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énus

Écraser



* 이 작품은 𝐖𝐎𝐑𝐓𝐇 𝐈𝐓 𝐂𝐎𝐌𝐏𝐀𝐍𝐘 크루 미션에 의해 진행되는 작품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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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ush








짝사랑, 혹은 일방적인 사랑. 나는 21년 인생 3번째 짝사랑을 경험 중이다. 이미 짝사랑 경험이 있는 나는 짝사랑이 얼마나 비통한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게 그렇듯 내가 제지할 수 없었다.

나와 정국은 꽤나 특별한 결연으로 만났다. 으레 인기가 많았던 정국과 평범히 데생을 하던 나. 물론 나 또한 정국에게 호감이 있었다. 초연한 얼굴과 무던한 성격의 남자를 어느 여자가 안 좋아하겠는가. 하지만 평범했던 나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을 걸 알았기에 가만히 있었다.

운이 퍽 좋았던 나는 우연찮게 정국과 짝이 되었고, 정국은 아무 말 없이 데생을 하고 있는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렇게 우리의 관계는 점진적이었고, 조속히 가까운 사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필경 정국을 사랑하게 되었다. 물론 티를 내지 않은 채 친구처럼 행동하기 일쑤였지만.

미술에 관심이 많던 나는 결국 미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반면 체육에 관심이 많던 정국은 체대에 들어갔고, 우리는 접점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전갈을 묻기 전에 정국이 먼저 연락을 해왔다. 주변에 친구도 많은 정국이 나에게 계속 연락을 해댄다는 게 의아해 정국에게 물었다.

“왜 자꾸 나한테 연락해?”

“네가 편하니까.”

그 후로도 정국과 나는 만남이 잦았다. 그럴수록 내 마음은 더욱 커져 정국의 마음을 얻기 위해 열의를 다했다. 사랑에 염원했지만 정국은 내 마음을 모르는 듯했다. 그래서 그런지 마뜩잖게도 정국은 나에게 연애 상담을 많이 해왔다. 그럴 때마다 대답을 회피했지만,에는 마음은 어쩔 수 없어 술에 의지를 많이 했다.

나는 항상 가던 포차에 가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미술에만 집중하느라 친구가 정국밖에 없던 나는 필경 혼자였다. 술을 마실 때마다 상념이 스쳐갔다. 한참 술이 들어가 몽롱해질 때쯤, 정국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뭐해, 바빠?”

“안 바빠… 왜 전화했어?”

애달프게 이 순간에도 정국의 목소리가 들리니 심장이 떨려왔다. 전화 너머에서는 해사한 정국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웃음소리. 하지만 그 웃음이 나에게는 불행이라는걸, 나는 몰랐다.

“나 곧 여자친구 생길 것 같아.”

그 말을 듣자 떨리던 심장은 절벽 아래로 떨어진 듯했다. 평소 의연한 나도 비통해져 눈물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정국이 나에게 무슨 말을 했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하사의 말을 남겨야 하지만 눈의 초점도 사라진 채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오늘따라 눈물이 더욱 뜨겁게 느껴졌다. 나는 실의해 정국의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었다.

그 후로 알싸한 알코올이 눈물과 섞여 목구멍을 통해 들어갔다. 평소 쓰던 알코올이 오늘은 퍽 달게 느껴졌다. 원래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황량한 내 마음을 알코올이 쓸어내려주는 기분이었다.

이미 주량을 넘긴지는 오래였다. 술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오늘만은 술에게 의지하고 싶었다. 따로 의지할 곳이 없으니까, 나는 항상 혼자였으니까. 이제 내 곁에 정국도 없을 것이다. 여자친구가 생긴다면 나는 뒷전일 테니. 나는 이제 어떡하지, 정국이 없으면 나는 안 되는데 생각하면서도 정국을 내외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나는 점점 절망의 심연으로 빠지고 있었다. 사랑이 이리도 무서운 건지 처음 알았다. 사랑에만 일념 했는데, 그게 문제였던 것일까. 지금까지 아무리 침통해도 실의한 적은 없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관철했다.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정국도 언젠가는 내 마음을 알아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나는 결국 그날 술에 완전히 취할 때까지 마셨다.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정국을 만날 용기가 사라졌다. 나는 결국 정국의 연락을 전부 무시한 채 내 할 일에만 집중했다. 그래야 정국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야 내 마음이 쓰리지 않을 것 같아서. 세상에 홀로 외로이 있는 이 기분이, 조금은 사그라들어서.

그러다 나도 모르게 정국이 보낸 문자를 봐버렸다. 내가 내외했던 노력들이 모두 물거품 되는 순간이었다. 이미 본 이상 무시할 수도 없어 나는 결국 정국에게 오랜만에 답장했다. 위로 올려보니 내가 무시한 정국의 연락들이 수두룩하니 쌓여있었다.

쌓여있는 문자들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미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결국 정국을 만나지 않으려 오랜만에 하는 답장조차 거짓을 적었다. 나는 공원 벤치에 앉아 애꿎은 돌만 차고 있었지만, 정국에게는 집이라 둘러댔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반응과는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정국의 대화창에는 ‘거짓말.’이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공원이 집인가 봐?”

내 앞에 보이는 건 다름 아닌 전정국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정국의 얼굴에 눈시울이 붉어지며 코가 시큰해졌지만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억지로 참았다. 내 귀에는 커플들이 하는 대화가 꽂혔다. 나는 짝사랑에 심장이 옥죄는 기분인데, 서로 사랑하는 기분은 어떨까. 지금 내 앞에 있는 정국과 연인이고 싶었다. 나 혼자만의 사랑이 아닌, 서로 사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대답 좀 해, 고개만 숙이고 있지 말고.”

“… 아, 미안해.”

“너 요새 나 피하지? 연락도 안 보고.”

“… 그냥, 바빠서 그랬어.”

“너 아무리 바빠도 내 연락 봤잖아, 몇 시간이 지나도 봤는데… 요즘은 며칠이 지나도 안 봤어.”

나는 정국의 말에 목이 막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도 변명이라는 걸 잘 알았다. 내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니 정국은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쓸어 넘겼으며, 나는 격노한 정국의 눈치만 보기 바빴다.

“너도 할 말 없지?”

정국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화살이 되어 내 심장에 정통으로 찔려 들어갔다. 시끌벅적하게 사람이 많은 공원은 우리 주위만 정적이 흘렀다. 얼음장처럼 차갑고 냉혹한 공기였다. 결국 내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바닥으로 하나 둘 떨어졌다.

감정이 좀처럼 주체되지 않았다. 정국의 앞에서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내가 아무 말 하지 않고 눈물만 흘리니 정국도 적잖이 당황한 듯 보였다. 정국은 결국 무릎을 꿇어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주머니에 들어있는 핸드크림을 만지작거렸다. 그 핸드크림은 정국이 선물해 준 것이었다. 아무 말 않던 나는 통탄스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정국에게 핸드크림을 건네었다.

“… 이걸 왜 줘?”

“나중에 문제 될까 봐. 네 미래 여자친구가 오해라도 하면 어떡해.”

정국은 헛웃음을 지은 후 내 손에 들려있는 핸드크림을 받아 다시 내 주머니로 넣어주었다. 그의 행동에 나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모든 게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정국은 소리 없이 얼굴을 가린 채 우는 나를 조심스레 안아주었다. 으레 심장이 떨려왔다. 그의 행동으로 인해 눈물이 멈췄으며, 그저 내 심장 소리가 귀를 때릴 뿐이었다. 눈물을 그친 채 훌쩍이는 나를 보고는 나에게서 멀어지는 정국이었다.

“갑자기 울어서 놀랐잖아, 조금 진정됐어?”

“… 응, 미안.”

꽤나 이기적이었다, 내 감정은. 정국이 나를 좋아해 안은 것이 아니기에 금방 떨어지는 것이 맞았는데, 결연했다. 나는 그런 마음을 뒤로 한 채 정국에게 말했다.

“우리… 이제 만나는 일 없도록 하자.”

정국은 적잖이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횡설수설하며 말했지만 결국은 더 이상 만나지 말자는 얘기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너… 요즘 이상해, 무슨 일 있어?”

“왜 만나지 말자는 건데, 너… 나랑 이대로 끝내도 괜찮아?”

전혀 괜찮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별을 고하는 거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을 스스로 밀어내는데, 마음이 찢어지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이곳에서 행복한 사람은 없었다. 나는 안일하고도 이기적이었다.

“우리가 무슨 사이도 아니었잖아.”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계속 내뱉었다. 어쩌면 울분이 터진 것일지도 모른다. 또다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눈물은 내가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걸 뜻했다. 나도 정국과 인연을 이어가고 싶었다. 어쩌면 누구보다 그 마음이 강했다.

“나만 기대했던 거구나, 나만 그랬던 거야… 나만.”

정국은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국의 표정은 착잡해 보였다. 해사한 정국의 표정을 보고 싶었지만, 나는 그럴 자격도 없었다. 정국의 마음을 고려하지 않은 채 오로지 나를 위해 밀어내고만 있었으니까.

“그게 정말 네 진심이라면, 그렇게 해줄게.”

“근데… 거짓으로 나를 밀어내는 거라면 그만둬.”

“진짜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있잖아.”

“그만 만나자는 말 말고, 진짜 네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해줘.”

정국은 이미 나의 마음을 안다는 듯이 말했다. 마치 좋아한다는 말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아무리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해도 내 안에 있는 말은 하고 싶었다. 어쩌면 나도 기대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 좋아해, 이게 내 진심이야 정국아.”

“이 말이 듣고 싶었어, 나도 너 좋아하니까.”

5년의 짝사랑, 이제서야 막을 내렸다. 어리석은 내 판단 때문에 멀어질 뻔했던 기회를 정국이 잡아주었다. 정국 또한 나에게 처음부터 마음이 있었다고 했다. 필경 우리는 짝사랑을 끝내고 연인이 되었다.

시작은 미약할지 언정 끝은 창대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