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iseau rêveur et le chasseur

#3

*본 글은 실제 인물과 관련이 없습니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로 숙부님이셨네요! 아이들이 유하가 닮은 분이 왔다고 떠들어서 혹시나 했는데."

빈 교실로 그를 안내한 여주는 아이들 못지않게 종알거렸다. 어제만 해도 새장 속의 새처럼 소심히 파닥대던 그녀가 학교에서는 제 세상처럼 나풀거 렸다.

새삼 신기한 모습이긴 했지만 그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그 숙부님은 도대체 누굴 말씀하시는 건지."

"아아, 유하 삼촌이시잖아요. 어제는 당황해서 제대로 호칭도 못 불러드렸는데 이제라도 고치는 게 맞지 않나 싶어서요. 괜찮으실까요?"

"글쎄요. 굳이 그렇게까지 거창하게는."

"그렇다고 제가 아버님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보니,"

"숙부님, 좋군요."

간결한 성격답게 정국이 긴급한 타협을 이루어냈다.

그깟 호칭이야 아무려면 어떨까. 어차피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볼지 모를 여자였다.

"숙부님, 정말 염려가 많으시지요?"

"저야 뭐"

잠을 잘 이루지 못한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지만 이유는 그녀와 조금 달랐다. 어차피 유하야 현실을 깨닫는 즉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리 교육을 시켜왔고 제법 영리한 아이니까.

하지만 그런 유하에게 바람을 집어넣은 사람이, 하루의 절반을 함께하는 교사라면 문제가 달라졌다.

"안 그래도 유하 때문에 숙부님께 연락을 드려야 하나 하던 참이었어요."

"연락 왔습니까?"

"아뇨, 그건 아니지만..여기, 이거 한번 보시겠어요?"

“이걸 왜."

악보를 발견한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상담 날 보았던 악보 외에도 여러 악보들이 연습장 곳곳에 가득했다.

"그냥 악보만 있는 게 아니라 유하가 따로 메모도 많이 해두었더라구요."

“……..“

"음, 유하가 공부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음악까지 조예가 깊었나 봐요.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

“그런 게 대단한 겁니까?"

" ….....네? "

"어차피 제일고 목표는 한국대 진학일 텐데요. 학교 방침도 그렇다 들었는데."

긴 다리를 교차시킨 정국의 자세가 한결 느긋해졌다. 언제 그리 차갑게 입을 다물었냐는 양 피식 입가가 올라갔다.

"워낙 유명하지 않습니까. 입시 사관학교."

"아아, 그거야 그렇지만......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물론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니까요. 친구들이랑 어울리며 사회생활도 배우고 적성도 찾아야 하고요."

난 또 뭐라고.

괜히 긴장했던 여주의 웃음 역시 보다 자연스러워졌다.

그를 오래도록 알아온 사람이라면 정국이 저리 웃는 저 순간이 바로 생사의 마지막 기로라는 것을 알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사회 경험이 길지 않았다. 맹수가 가장 느긋한 순간은 먹잇감을 해치우기 직전이라는 것을 알 리가 없다.

“"선생님께선 정말 그리 생각하십니까?"

“그럼요! 제일고라고 해서 꼭 공부에만 치중하지는 않아요. 공부 말고도 아이들한테 중요한 게 얼마나 많은데요."

"그거 의외군요."

툭, 툭. 그의 손가락이 무릎 위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마치 사냥감을 쫓는 듯한 울림이 점차 빨라지며 묘한 긴장감을 불러왔다.

“제 기억에 입학식 때 들었던 이사장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았는데. "

"이사장님은......”

입학식에는 제가 이곳에 없었으니 미처 듣지 못했지만, 이미 들은 것도 같았다. 이사장님 뜻이라면 교장선생님의 입을 통해 수백 번도 더 전해 듣지 않았던가.

하나도 대학, 둘도 대학, 세상 끝까지 대학, 또 대학.

귀가 다 따가운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떠올려보던 여주가 조용히 입술을 맞물었다.

"글쎄요. 그분은 저도 뵙기가 워낙 힘들어서."

"자주 안 나오시나 봅니다."

"네, 뭐. 그렇죠"

"사실 얼굴도 잊어버릴 지경이다.'라는 말 대신 여주는 적당히 순화해보았다. 정국의 검은 눈썹이 삐죽 올라가는 것에 그녀는 얼른 변명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비록 학교의 방침과는 다르긴 했지만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아이에게까지 대학 따위를 언급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사장님도 학생들을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크게 다르지 않으실 거예요. 결국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당장의 점수보다는 아이들의 인성과 미래잖아요. 교육자라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요."

"과연 그러실지."

보기보다 참 의심이 많으신 숙부님이구나.

정국의 기울어진 자세에 여주가 마른 목을 꿀꺽 넘겼다. 조금이나마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어설픈 농담까지 덧붙여보았다.

°아마 이사장님께 직접 여쭤봐도 똑같이 말씀하실걸요."

보일 듯 말 듯 휘어진 그녀의 눈가에 정국의 미간이 좁혀지는 듯했지만 그것도 잠시, 곧 두 사람 모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여주는 날개만 없는 새로, 정국은 총만 없는 사냥꾼으로.

"그럼 실례 많았습니다. 이만 가봐야겠군요."

"아...... 벌써 가시려고요? 아직 보여드릴 것도 더 있고 유하 이야기도 좀 더 나누었으면 하는데.“

"아뇨. 알아야 할 것은 전부 알았으니까요.”

"아…“

"정국아! 전정국!"

어떻게든 이 상황을 넘겨보려던 여주가 물끄러미 고개를 들었다. 학교 이사장이었다. 제일고에 부임한 이래 이렇게까지 가까이에서 이사장님을 마주한 적이 있기나 했나.

당황해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상대방의 시야에 저따위는 존재조차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대신, 저돌적으로 다가서는 이사장님의 눈은 처음부터 오직 한 남자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정국이 네가 여기 웬일이야! 연락도 없이!"

"고모님."

"세상에, 말을 좀 하지 그랬어! 얼른 내 방으로 가. 응? 뭐 하고 있어."

"..... "

그러게요. 뭘 하고 있는 걸까요.

넋이 나간 여주의 목이 꿀꺽 넘어갔다. 대충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필사적인 의지가 그녀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다. 밀랍 인형같이 하얗게 질린 얼굴이 툭, 한번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것만 같다.

미처 피할 정신도 없는 여주가 어영부영 사람들에게 밀려나가자 정국이 흘끔 돌아보았다.

“괜찮습니까? "

"…수, 숙부님. 그럼 이, 이사장님이."

"아아,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타이를 바로잡는 척, 슬쩍 숙인 정국의 고개가 그녀의 귓가로 내려앉았다. 아주 짧은 찰나에도 그의 다정한 작별인사는 더없이 의미심장했다.

“궁금한 건 제가 대신 여쭤볼 테니까."

꿈꾸는 새와 사냥꾼

"정국이 네가 학교에 절대 알리지 말라고 해서 대놓고 챙기진 못해도 내가 늘 관심 가지고 지켜봤다니까. 유하가 개 아주 잘 지낸다고. 죽은 듯이 공부만 하면서. "

"...... "

"고등학생한테 이거보다 어떻게 더 좋을 수가 있겠니."

"•...그러게 말입니다."

여기서 어떻게 더 좋아질 수 있는 건지.

무표정하게 그녀를 한참이나 지켜보던 정국이 찬찬히 입을 열었다. 지극히 현실적이며 합리적인 고모의 의견에 기꺼워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오 로지 앞날만을 보고 달리는 그녀의 맹목적인 태도 역시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꿈 타령이나 하는 순진한 여자가 낫다 싶을 정도로.

아, 미친 뭐라는 거야.

"저기. 정국아. "

그녀가 어쩐 일인지 우뚝 멈춰 아무런 말이 없는 정국의 팔을 툭, 조심스레 건드려보았다.

"갑자기 생각나서 말인데. 너 얼마 전에 강인건설 서 회장 댁 아가씨랑 만났다면서?"

.. "아니, 내가 꼭 만나보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된 거 둘이 잘해보지 그랬어. 그쪽에선 아직도 너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던데."

"저한텐 있어도 고모님한텐 없을 겁니다."

"…...응?"

이 와중에도 실속을 차리려던 이사장이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지킬 건 지키는 관계'로 돌아온 정국이 습관처럼 명함을 꺼내려다 말고 피식 고개를 흔들었다.

"조만간 고소당해도 연락하지 마세요."

꿈꾸는 새와 사냥꾼

식사를 함께하자는 은진을 뿌리치고 여주는 몇 시간째 거리를 헤맸다. PC방이며, 시가지 좁은 골목이며, 요즘 아이들이 갈 만한 곳이란 곳은 전부 찾 아본 것 같은데 역시나 성과가 없다.

제법 먼 동네까지 몇 번이고 돌아보다 결국 집으로 향하는 그녀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역시 난 안 되겠구나."

잘못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다. 납작 엎드리는 것도, 고개를 숙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살아오며 종종 겪은 일이니까.

다만 제 모든 생각이 틀렸다 말을 해야 한다는 건 다른 문제다.

'정말로 그래버리면 그때는.... '

솔직히 지금껏 크게 좋은 선생님이었다고는 못 한다. 제가 원하는 대로 전부 하고 살 수 있다 믿을 만큼 순진하지도 않았다. 부끄럽지만 적당히 학교 와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타협해 사는 것에 익숙해진 지도 오래였다.

그렇지만 선생님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신념만큼은 한 번도 변해본 적이 없다. 갈수록 선생님으로서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들이 줄어들긴 하지만 학교는 여전히 학교다.

마음 놓고 무언가를 배우기만 해도 되는 유일한 공간 아닌가.

부디 아직은 다 자라지 않은 아이들이 세상에 나가기 전, 보다 많은 것들을 경험해보길 바랐다.늘 좋은 일만 일어나진 않겠지만, 그러더라도 훌훌털 고 일어날 수 있는 강한 심지를 얻길 바랐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끓어오르는 화에는 인내심을 배우길 바랐고,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는 용기를 얻길 바 랐다.

그러니까 대부분은 교과서 밖에 있을 그런 감정들을

'여주 넌 참 세상을 몰라.'

라고 한 문장으로 정의 내린다.

꿈꾸는 새와 사냥꾼

긴 시간의 회의를 마치고 호텔의 본관으로 들어서는 정국의 곁에서 윤 비서가 서류를 내밀었다. 어지간한 체력으로는 버티기도 힘든 일정을 이제야 끝마친 정국이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시간이 없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으로 올라가면, 그때부터는 완전한 그만의 시간과 공간이었다.

사업상으로는 '비교적 정중한 신사'의 탈을 쓰고 있지만 정국은 제 것에 대한 결벽증이 있었다. 몸이든 집이든 사람이든,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무엇 이든 그가 그어놓은 선을 넘어서는 순간, 그 후환은 오로지 본인이 감당해야 한다.

거기다 엊그제 학교에 다녀온 이후 무슨 이유인지 정국의 심기가 눈에 띄게 불편해졌다. 아슬아슬한 인내심이 넘치기 직전이라 가능하면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

“통화 기록을 살펴봤는데 유하 도련님께선 가까이 지내는 친구분도 거의 없는 모양입니다. "

"그래도 종종친구분들이 먼저 연락을 하는 모양인데 도련님께서 선을 긋는 건지 그럴 마음이 없으신 건지 그냥 그대로 끝인지라."

"그런 거 말고, 다른 건?"

부스럭.

서류를 넘긴 정국이 본론만 말하라며 냉담한 눈을 들었다. 평소보다 더욱 까칠한 눈매는 역시나 쓸데없이 시간을 빼앗긴 데 대한 불쾌함 때문일 것이 다.

안타까운 마음에 괜히 주절주절했던 윤 비서가 얼른 자세를 바로잡았다.

"마지막 신호가 강릉 쪽에서 잡혔습니다."

"그리고."

"카드 사용도 그 근처 편의점이 다입니다. 아마도 유하 도련님께서는..... "

“됐어."

정국이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보고서를 돌려주었다. 무심히 걸어 나가는 그의 얼굴에 가소롭단 웃음이 더해졌다. 아마 처음부터 유하가 어디에 있을지 짐작하고 있었나 보다.

"겨우 이러자고 이 난리를 쳤다고? 하여튼 어리긴."

"음, 그러면 지금이라도 차를 대기시킬까요? 이참에 같이 가셔서 모셔오는 편이 어떠실지."

"집 나간 놈 모셔오자고 내가 거기까지 가야 하나? 뭘 잘했다고 "

정국이 어림도 없다며 고고한 시선을 들자 윤 비서가 체념한 듯 고개를 숙였다. 사장님께서 그곳까지 직접 가길 바라다니, 제가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일이긴 했다.

꼭 조카에게 무심해서라든가 바빠서만은 아니다. 말은 않지만 정국이 평소 그쪽 방향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조금 있다 보안팀 직원들 보내겠습니다. 최대한 조용히 모셔오라 하지요."

"그러든가."

"아, 그리고 이건 말씀하신 한여주 선생님 이력서입니다."

조카의 행방을 확인하자마자 더욱 거칠 것 없던 그의 세찬 걸음이 로비 중턱에 멈추었다. 손님이며 직원들이며, 은근슬쩍 쏟아지는 눈길 속에 정국이 또 하나의 서류를 받아 들었다.

한여주. 27세.

단정한 증명사진 속 커다란 그녀의 두 눈이 자신과 직접 마주하던 순간과 다를 바 없다. 정국이 사회 초년생 특유의 긴장감으로 가득한 여주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평범하네. "

적어도 정국의 기준에는 그러했다. 제일고에 한국대 코스라, 어찌 보면 그가 자라온 세상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가장 좋은 학교만을 골라 나온 그녀가 제게 했던 말이 어쩐지 더욱 괘씸해졌다.

"난 또. 대단한 독립투사나 되는 줄 알았더니."

"음. 그래도 실력 하나만큼은 다들 입을 모아 칭찬하는 모양입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사진에 멈추어 있던 정국의 눈이 다시금 그녀의 이력서를 훑어나갔다. 명색이 최고의 명문고 선생님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전형적인 이력서였다.

대학원 졸업과 동시에 임용을 합격했다는 점이 특이하긴 했지만 그것 역시 제일고의 정교사가 되는 덴 비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나 이렇게 최고의 학교만 골라온 여자라면.

'보기보다 야심이 꽤 있었던가.'

냉소를 머금고 내려오던 눈이 자기소개의 마지막 문장에서야 멈췄다. 딱히 다른 교사들의 이력서를 살펴본 적은 없지만 대부분은 이렇지 않을 것이다.

*학생들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교사가 되겠습니다. *

처음으로 제가 아는 '그 여자 같은 말'을 발견하자 피식 헛웃음이 흘렀다. 어쩐지 그녀의 수줍은 듯 당돌한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도 같았다.

꼭 목소리뿐만도 아니었다. 제 눈치를 보는 척 할 말을 다 한다든가, 감당도 못 할 거면서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라든가, 공황에 빠진 새처럼 흔들리던 눈이라든가.

꿈꾸는 새와 사냥꾼

이건 비굴한 게 아니야. 더 큰 미래를 위한 용기라구.

엘리베이터에 탄 여주가 거울 속 자신을 향해 수없이 되뇌었다. 사방이 번쩍대는 공간이 부담스럽기 짝이 없으면서도 다리에 힘을 주어 꼿꼿이 섰다.

세상에 이런 곳이 다 있을까 싶은 얼음성 앞에서도 두 눈을 부릅떴다.

그나마 두 번째다 보니 조금 덜 놀라고, 조금 덜 움츠러든다'는 하나를 위안 삼았다.

"그럼 여기까지 오신 용건을 한번 들어볼까요?"

“죄, 죄송해요!"

"...."

아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앞장서 거실로 들어서던 정국이 돌아보기 무섭게 여주의 입에서 자판기 음료처럼 사죄가 튀어나왔다.

이렇게나 빨리?

조금은 의외의 눈빛을 보내는 그에게 바짝 몸이 굳어버렸지만 따지고 보면 원래 하려던 말이기도 했다. 이왕 하는 거, 한 번 더 한다고 나쁠 것도 없다.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려구요."

"뭐가, 말입니까?”

"아...."

천천히 끊는 말과 느릿한 움직임이 더욱 사람의 숨통을 조였다. 정국이 어디 한번 말을 해보라는 듯 그녀의 앞까지 다가서자 여주가 몸 둘 바를 모르 고 냉큼 시선을 내렸다.

"그, 그냥 이렇게 멋대로 찾아온 것도 그렇고......"

"그거야 제가 사과드려야겠죠. 일 때문에 바빠서 연락도 못 드렸으니."

"아뇨, 아뇨. 전혀요!"

"......”

"전 상관없어요. 충분히 이해해요! 그럼요!"

양손까지 마주 잡은 여주의 고개가 격하게 흔들렸다. 마치 이 순간만 기다려온 것처럼 '일에 대한 포용력과 이해심'을 보여주려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일 때문이잖아요. 사람이 일을 하다 보면 원래 꼭 마음대로 되지 않기도 하고, 생각과는 다르게 돌아가기도 하고. 숙부님도 그런 경험 있지 않으실까요?"

“글쎄요.”

없다 말하면 거품 물고 쓰러질 것 같은데.

정국이 나름대로 고심하듯 1인용 소파에 걸터앉아 다리를 교차시켰다. 그녀가 왜 이러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으니 딱히 놀라울 것은 없다. 그럼에도 남의 뻔한 행동이 이렇게 지겹지 않을 수가 있다는 것만큼은 제법 놀라웠다.

하지만 그래봐야 아주 잠시의 흥미일 뿐.

이제껏 그 어떤 것도 그의 시선을 길게 돌려두지 못했으니 이 어설픈 새에게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어디 누가 먼저 질려버릴지, 끝까지 가보자는 것처럼 정국은 그녀를 깊이 응시했다.

"그럼 선생님도 제게 하신 모든 말씀이, 결국 일 때문이셨겠군요."

"아…?“

불안정하던 여주의 시선이 사로잡히듯 정국을 마주했다. 두 눈이 온전히 마주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들릴 듯 말 듯, 무언가를 외는 것처럼 중 얼거리는 그녀의 붉은 입술이 괜히 남자의 인내심을 자극했다.

"대답이 없으시다면,”

“아, 아뇨. 일 때문이 아니라...... 일을 제대로 못 한 거겠지요."

".... ?"

"그날 제가 조금 더 선생님답게 제일고 방침에 따랐어야 했는데, 마음만 앞서 숙부님 심려를 끼쳐드린 것 같아요.”

이번엔 미리 준비한 말도 아닌 듯했다. 그의 재촉에 급하게 시작된 그녀의 말은 갈수록 차분함을 되찾았다. 점점 더 울적해지는 표정은 어쩔 수가 없 겠지만 나름대로 그에게 사과를 하고 싶은 마음 만큼은 분명했다.

정국은 그녀를 말없이 쳐다보며 재밌다는 듯이 숨을 크게 코로 내쉬며 한 쪽 다리를 꼬았다 .

글쎄, 과연.

“그래서요?”

꿈꾸는 새가 한 마리 더 있었다

허튼 날갯짓 따위나 하는,

무식한건지, 용감한건지.

아니, 꽤나 대범한건가.


*본 빙의글은 카카오페이지 ‘윈터 심포니’를 일부 각색 및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