회에서 우리 반이 제일 튀어야 한다는 일념을 가진 반 아이들이 고른 반티는 이랬다. 경찰복과 죄수복. 원래 반티라는 게, 그 반의 단합을 위해 옷을 통일시키는 데 의의가 있는 게 아닌가? 어떻게 된 게 우리 반은 반티를 두 개씩이나 골라서는, 반에서도 경찰복을 입은 팀과, 죄수복을 입은 팀으로 절반이 갈렸다. 그리고 그 절반을 나누는 기준은 이랬다. 출석번호가 홀수인 팀과 짝수인 팀. 출석번호가 홀수면 경찰복, 짝수면 죄수복. 나는 8번, 김석진을 비롯한 주인공들의 출석번호는 죄다 홀수. 개 같은 거 진짜. 흐물흐물해서는 제대로 된 죄수복 퀄리티도 안 나오는 반티를 내려다보며 내가 중얼거렸다.

"왜, 나름 잘 어울리는데,"

나는 내 의자를 차지한 채 태연히 과자를 입에 쑤셔 넣는 이를 노려보았다. 알고 지낸지는 겨우 두 달, 말을 튼 건 겨우 몇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도 세상 둘도 없을 절친한 친구마냥 편안하게 있는 꼴이 어이가 없었다. 내 과자, 하며 낮게 중얼거리니 다음에 배로 사주겠다며 제 지갑을 흔들어 보이는 꼴도 재수가 없었다.

"김여주한테 바꿔달라고 하던가, 야, 네가 여주인공인 게 더 재밌긴 하겠다."

"미친, 제발 그딴 끔찍한 소리 좀 그만두라고-,"

나와 저 자신, 우리 둘 말고도 이 세계에 또 다른 빙의자가 있다는 사실을 감쪽같이 숨긴 김석진은, 다짜고짜 우리 집에 찾아와서는 깜짝 방문이랍시고 나를 놀래킨 것만으로는 모자라, 또 다른 빙의자라며 저가 데려온 이를 내게 소개했다. 나는 또다시 얼빠진 낯을 할 수밖에 없었고, 김석진은 그런 내 표정이 웃겨죽겠다며 손뼉을 치며 웃었다.




Gravatar"진심인데-,"

눈꼬리를 곱게 접곤 샐샐 웃으며 말하는 박지민을 향해 나는 내 고운 중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냉미남은 무슨. 지금 보니 그냥 사람 열받게 하는데 도가 튼 여우 새끼였다. 남주인공 후보 둘과 함께하는 엑스트라 생활, 잘 마무리될 수 있을까요? 죄수복을 내팽개치며 나는 생각했다. 글러먹었다, 씨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