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는 대신 지켜드립니다

4화 - 잠금 해제

유산에 관한 이야기가 끝난 뒤, 나는 혼자 별장을 둘러보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갔다. 뒤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발소리가 따라왔다. 계단을 다 오른 뒤 고개를 돌리니 우진이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왜 따라와?”

“그럼 남자친구를 두고 혼자 가?”

 

 

음. 그것도 맞네.

가족들 앞에서 연인인 척하기로 했으니 따로 돌아다니는 것도 이상해 보일 수 있었다.

근데 곤란하네. 나는 비밀번호 단서를 찾아야 하는데. 찝찝함 마음을 안고 다시 걸음을 옮긴다. 뭐, 적당히 둘러대면 되겠지. 애초에 아빠 돌아가시고 나서 비밀번호만이 문제가 아니니까.

 

이 별장은 아빠가 유독 좋아하던 곳이었다. 본가보다 머무는 시간이 길었던 적도 있었다. 집의 차갑고 정돈된 분위기와 달리, 별장에는 오래된 나무와 천에서 나는 따뜻한 냄새가 배어 있었다. 괜히 지나갈 때마다 눈가가 시큰거리는 기분이 되었다.

 

복도 끝에는 아빠가 서재 겸 침실로 사용하던 방이 있다. 두 짝의 문이 우람하게 버티고 있었다. 복도 끝을 아예 하나의 방으로 만들어서 유독 넓은 공간이었다.

 

무거운 문을 열자, 고풍스러운 붉은 융단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체리나무로 만든 책상과 책장이 한쪽 벽을 채우고 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침대와 작은 소파가 놓여 있었다. 아빠의 취향이 반영된 방은 여전히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고, 나무 혹은 책과 같은 좋은 냄새가 났다.

 

방 안은 아래층과 달리 조용했다. 나는 가방에서 2G폰을 꺼내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별장으로 오는 차 안에서 우진이 구해온 충전기를 연결해 겨우 전원을 켰다. 우진이 운전에 집중하는 사이 아빠 생일, 내 생일, 엄마 생일까지 입력해봤지만 전부 틀렸다.

 

이제 남은 기회는 두 번이었다. 이 휴대전화가 아빠 명의라는 보장도 없다. 서비스센터에 가져가도 비밀번호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국, 내가 알아내야 한다. 핸드폰을 꾸욱 쥐었다가 내려놓곤 일어났다.

 

곧장 책장 앞으로 향해 책등을 훑어보았다. 아빠가 좋아하는 추리소설이나 사회과학 논문들이 즐비했고, 나는 눈에 걸리는 책을 하나씩 꺼내들었다. 책 사이에 메모라도 숨겨놓지 않았을까. 촤라락 페이지를 빠르게 넘겨본다.

우진은 방 안을 둘러보다 책장을 뒤지는 나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뭘 찾는 거야?”

“알 거 없어.”

 

 

손이 멈칫, 굳었다. 폰 비밀번호를 찾는다고 하면 큰일 나겠지. 신경 좀 꺼줬으면 좋겠는데.

책 한 권을 다시 꽂고 다음 칸으로 손을 뻗었다. 낡은 앨범과 서류철을 옆으로 밀자 책장 깊숙한 곳에서 두꺼운 노트 한 권이 나왔다. 손때 묻은 연갈색 표지에는 익숙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여주 육아일기]

 

아빠의 글씨체랑은 다른데. 여자의 글씨같아. 그래, 이건 어릴 때 봤던 …엄마의 글씨였다.

 

멍한 기분으로 노트를 꺼내 들고 침대 옆 소파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 조심스럽게 첫 장을 펼쳐본다.

엄마와 아빠의 글씨가 번갈아 적혀 있었다.

 

오늘 여주가 처음 걸었다. 소파를 붙잡고 일어나더니 세 걸음이나 혼자 걸었다. 넘어지고도 울지 않았다.

 

그 아래에는 아빠의 글씨가 이어졌다.

 

울지 않은 게 아니라 놀라서 우는 걸 잊은 것 같다. 한참 뒤에 몰아서 울었다.

 

다음 장을 넘겼다.

 

여주가 처음 한 말은 ‘아빠’였다. 하루 종일 엄마를 연습시켰는데 억울하다.

아빠를 더 좋아해서 그런 거다.

아빠의 글씨 옆에는 엄마가 크게 엑스 표시를 해놓았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웃으면서 다음 장을 넘겼다.

 

새벽부터 열이 내려가지 않았다. 내가 안으면 엄마를 찾고, 엄마가 안으면 아빠를 찾는다. 결국 셋이 밤을 새웠다.

아침이 되자 언제 아팠냐는 듯 혼자 잠들었다. 엄마와 아빠만 앓아누웠다.

 

 

더 읽으려고 했지만 글씨가 흐려졌다. 급하게 눈가를 닦고 다시 페이지를 넘겼다. 닦아도, 닦아도 눈물이 계속 떨어졌다. 종이 위로 번질까 봐 노트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둘 다 이런 걸 남겨놓고 어디로 간 거야. 소파 옆으로 몸을 기댔다. 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인지 눈꺼풀이 금세 무거워졌다. 조금만 눈을 감으려고 했다. 정말 조금만.

 

 

“엄마…….”

 

 

가슴에 안은 노트를 놓치지 않으려고 팔에 힘을 줬다.

 

 

“아빠…….”

 

 

울음이 섞인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까무룩, 잠에 들었다.

 

 

 

---

 

 

 

여주의 숨소리가 고르게 바뀌었다. 방 안을 둘러보던 우진이 소파 쪽으로 다가왔다. 여주의 품에 안긴 육아일기를 빼내어 몇 장 넘겨봤다. 오늘은 여주가 걸었다. 여주가 처음 아빠라고 말했다. 비슷한 내용이 계속 이어졌다.

 

우진은 별다른 흥미가 없다는 듯 육아일기를 소파 옆에 내려놓았다. 잠든 여주의 얼굴을 잠시 내려다보다 바지 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주머니 안에 들어 있던 은빛 2G폰을 꺼냈다. 전원 버튼을 누르자 잠금 화면이 나타났다.

 

우진은 비밀번호 입력창을 열어 망설임 없이 숫자를 눌렀다. 네 자리 숫자를 빠르게 입력하니 배경화면이 나타났다. 잠금이 풀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문자 한 통이 있었다. 15년전에 온 문자가.

우진은 확인할건 다 했다는 듯, 곧바로 휴대전화를 껐다. 다시 전원을 켜 잠금 화면이 나타나는 것을 확인한 뒤 휴대전화를 여주의 주머니에 돌려놓았다.

 

그의 손가락은 단 한 번도 망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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