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촬영 날, 정하은은 태용에게 돌려줄 수건을 가방 맨 앞칸에 넣어두고도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몇 번이나 그걸 확인했다. 그냥 빌린 수건을 돌려주는 것뿐인데, 이상하게 숙제를 안고 가는 기분이었다. 대기실 앞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자연스럽게 건네야지. 감사했다고만 말해야지. 괜히 이상한 표정 짓지 말아야지. 하은은 속으로 몇 번이나 연습했지만, 막상 촬영장에 도착하자마자 그 생각은 전부 흐트러졌다. 오늘 촬영에 다른 남자 모델이 추가된다는 말을 그제야 들었기 때문이다.
“오늘 추가 컷 때문에 모델 한 명 더 오세요. 태용 씨랑 같이 찍는 컷도 있고, 단독 컷도 있어요.” 선배의 말에 하은은 급하게 새 콘티를 확인했다. 이름은 강민준. 배우 겸 모델로 요즘 꽤 많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은이 자료를 넘기고 있을 때, 누군가 뒤에서 밝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 담당자분이세요?” 하은이 고개를 들자 키가 큰 남자가 웃으며 서 있었다. “아, 네. 정하은입니다.” “강민준입니다. 오늘 잘 부탁드려요.” 민준은 처음 보는 사람답지 않게 편하게 웃었다. 하은도 따라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민준은 현장 분위기를 금방 편하게 만들었다. 스태프 이름도 빨리 외웠고, 소품이 무거워 보이면 먼저 들어주고, 하은이 동선을 설명하다가 말을 더듬으면 “천천히 말씀해주셔도 돼요. 제가 잘 못 알아듣는 편이라서요.” 하고 농담을 했다. 덕분에 하은은 처음보다 훨씬 덜 긴장했다. 문제는 그 모습을 태용이 보고 있었다는 거였다. 태용은 대기실 입구 쪽에 서서 물을 마시다가 하은과 민준이 웃는 쪽을 잠깐 바라봤다. 표정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하은은 이상하게 그 시선이 느껴졌다.
촬영이 시작되자 태용은 언제나처럼 완벽했다. 민준도 능숙했고, 둘의 합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하은은 태용이 평소보다 더 말이 없어진 것 같다고 느꼈다. 원래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필요한 대답만 짧게 했다. “조명 괜찮으세요?” “네.” “동선 한 번 더 확인하실까요?” “봤습니다.” “잠깐 쉬어가실게요.” “알겠습니다.” 하은은 괜히 눈치를 봤다. 혹시 컨디션이 안 좋은가. 아니면 자신이 뭘 잘못했나. 아니면 지난번에 신경 쓰인다는 말을 해놓고 불편해진 건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점심시간에 하은은 태용에게 수건을 돌려주려고 대기실 앞을 서성였다. 그런데 타이밍이 계속 어긋났다. 태용이 나오면 스타일리스트가 불렀고, 하은이 다가가려 하면 무전이 울렸다. 그러다 민준이 하은 옆으로 다가왔다. “하은 씨, 식사는 하셨어요?” “아직요. 정리하고 먹으려고요.” “또 정리하고요? 현장 담당자분들은 다 그런가.” 민준은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샌드위치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하나 드세요. 저 두 개 받아서요.” 하은은 당황해서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괜찮다는 말 많이 하시네요.” 그 말에 하은은 순간 멈칫했다. 어디서 들은 말 같았다.
그때 대기실 문이 열렸다. 태용이 나왔다. 하은은 반사적으로 태용 쪽을 봤고, 태용의 시선은 민준이 내민 샌드위치와 하은 사이에 잠깐 머물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태용은 아무 말 없이 지나가려 했지만, 민준이 먼저 말을 걸었다. “태용 씨도 드실래요?” 태용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러고는 하은을 지나쳐갔다. 하은은 이상하게 그 뒷모습이 신경 쓰였다. 그냥 지나간 것뿐인데, 어쩐지 조금 차가워진 것 같았다. 결국 하은은 민준에게 샌드위치를 받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오후 촬영 중간, 하은은 태용에게 확인받을 수정 콘티를 들고 갔다. 태용은 모니터 옆에 혼자 서 있었다. 하은은 최대한 평소처럼 말했다. “태용 씨, 다음 컷 동선이 조금 바뀌어서 확인 부탁드립니다.” 태용은 콘티를 받아 들고 훑어봤다. “민준 씨랑 같이 확인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하은은 순간 눈을 깜빡였다. “네?” “아까 계속 같이 얘기하던데.” 말투는 차분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시가 있었다. 하은은 잠깐 태용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저한테 화나셨어요?” 태용의 손이 멈췄다. “아니요.” “근데 오늘 조금…” “제가요?” “네. 조금 차가우신 것 같아서요.”
태용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하은은 괜히 물었다고 생각했다. 현장 한가운데에서 이런 말을 꺼낼 필요는 없었는데, 자꾸 마음이 앞섰다. 하은이 먼저 물러서려는 순간, 태용이 낮게 말했다. “원래 차갑게 보인다면서요.” 하은은 그대로 굳었다. 지난번 첫 촬영 때 자신이 혼잣말처럼 했던 말이었다. 진짜 상남자네. 말도 짧고 표정도 없고. 설마 들었나. 하은의 얼굴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그걸 들으셨어요?” “안 들으려고 했는데 들렸습니다.” 태용은 콘티를 다시 하은에게 건넸다. “수정은 괜찮아요.”
하은은 콘티를 받았지만 쉽게 돌아서지 못했다. “그때는 제가 실수해서 긴장한 상태라 그렇게 생각한 거고요.” “지금은요.” 태용이 물었다. 하은은 말문이 막혔다. 지금은 뭐라고 해야 하지. 차갑다고 하기엔 너무 많이 챙겨줬고, 다정하다고 하기엔 여전히 말투가 무뚝뚝했다. 하은은 한참 망설이다가 작게 말했다.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태용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어려운 사람이긴 한데, 싫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말하고 나니 너무 솔직했다. 하은은 바로 시선을 내렸다.
그날 마지막 촬영은 민준과 하은이 함께 소품 위치를 확인하면서 조금 늦어졌다. 민준은 계속 장난을 쳤고, 하은은 피곤한 와중에도 웃었다. 멀리서 태용이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손에 들고 있던 물병 뚜껑을 몇 번이나 열었다 닫았다. 촬영이 끝나고 하은이 혼자 장비 리스트를 정리하고 있을 때, 태용이 다가왔다. “수건.” 하은은 그제야 가방을 떠올렸다. “아, 맞다. 드리려고 했는데 정신이 없어서요.” 하은은 급하게 수건을 꺼내 건넸다. “감사했습니다. 잘 썼어요.” 태용은 수건을 받아 들었다. “다음에는 민준 씨한테 빌리면 되겠네요.”
하은은 눈을 크게 떴다. “네?” 태용은 말하고 나서야 자신도 너무 티가 났다는 걸 깨달은 듯 잠깐 입을 다물었다. 하은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질투하세요?” 태용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아니요.” 대답이 너무 빨랐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하은은 참지 못하고 작게 웃었다. “아닌 것치고는 되게 신경 쓰시는 것 같은데요.” 태용은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하은을 봤다. 한참 후에야 낮게 말했다.
“신경 쓰이는 건 맞아요. 근데 그걸 뭐라고 해야 할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하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촬영장 불이 하나둘 꺼지고, 주변은 조금씩 조용해지고 있었다. 태용은 수건을 손에 쥔 채 하은을 바라봤다. “불편하면 말해요.” 하은은 고개를 저었다. “불편하진 않아요.” “그럼요.” 하은은 대답 대신 콘티를 품에 안았다. 심장이 또 이상하게 뛰었다. 태용은 무뚝뚝했고, 솔직하지 못했고, 질투도 이상하게 조용히 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게 자꾸 하은을 흔들었다. 하은은 결국 말했다. “그냥 좀 신경 쓰여요. 태용 씨가.” 태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아주 잠깐,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이상하게 대답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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