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JEU [Série arrêtée]

N° 03

Gravatar


IN GAME

NO. 03

W. 설하

손바닥을 꿰매야 한다는 의원의 말에도 나는 멍한 정신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화병의 날카로운 조각에 깊게 베인 상처들은 아직 선명한 핏빛을 띄우고 있었다. 그 섬뜩하기 그지없는 색조를 마주하지 않기 위해 나는 상처 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바늘이 살을 꿰뚫고 들어가는, 그 생생하고도 선명한 감각이 소름 끼치도록 끔찍해서 당장에라도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을 몇 번이고 참아내야 했다. 표정만큼은 담담해 보이길 바라며, 나는 곁눈질로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을 흘긋거렸다.

"다 됐습니다. 웬만하면 다친 손을 쓰시는 일은 없도록 하시는 게 좋습니다. 급한 대로 봉합만 한 거라 언제 상처가 벌어질지 모르니 더 주의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 주의할게."

"그리고, 이걸로 상처 부위를 매일 두 번 정도 소독하시면 됩니다. 직접 하기 번거로우실 테니, 시녀에게 맡겨두지요. 실은 상처가 붙을 때쯤이면 알아서 녹을 테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소독용 에탄올 솜과 비슷해 보이는 것을 근처의 사용인에게 건네는 의원을 향해 그래, 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아프다, 욱신거리는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살풋 인상을 찌푸리는 날 보고 저가 더 아픈 듯, 와락 인상을 구기던 의원이 이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해 보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서기 전 율리아의 가족들에게 무어라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내게 했던 경고와 비슷한 말을 다시금 전하는 듯싶었다. 손을 쓰는 일이 되도록 없어야 한다는 경고. 의원의 말을 듣는 이들의 표정이 너무나도 심각한 탓에 나는 그들을 지켜보다 죄스러움에 고개를 떨어트렸다. 어쨌거나, 내가 들어와 있는 이 몸은 '율리아'의 것이고, 나는 그들에게 지금 소중한 가족이었으니 그들의 걱정과 분노를 받아내는 것 또한 오롯이 내 몫이 될 것이다. 한순간 이성을 잃고 벌인 일이 그렇게 한심스럽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비로소 의원이 문을 닫고 방을 나섰을 때, 진과 알엠이 동시에 내가 걸터앉은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목구멍을 타고 꼴깍, 넘어갔다.

"…왜 그랬니,"

"……."

"대체…, 대체 뭐가 문제야, 율리아? 네가 말해주지 않으면 우리는 몰라…! 네가, 네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네 몸을 그렇게 험하게 다루는지…,"

"……."

"…네게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알고, 기억을 잃었기에 우리가 남과 별다를 것 없이 느껴질 거라는 사실도 알지만, 그래도, 우리는 가족인데-,"

"형, 그만해. 너무 흥분했어. 율리아도 놀랐을 거야."

드문드문 끊기는 진의 음성이 그가 울음을 참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내게 화를 내는 진을 말리던 알엠 또한 그보다 조금 더 침착해 보일 뿐, 걱정이 가득 들어찬 눈은 그 또한 진과 같은 생각을 했음을 쉽게 알 수 있게 해주었다. 게다가 죄책감이라는, 그들의 얼굴에 어린 그 희미한 감정을 알아챈 나로서는 아무런 말 없이 침묵으로 이 상황을 넘겨버릴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 따지고 보면 전부 내 탓이 맞았다. 죽음이란 단어 하나에 무력하게 굴복하여 이성을 잃은 내 탓이 가장 클 것이고, 그도 아니라면 진짜 율리아를 대신해 '나'를 이들 사이에 끼워두고는 모른척하는 누군가의 죄가 더 클 것이었다.

"미안해,"

"…아니야, 내가 너무 흥분했어. 알엠 말이 맞다. 네 탓이 아니-,"

"아니, 그래도 미안해."

"율리아…."

"설령 내가 가족에 대한 것이든, 이 저택에 대한 것이든, 그 어떤 것이든,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오라버니들이 날 걱정한다는 사실을 모른척했다는 것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어. 오라버니들뿐만 아니라, 부모님, 그리고 이 저택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

"미안해. 홧김에 저지른 실수였다고는 해도, 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한 내 잘못이 맞아."

"…그래, 앞으로는 그러지 마."

"……."

"절대, 그러지 마 율리아…."

진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기어이 참았던 울음이 터진 듯했다. 그래, 이들이 내게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들은 기억을 잃었다 변명하는 나에게 매사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기억이 없어도, 그들을 기억하지 못해도 '율리아'가 이곳이 '집'이라 느끼게 하는데 그들은 모자람이 없었다. 단지, 내가 '율리아'가 아니라는 변수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니 차라리 죄책감은 내가 가지는 편이 맞았다. 그렇기에 나는 마치 '율리아'처럼 그들에게 사죄의 말을 건넸다. 다친 손, 그새 옅은 핏불이 밴 붕대를 칭칭 감은 내 손을 부여잡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그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미안하다는 말밖에 없었기에, 그마저도 결국 그들을 속이는 거짓말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계속해서 그 말만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이제 괜찮다는 말이 전부였다. 방에 있던 거의 모든 이들이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얼핏 보았다면 누군가가 죽기라도 했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의 분위기였으나, 앞뒤 사정을 모두 알고 있는 이들의 눈에는 아마 화목한 가정으로 보일 것이다. '율리아'의 가족들은 실로 단란하고 화목했다. 아마도 내 예전 삶에서는 꿈도 꾸지 못했을 완전한 가족의 모습은 바로 이런 모습일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야말로, 나는 '율리아'라는 아이가 조금 부러워지기도 했던 것이었다.

그들이 비로소 울음을 그쳤다.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인다는 알엠의 말에 나는 웃으며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래, 좀 쉬어야지. 하며 진이 침대에 걸터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알엠도 마찬가지였다. 푹 쉬어, 하는 그 말과 함께 머리를 헝클이는 손길이 다정하다. 시간이 늦었으니 어서 자라며, 그들의 손길에 침대에 몸을 뉜 내 몸뚱어리 위로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준 그들이 방 문을 닫고 나섰다. 나는 달칵, 하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한껏 올려두었던 입꼬리를 내렸다.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인 탓에 볼이 경련하는 것도 같았다. 땀이 흥건하게 베인 손을 이불에 대충 문질러닦고는 몸을 일으켰다.

[메인 퀘스트 : 전직]

필수 퀘스트

당신은 [전직]에 대한 1차 퀘스트를

완료하지 못했습니다.

'메인 퀘스트'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당신에게 다시 한번

[전직]을 진행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당신이 [전직]을 완료하기 전까지

당신에게 주어진 '메인 퀘스트'는

진행되지 않습니다.

원하는 직업을 선택하십시오.

, 1차 퀘스트에서

이미 누군가에게 선택된 직업군은

선택이 불가할 수 있습니다.

성공 보상 : 직업별 능력치 / 직업 전용 스킬

실패 시 : 플레이어 사망

[전직]을 진행하시겠습니까? Y / N

6D 22H 48M

아, 끝끝내 죄다 0이 되어버린 숫자는 또 다른 퀘스트로 내게 돌아왔다. [전직], 무겁게 나를 짓누르는듯한 그 단어가 내 시야에 선명하게 들어찼다. 실패 시, 플레이어 사망. 내가 그렇게나 두려워하는 '죽음'을 내걸고, 퀘스트는 내게 시스템에 복종할 것을 명하고 있는 것이었다.

새파란 창에 적혀있던 내용이 살짝 바뀌었음은 문장 몇 개를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실패 시의 페널티가 생겨난 것이 그랬다. 마른침을 삼키고는 천천히 문장들을 읽어내려갔다. 읽으면 읽을수록 내 안색이 점차 어떻게 변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0D 0H 0M, 그 숫자들을 마주한 순간에 퀘스트 창은 지지직거리는 노이즈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퀘스트 창의 시간이 모두 경과했음에도 내가 죽지 않았다는 건 좋은 일이었으나, 여전히 영문모를 이 세계에서 '율리아'로 남아있단 사실만큼은 빈말로도 좋은 일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자정으로부터 약 1분이 경과한 뒤 바로 부여된 이 퀘스트는 내게 경고하고 있었다. 내가 '전직'을 하지 않았음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요행이자, 그들의 자비라고. 그러니 '전직'을 수행해라. 이번에도 내가 퀘스트를 무시한다면, 나는 죽는다. 그리고 그 죽음이 단순히 원래 세게로 돌아간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란 사실은 이제 명확해진 바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든 싫든 간에, 내가 [전직]을 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다.

새로 생겨난 퀘스트 창에서 알아낼 수 있던 것은 비단 이뿐만이 아니었다. '1차 퀘스트에서 이미 누군가에게 선택된 직업군은 선택이 불가할 수 있습니다.' 꼬아서 생각해 보면 나 외에도 직업을 선택한 이들이 있단 뜻이었으며, 이는 나처럼 '다른 세계'에서 이 세계로 뚝 떨어진 이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말과 동일했다. 이 시스템은 나를 포함한 그런 사람들을 '플레이어'라는 단어로 정의한 것 같았다. 어쨌든 좋은 소식이었다. 후에 '메인 퀘스트'를 진행할 때 그들과 접촉한다면, 내가 알아낸 정보들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을 포함해서.

"전직, 전직이라…."

실감이 나진 않았지만, 내가 전직을 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Y'를 눌렀다. 내 앞으로의 게획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내가 살아있어야만 실현 가능한 계획이었다. 아직 죽고 싶지 않다. 아니, 살아서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 이 '메인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이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유일한 열쇠가 된다면, 나는 기꺼이 '메인 퀘스트'에 발을 들이밀 것이다. 새파란 디지털 화면, 그 반투명한 막과도 같은 것에 내 손가락이 닿는다. 퀘스트 창이 사라질 때와 같이 지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노이즈들이 나타났다. 새파란 화면이 일렁이며 내 시야도 덩달아 울렁거린다. 그러고는, 우습게도 암전이었다.

IN GAME

"…으윽, 미친…."

머리가 울렸다. 울렁거리는 속에 주변을 살펴볼 틈도 없이 바닥에 무릎을 붙인 채 헛구역질을 해야만 했다. 속은 물론이고, 입고 있던 옷차림새까지 살짝 엉망이 되어있었다. 몇 번이고 헛구역질을 하다 보니 진정된 속에,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온통 새파란 공간, 아공간(亞空間)이라 불릴만한 장소. …전직이라며? 빈말로도 직업을 선택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할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뭐 어떡하라고, 큰맘 먹고 선택한 Y의 결과가 이러니, 허탈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자, 그럼 이제 어떡한담. 나는 새파란 벽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손으로 그것을 두드려보았다. 차갑고 낯선 감촉이 손등을 따라 전해졌다. 내가 온 힘을 다해 이 벽을 때린다고 해서 쉽게 부서질 것 같진 않았다. 이것도 뭐, RPG 게임 속 한 장면처럼 생각하면 되려나. 조금 더 쉽게 생각하자. 애초에 내가 이 공간에 들어온 이유는 전직을 하기 위해서니까, 전직을 끝내고 나면 공작저든 어디든, 다시 되돌아갈 수 있겠지. 나는 벽을 두드리던 것을 멈추고는 다시금 공간의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직, 그래. 직업을 선택하기만 하면 돼. 근데 말이 쉽지, 이 텅텅 빈 공간 속에서 나 혼자 뭐 어떡하라고?

'도우미'같은 게 있지 않을까, 예컨대, 뭐, 게임 속 가이드라던가 하는 그런 것들. 그런 게 있었다면 진즉 내가 이 공간에 들어섰을 때 나왔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저기요,"

"…아무도 안 계세요?

역시 이건 아닌가, 민망함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졸지에 벽과 대화를 시도한 사람이 되어버린 기분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화끈하게 달아오른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나는 아닌 척, 열심히 딴청을 피웠다. 아무리 보는 사람이 없었대도, 민망한 건 민망한 거였다. 그즈음일까, [푸핫-], 하는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하하핰! 아 얘 골 때리네 진짜,]

"…누구세요?"

환청인가 싶었지만 그건 절대 아니었다. 분명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었다. 주위를 열심히 살펴보았으나 아까와 다를 바 없는 새파란 벽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 누군가의 인기척이라던가, 모습이라던가 하는 것은 코빼기도 비추질 않았다. 이쯤 되니 누군가가 내 혼잣말을 들었다는 사실에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민망함이 몰려오는 것이었다. 웃음소리라던가 말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공간에든, 이 공간 너머이든 누군가가 분명히 있다. 한 가지 기분 나쁜 점은-,

"…왜 초면부터 다짜고짜 웃고 난리…."

[크흡-,]

또다 또. 또다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나는 한껏 불퉁한 표정을 지은 채 벽의 어딘가를 노려보았다. 누구세요? 다시 한번 물어오는 내 목소리에 한참을 크하핰거리며 웃음을 터트리던 목소리가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재밌어라. 안녕?]

"저 세 번째로 묻는 건데, 누구세요?"

[나? 나는… 음…. …널 여기로 데려온 사람, 은 아니고, 시스템쯤 되려나?]

"…시스템?"

[응, 시스템.]

눈을 가늘게 좁혔다. 갑작스레 시스템이라니, 여기가 진짜 게임 속이라도 된다는 듯한 어투에 나는 잠시간 생각했다. 이곳? 그 단어가 가리키는 곳이 이 새파란 벽들만이 가득한 아공간일지, 혹은 이 세계 전체를 말하는 것인지를.

"…날 이 세계로 데려온 게 너라고?"

[갑자기 반말…. 그건 내가 한 일이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내가 한 일이 맞기도 해.]

"알아듣게 말해주면 좋겠는데,"

[그래, 네가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누군가가 내게 널 이 세계로 데려오라고 시켰고, 나는 그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소리야.]

"그 누군가가 누군데?"

[그만, 네가 지금 여기에 있는 목적은 그게 아닐 텐데?]

"……."

[내가 아무리 네게 호의적이라고 해도, 그분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네 편을 들 수는 없어.]

"……."

[네 목숨을 조금 더 소중히 해보는 건 어때?]

아직까지도 웃음기가 짙게 베인 목소리로 '시스템'이 말했다. [그러니까 얌전히 직업이나 고르렴, 아가야.] 뒤늦게 이어진 호칭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목소리에 옅게 배인 경고를 알아차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시스템'은 내게 호의적이다. 하지만 그 자신이 말한 대로 나를 우선시하지는 않는다. 그 말의 뜻을 단번에 알아들은 나는 더 이상의 사족을 붙이지 않았다. 주제넘게 나섰다가는 순식간에 죽을지도 모른다. '시스템'이 경고하는 바가 그러했기 때문에.

뭘 하면 돼? 하는 내 물음에 시스템이 [잠시만]이라 답했다. 이윽고 이 새파란 아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나는 입을 떡하니 벌리고 멍청하게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허공으로 떠오르는, 수많은 게임 속 직업군들을 형상화한 그래픽들.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이 '이 중에 네가 원하는 직업을 골라라'라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 뭐란 말인가. 나를 둘러싼 수많은 그래픽들에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몇 개 정도가 아니었다. 못해도 수십 개는 되어 보이는 수많은 직업군들을 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와, 미쳤다. 시스템이 또다시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 들려왔다.

"이 많은 게 다 직업이라고?"

[그래.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어 봤지.]

"와…. …그럼 이 중에 아무거나, 내가 원하는 걸 고르면 되는 거야?"

일러스트 형태로 되어있는 그래픽들은 그 모델이 들고 있는 무기만 보더라도 어떤 직업인지 대충은 알 수 있었다. 그래픽 위에 둥둥 떠있는, 새파란 색의 직업 이름 역시도. 무기 종류가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그래픽들이 손에 쥐고 있는 것은 각양각색이었다. 대검부터 시작해, 저걸 들 수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게끔 만드는 커다란 창,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 단검까지. 그것들을 보고 있자니 정말 이곳이 '게임' 속이 아닐까 하는 꽤 합리적인 의심이 피어올랐다. 그래도 내가 선택할 직업이라고, 관심이 가는 것들을 몇 개 추려가며 시스템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어지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오색찬란한 색감을 자랑하며 자리하던 몇몇 그래픽이 흑백의 이미지로 뒤바뀐 것 밖에는 없었다. 모든 직업군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정말 소수의 직업군만이 그 색을 잃고 흑백의 이미지가 되어버린다. 아마도 이 흑백으로 변한 직업군은 다른 사람이 선택했기에 그런 것이겠지. 1차 퀘스트에서 이미 누군가에게 선택된 직업군은 선택이 불가할 수 있습니다, 퀘스트 창 속의 그 문장을 떠올리며 나는 아쉬움을 한껏 담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필이면 가장 관심 있게 보던 '리퍼'라는 직업이 흑백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었다.

[너는 2차 퀘스트를 부여받은 플레이어라, 선택이 제한돼. 알고 있지?]

"응, 알고 있어."

[네가 고를 수 있는 직업은, 흑백으로 바뀌지 않은 직업들뿐이야.]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직업을 구경하며 추려둔 직업 몇 개는 여전히 다채로운 색상을 뽐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RPG 게임을 하면 늘 비슷한 계열의 직업군만 고르던 나로서는 지금도 그때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추려둔 직업들이 죄다 단검이라던가, 표창이라던가 하는 도적 직업군이라는 것만 봐도 그랬다. 섀도어, 쌍단검을 사용하는 직업. 이걸로 할까? 나는 내가 한때 이 '전직'을 몹시도 두려워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로 직업군을 고르는데 푹 빠져 있었다. 생각보다 즐거웠다. 어쩌면 점점 더 '게임'과 비슷하게 진행되는 이 상황 속에서, 역시 이 세게는 현실이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을 얻은 것일지도 몰랐다.

한 가지 신경 쓰이는 점이 있다면, 그건 '시스템'의 반응이었는데, 그는 내가 관심 있게 보던 직업군 쪽으로 다가갈 때마다 [흐음?], [음…,] 하는, 마뜩잖다는 추임새를 넣곤 했는데 그게 그렇게 신경이 쓰이는 것이었다. 마치, '왜 그걸 골라?'하는 듯한 어투였기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나 칼, 검을 쓰는 류의 직업군에 다가가면 그 한숨이 짙어졌다.

"……."

[휴우….]

"……."

[흐음….]

자꾸 이런 식이니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결국 나는 직업을 둘러보는 것을 멈춘 채, 팔짱을 끼고는 허공을 노려보았다. 뭐, 하는 짤막한 내 말에 시스템은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어투로 [응? 뭐가?] 따위의 대답을 내놓았다.

"아까부터 뭐가 그렇게 불만이길래 한숨을 푹푹 쉬어?"

[…티 나?]

그 한마디에 나는 어이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눈치채라고 한숨 쉰 거 아니었나. 시스템의 반응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허공에 말했다.

"추천해 줘."

[…내가? 직업을?]

"그러고 싶은 눈치길래."

비약일지도 모르겠으나, 아까부터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마치, 내가 어떤 직업을 선택하기를 바라는 듯한 반응. 시스템의 그런 반응이 의아했다. 그와 동시에 궁금하기도 했다. 단순히 내게 '어울리는'직업을 선택해 주고 싶은 것인지, 혹은 내가 필연적으로 '선택해야 할' 직업이 존재하는 것인지. 시스템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나는 다른 직업들을 살펴보지도,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은 채 그런 시스템을 묵묵히 기다릴 뿐이었다.

이윽고 아주 천천히, 수많은 그래픽들 중 단 하나의 일러스트만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말없이 내게 다가서는 그래픽을 바라보았다. 모델의 손에 들려있는 무기를 보고 나는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약간의 소름이 돋기도 했다.

[…그림에 손을 대봐.]

어쩐지 망설이는 듯한 말투로 시스템이 내게 말했다.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내 앞으로 바싹 다가온 그래픽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마치 그 그래픽 너머에 무언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내 손이 빨려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 너머에 있는 걸 가져오면 돼.] 하는 시스템의 말에 나는 손을 이리저리 휘둘러가며 그래픽 너머를 더듬었다. 딱딱한 무언가, 아마도 상자일 무언가가 손에 잡혔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상자를 든 채 그래픽에서 손을 빼냈다.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내 앞에 자리하고 있던 거대한 그래픽이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그래픽 위에 떠있는 직업의 이름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이거 진짜야?"

[여기서 써 봐도 돼.]

"여기서?"

[여긴 '전직'을 위해 만들어진 가상의 공간이니까. 네 마음대로 날뛰어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아.]

딱딱한 나무 상자에 들어있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리볼버 한 쌍이었다. 딱딱한 몸체를 한번 쓸어보다, 나는 꽤 익숙한 폼으로 리볼버를 손에 쥐었다. 손에 감기는 리볼버의 손잡이 감촉이 낯설었다. 철컥, 하는 금속음과 함께, 나는 검지에 닿아있는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하는 총성이 귀 따갑게 울려 퍼졌다.

그래픽, '블래스터'의 미간 정 중앙에 총알이 박혀있었다. 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뜨끈하게 달아오른 총구를 살짝 매만지며 나는 상자 속으로 다시금 리볼버를 집어넣었다. 나무상자의 뚜껑을 닫자,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가 잠겼다.

"하나만 물어봐도 돼?"

[그래.]

"왜 총이야?"

어째서, 내게 어울리는 직업군이 '총'을 사용하는 '블래스터'일까. 시스템은 무엇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일까? 나는 블래스터 그래픽의 미간에 박혀있는 총알을 바라보며 시스템에게 물었다. 또다시 정적이었다. 대답 없는 시스템을 뒤로한 채 나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나무상자를 집어 들었다.

"할게, 이 직업."

[…그래.]

"이 총도, 나 가져도 되는 거지?"

[응, 네 거 맞아.]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그래픽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블래스터의 그래픽도 마찬가지였다. 대신해서 내 시야를 채운 것은 새파란 창, 퀘스트 창과 비슷해 보이는 파란 창이 다시금 내 눈앞에 나타났다. [메인 퀘스트 :전직]이라는 딱딱한 글자들이 말하는 바는 같았으나, 그 내용만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메인 퀘스트 : 전직 (진행 중)]

필수 퀘스트

선택한 직업군

[블래스터]

전직하시겠습니까?

Y / N

장황한 설명 대신 간략한 문장들만이 떠올랐다. 단순히 전직에 대한 내 의사만을 묻겠다는 듯, 간결하게 적힌 그 문장들을 바라보던 나는 망설임 없이 'Y'를 눌렀다. 전직 퀘스트를 대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내가 이 직업을 선택한 것은 오롯이 내 선택이다. 시스템이 추천해 준 영향도 없진 않았으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단칼에 거절했을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전직 퀘스트]와 [전직]은 확연히 달랐다. 죽음에 쫓기듯 선택한 [전직 퀘스트]의 'Y'와는 달리, 기꺼이 블래스터가 되겠다는 내 의지가 담긴, [전직]의 'Y'는, 그만큼 달랐다.

[메인 퀘스트 : 전직 (진행 중)]

필수 퀘스트

전직을 완료하였습니다.

플레이어의 직업 : 블래스터

/

"…율리아?"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음성에 나는 화들짝 놀라 문을 바라보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로 생각에 잠겨 있던 탓이었다. 들어가도 되겠냐는 듯, 눈짓하는 진을 향해, 어어, 들어와! 하는 얼빠진 대답을 함과 동시에, 나는 내가 들여다보고 있던 리볼버가 든 상자를 그에게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해 최대한 몸으로 침대를 가리려 애썼다. 침대 위의 이불을 끌어다 그것을 가리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오라버니,"

"왜 아직 안 자고, 잠이 오지 않아?"

"아, 아니. 이제 막 자려던 참이었어…."

"…그래?"

한 발짝 더 다가오는 진에 혹시라도 내가 숨겨둔 것을 들킬까, 식은땀이 삐죽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내 침대에 걸터앉는다거나 할 생각은 없었는지, 그저 침대에 앉아있던 내 앞으로 와 내 머리를 살포시 쓰다듬을 뿐이었다.

"누워보렴,"

그뿐이면 참 좋았을 텐데. 진의 다정한 손이 내 이마를 쓸어넘겼다. 그의 말에 상자가 보이지 않게끔 조심스레 이불을 젖혀 그 속으로 들어간 나는, 내 이마를 조심스럽게, 그리고 참으로 다정하게 누르는 진의 손길에 못 이기는 척 베개에 머리를 붙일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급하게 숨긴 상자가 자꾸만 몸을 찌르는 탓에 인상을 찌푸리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야만 했다.

"리아,"

"…응, 오라버니."

진은 한참이나 내 머리를 쓸어넘겼다. 다정한 손길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는 몇 번이고 '리아' 하며 나를 불렀고, 나는 그가 몇 번을 부르든 간에 '응-,' 하며 대답했다.

"어렸을 때, 막냇동생이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 알엠과 함께 처음 너를 보러 갔었어,"

"……."

"신기했어. 머리통은 조막만 하고, 주먹은 그보다 더 작고, 얼굴엔 아직 펴지지 못한 주름이 쭈글쭈글 한데도, 내 눈에는 누구보다 더 귀여워 보였어. 네가 막냇동생이라 그런 걸까?"

"……."

"알엠도 나도, 그리고 부모님도, 모두 널 사랑했지. 이 저택에 널 아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거야. 지금도 물론, 널 많이 아끼고 사랑하는 데는 변함이 없어, 리아. 그래서, …그래서."

갑작스레 시작된 옛이야기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진과 율리아,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등 뒤에 위치하고 있는 상자가 계속 거슬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러다 이불 밖으로 삐져나오는 건 아니겠지, 진이 상자를 봐버리면… 뭐라고 변명하지? 진이 계속해서 이야기를 늘어놓아도, 결국 울음을 참느라 잔뜩 흐트러진 목소리를 감추려 말을 멈출 때도 나는 진의 시선이 내 뒤의 상자에 닿지 않는지를 신경 쓰느라 바쁠 뿐이었다. 물론, 끝끝내 울음을 터트리는 그를 보며 그럴 일은 없겠다 안심한 뒤에야 그의 이야기를 제대로 떠올릴 수 있었지만. 나는 붕대를 몇 겹이나 감아둔 손을 꼬옥 붙잡은 진을 바라보다, 잘 움직여지지 않는 손으로 그의 손을 붙잡았다. 진의 눈이 크게 뜨인 것도 같았다.

"알고 있어."

"…리아,"

"기억하지 못한다 해서 눈에 보이는 것까지 못 알아차릴 만큼 바보가 된 건 아니니까."

나는 진의 손을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모를 수가 없다. 그가 기억을 잃은 체 하는 내게 와 저가, 그리고 가족들이 나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아도, 눈에 보이는 그들의 사랑만 해도 내게는 벅찰 만큼이나 많기 때문에. 그들이 '율리아'를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지 눈에 빤히 보이기 때문에, 말 그대로 모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진이 울음을 터트렸다.

"날 아껴주는 가족들에게 늘 감사해."

하지만 나는 율리아가 아니었기에, 결국 입에 발린 말이 되어버릴 뿐이었다. 내 대답에 진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나는 어쩐지 착잡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진은 그로부터 한참을 더 운 뒤에야 내 방을 나섰다. 추태를 보였다며 미안해하는 그를 보며 나는 옅은 미소만을 보여주었다. 괜찮아, 하는 내 말에 진이 옅게 웃었다. 잘 자, 리아. 하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살포시 눈을 감았다. 내 이마를 쓸어주던 진의 손길이 점차 멀어졌다. 그리고 달칵, 하며 방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감았던 눈을 반쯤 뜬 뒤 주변을 살폈다. 진이 완전히 나갔음을 확인한 나는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상자 모서리에 계속해서 눌렸던 옆구리가 욱신거렸다. 으, 아파라-, 하는 중얼거림과 함께 나는 침대에서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메인 퀘스트 : 아카데미]

필수 퀘스트

당신은 [전직]을 무사히 완료하였습니다.

'메인 퀘스트'의 진행 자격이 부여됩니다.

크레아 제국의 중심

'메를린 아카데미'

당신은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제국을 비롯한 대륙 전체에서 나타나는

'이상 현상'에 대한 것을

조사해야 합니다.

아카데미 입학일 : 제국력 117년 4월 1일

제한 시간 : 20D 19H 34M

완료 조건 : 아카데미 입학시험 합격 (미완)

갑작스레 등장한 진에 미처 읽지 못한 퀘스트의 내용을 눈에 담았다. 3주, 아카데미인지 뭔지에 입학하기 위해 오르테 공작을 비롯한 율리아의 가족들을 설득하는데 남은 시간이 단 3주였다. 아니, 내가 알기론 아카데미가 북부에 위치해 있으니, 그곳으로 향하는 것까지 고려한다면 시간이 단 2주밖에 남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했다. 막막하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여차해서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그냥, 도망가면 될 일이었다. 물론, 이곳의 삶이나 사회에 대해 잘 모르는 나로서는 도망치는 것이 최악의 선택이 될 수도 있겠지만. 별 수 있나, 이 '메인 퀘스트'의 조건이 아카데미의 입학인 이상,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카데미로 향할 심산이었다.

도망, 최후의 선택으로 남겨둔 그 단어를 떠올리고도 나는 담담할 수 있었다. 이 저택의 사람들은 내 가족이 아닌 '율리아'의 가족이었기에 그러했다. 그 사실이 마음 한편에 위로로 남아 도망 따위의 선택지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아, 그럼에도 마음 한편이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리아, 내 동생."

"……."

"우리는 언제나 네 편이야."

다정한 손길로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넌지시 남겼던 진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