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찬 빙의글/나페스] 김부장

김부장 1화

서울.

국내 굴지의 기업, 에이든(Aiden) 브랜드전략본부.

오늘도 회의실은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프로젝터 화면이 꺼지고,

맨 앞에 서 있던 여자가 서류를 덮었다.

브랜드전략팀 김부장.

입사 10년 만에 최연소 부장이 된 인물.

실적 하나만으로 지금 자리까지 올라온 사람이었다.

 

"이번 하반기 메인 캠페인은 일정 변경 없습니다."

담담한 목소리.

"이미 세 번 밀렸습니다."

직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일정이 바뀌면 손해는 회사가 봅니다."

잠시 침묵.

"저는 일에 피해 주는 사람을 제일 싫어합니다."

회의실 공기가 단번에 차가워졌다.

"상대가 누구든 예외 없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회의는 종료됐다.

직원들이 하나둘 회의실을 빠져나간다.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번 모델이 해찬 아니야?"

"맞아."

"첫 미팅부터 분위기 장난 아니겠는데."

 

 

-

 

 

같은 시각.

지하주차장.

검은 밴 한 대가 급하게 멈춰 섰다.

"죄송합니다!"

매니저가 먼저 뛰어나왔다.

"길이 너무 막혀서...."

 

그 뒤를 따라 모자를 푹 눌러쓴 해찬이 내렸다.

"형, 뛰어요."

"아니 네가 왜 이렇게 침착한데!"

"이미 늦었잖아요."

해찬은 씩 웃었다.

"혼나면 되죠."

"..."

"죄송하다고 하면 되는 거고."

그러곤 엘리베이터로 뛰어갔다.

 

-

 

 

촬영장.

모든 스태프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모델 도착했습니다!"

문이 열리자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

"죄송합니다."

해찬은 허리를 깊게 숙였다.

"늦었습니다."

변명은 없었다.

그 모습을 보던 김부장이 천천히 다가왔다.

두 사람의 첫 대면.

"..."

"..."

해찬은 먼저 웃었다.

"안녕하세요."

김부장은 파일 하나를 건넸다.

"촬영 순서입니다."

"네."

"다음부터는 시간을 지켜주세요."

짧고 단호한 말.

해찬은 잠깐 그녀를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걸로 끝이었다.

김부장은 의외라는 표정을 아주 잠깐 지었다.

'핑계는 안 대네.'

 

 

-

 

 

"좋습니다!"

"컷!"

촬영이 시작되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카메라 앞에 선 해찬은 방금 전 사람과 전혀 달랐다.

한 컷.

두 컷.

모니터를 확인하던 포토그래퍼가 감탄했다.

"역시."

 

"오케이."

"이 컷 그대로 갑시다."

스태프들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부장은 모니터를 보며 메모만 남겼다.

'표현력 좋고.'

'디렉션 이해 빠르고.'

'프로네.'

인정은 인정이었다.

 

촬영이 마무리될 즈음.

"김부장님."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해찬이었다.

손에는 아이스커피 두 잔이 들려 있었다.

"커피 드세요."

"괜찮습니다."

"오늘 한 잔도 안 드셨던데."

"..."

"계속 회의만 하시던데요."

김부장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절 보고 계셨습니까?"

"아뇨."

해찬은 웃으며 말했다.

"그냥 지나가다가 봤어요."

"..."

"안 드시면 제가 두 잔 다 마셔야겠네요."

김부장은 한참 커피를 바라보다 결국 하나를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오."

해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받으실 줄 몰랐는데."

"버리기 아까워서 받은 겁니다."

"그럼 다행이네요."

싱긋 웃는 얼굴.

괜히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미소였다.

 

-

 

 

저녁 9시.

브랜드전략팀 사무실.

불이 켜진 자리도 이제 몇 개 남지 않았다.

김부장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수정안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때.

똑똑.

"들어오세요."

문이 열렸다.

"...?"

해찬이었다.

"휴대폰 두고 가서요."

테이블 위 휴대폰을 챙긴 그는 그대로 나가려다 멈춰 섰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김부장님."

"...네."

"오늘도 밥 못 드셨죠?"

김부장은 손을 멈췄다.

"..."

"눈 밑이 아까보다 더 진해졌어요."

"..."

"일도 좋지만 밥은 드셔야죠."

잠시 침묵.

해찬은 괜히 머쓱하게 웃었다.

"괜한 오지랖이었으면 죄송합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문이 닫혔다.

사무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김부장은 모니터를 바라보다 말고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뭐지.'

'처음 본 사람인데.'

'왜 저렇게 남 컨디션을 잘 보지?'

이상한 사람이었다.

분명 장난스러워 보였는데.

말 한마디는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

 

 

다음 날 아침.

본사 로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

닫히던 문 사이로 해찬이 뛰어 들어왔다.

"살았다."

숨을 고르던 해찬은 옆을 보더니 활짝 웃었다.

"어."

"김부장님."

"..."

"오늘은 커피 드셨어요?"

김부장은 정면만 바라본 채 대답했다.

"아직입니다."

"그럼."

해찬이 씨익 웃었다.

"오늘은 제가 안 물어봐도 챙겨 드실 거죠?"

"..."

"안 그러면 또 제가 사와야 하잖아요."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직원들이 슬쩍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김부장은 아무 말 없이 층 버튼만 눌렀다.

그 모습을 보던 해찬은 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벽이 높네."

김부장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도 모르는 사이.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가려는 걸,

애써 눌러 내리고 있었다.

그날 이후.

브랜드전략팀 사람들은 하나둘 이상한 광경을 보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가장 차가운 김부장에게,

매일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거는 유일한 사람이 생겼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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