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a Bertahan Hidup Sebagai Figuran

- 작가가 조금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썼습니다.

- 대체 무슨 글인지 작가도 모릅니다.

- 왜 썼는지 작가도 모릅니다.

- 클리셰 덩어리입니다.

- 가볍게 읽어주세요... 어차피 개연성 개나 준 엉망진창인 글입니다...

-TRIGGER WARNING! 2010년대 초에 유행하던 인터넷 소설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폭력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엑스트라로 살아남는 법

: 어느 날 소설 속 엑스트라가 되어버렸습니다.

W. 그쁨





그날 이후, (나 혼자만)마음 졸이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누군가가 날 쳐다보고 있다'라는 사실만 알았을 땐 그나마 '그게 주인공은 아니겠지'라며 정신승리라도 할 수 있었지, 그 '누군가'가 진짜 남주인공 중 하나인 박지민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며 그냥저냥 넘어갈 수가 없는 것이었다. 수업 시간이든, 쉬는 시간이든, 이제는 익숙한 그 시선이 느껴졌다 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고 저절로 몸이 뻣뻣해졌다. 거부반응임에 틀림이 없었다. 한낱 분량 없는 엑스트라에게 주인공이 과한 관심을 가진다? 이건 위험하다. 엑스트라로서 존재감이 0에 수렴하는, 아주아주 만족스럽게 이어지고 있던 내 행복한 나날들이 위험했다. 삐용삐용, 머릿속에서 요란한 경고음을 보낼 정도로.

'…어떡하지?'

그렇다고 딱히 이 상황을 타개할만한 기막힌 묘수가 떠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아니, 그냥 소설 줄거리 흘러가는 거 좀 구경하면서 느긋하게 살겠다는데, 그거 하나 들어주는 게 그렇게 어렵나? 응? 스멀스멀 억울함이 밀려 올라왔다. 얼굴이 울상으로 변해갔다. 옆에서 종알거리던 이유진이 내 표정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연주야, 무슨 일 있어?

"아무것도 아니야…."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일을 네게 말해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겠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자, 이유진이 안절부절못하다가 내 등을 쓸어주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힘내…! 그 와중에도 말투가 참 작위적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상황이 꽤 절망적이라고 해도 앵무새처럼 '좆됐다'만 반복하며 절망에 빠져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공기와 비슷할 정도인 내 존재감을 어딘가로 끌어내려 하는 박지민을 막아야만 할 이유가 있다. 늘 말했던 그거, 엑스트라로서 소설의 완결까지 주인공들과 엮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지금 행할 수 있는 방법 몇 가지를 떠올려 보았다. 하나, 박지민을 불러내고 왜 자꾸 쳐다보는지 대놓고 이유를 묻는다. 당연히 기각. 미쳤다고 그런 짓을 할 바에야 혀를 깨물고 이 소설에서 탈출하고 말지. 둘, 주변인을 이용해 박지민이 날 쳐다보는 이유를 알아낸다. 이것도 기각. 애초에 이 소설에서 내 주변 인물이 '이유진' 하나라는 점에서부터 글러먹었다. 이유진에게 '요즘 박지민이 날 쳐다보는 것 같은데 이유를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순간, 네 남정네들의 열렬한 팬인 이유진은 격한 반응을 내보이고도 남을 것이다. 평소엔 무겁던 이유진의 입도 B4에 관해서라면 무슨 솜털마냥 가벼워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유진에게 박지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다음 날 전교에 내 이야기가 쫙 퍼져있는 거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절대 안 될 말이지, 기각. 아무튼 셋, 박지민을 '몰래' 불러내서 이유를 묻는다. 당연히 불가능하다. 저 정도 되는 인기남이라면 박지민을 매분 매초 관찰하고 있는 시선이 한둘이 아닐 텐데, 몰래가 몰래가 아니게 될 가능성이 너무 컸다. 으, 생각해 보니까 좀 소름 돋네. 아무튼 기각.

이렇게 된 이상 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남지 않는다. 넷,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무시한다. 사실 이 방법도 완전히 안전한 방법이라고 할 순 없었다. 전에 말했듯이, '날 이렇게 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같은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기 딱 좋은 선택지가 바로 이 네 번째 선택지니까.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날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을 사람들에게 한마디 하겠다. 여기는 '소설' 속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어쨌든,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나는 망설임 없이 네 번째 선택지를 골랐다. 이유는 대충이라도 알 거라 믿는다. 앞선 세 가지의 방법을 따르는 것보다는 차라리 네 번째 방법을 선택하는 게 차라리 낫다는 것을.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방법이 꽤 효과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박지민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도 안 느껴지는 척, 이따금 눈이 마주치더라도 물 흐르듯이 자연스레 시선 피하기, 박지민이 있는 곳은 최대한 피해 가기, 설령 그게 멀리 돌아가는 길이더라도! 엑스트라로서의 기본 소양을 아주 충실하게 수행한 결과, 나를 향해있던 박지민의 시선이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이대로 아주 사라져버려라. 그렇게 나는 박지민의 시선을 무시로 일관하며 버텼다. 박지민의 시선이 완전히 떨어져 나갈 때까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은 훅훅 지나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연주야, 우리 영어 시험범위 3단원까지 맞아? 여기 본문까진가?"

"…어? 시험?"

"응? 중간고사 말이야!"

"…어?"

"일주일 뒤가 중간고사잖아, 왜 그래? 처음 듣는 사람처럼?"

…존나 망한 것 같다.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뭐, 24년을 살면서 나는 내가 공부에 연을 두고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중학생일 때도, 고등학생일 때도, 심지어 대학생이 된 뒤에도 그렇게 성적에 연연해본 적이 없었다. 나에게 시험 기간이란 늘 벼락치기와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아 그래, 쓸데없는 서론 다 집어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난 단지 소설 속 엑스트라로 빙의한 것뿐이었지만, 누가 K-고등학생 시절을 타파해온 사람 아니랄까 봐 시험 기간에는 그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벼락 치기를 했다. 다시 말해, 박지민이고 뭐고 그깟 시선 따위 보다 내 발등에 떨어진 중간고사라는 불을 끄는 게 더 급했다는 뜻이다.

"…there is nothing naturally sad about…, …뭐라는 거야?"

이 소설의 작가가 생각보다 컨셉에 진심이었는지, 한낱 엑스트라에 불과한 내 방에도 갖가지 문제집과 참고서들이 자리 잡고 있어서 굳이 문제집을 사러 서점까지 나갈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현실 반영이 이런 건가? 내가 공부할 때 쓰곤 하던 스톱워치라던가, 내 취향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형광펜도 집에 죄다 있었다. 조금 소름이 돋긴 했다. 내 취향은 어떻게 알고…. 뭐,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나름 공부를 해보겠다며 책상에 앉은 것 까지는 좋았는데, 문제가 있다면 당최 무슨 소린지 알아먹을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하긴, 원래의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5년이 넘었는데, 어떻게 고등학교 때의 지식이 완전히 들어있겠어. 진짜 망했네. 외국에 나가서 절대 쓸 일이 없을 것만 같은, 실용적이지 못한 영어 단어들을 외우며 나는 생각했다.

그래도 내 머리가 아예 깡통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 모양인지, 책과 문제집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문제집 한 면에 7문제가 있다 치면, 공부하기 전에는 5문제를 틀리던 것을 1~2문제만 틀릴 정도로 수준을 끌어올렸다. 뿌듯함이 밀려왔다. 잠깐, 벼락치기 한 반에 이 정도 성과를 내다니, 혹시 난 천재가 아닐까?

"엄마,"

"왜?"

"나 이번에는 의대 갈 수 있을 것 같아."

진짜로.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한 말인데도 엄마는 헛소리 말고 밥이나 처먹으라며 숟가락으로 내 이마를 후려쳤다. 아파서 눈물이 핑 돌았다. 뭐 깨지는 소리 난 것 같은데? 얼얼한 이마를 부여잡고 부루퉁한 표정으로 밥을 퍼먹었다. 진짜 이대로면 전교권에 드는 거 쌉가능일거 같은데. 꾸역꾸역 밥을 밀어 넣고 다시 앉은 책상에서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하, 우리 학교 전교 1등이 김석진이구나."

남주 후보들 중 한 명. 그 사실을 떠올린 순간 나는 대번 문제집을 덮고는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성적 가지고 남주 후보랑 엎치락뒤치락하다 관심받을 바에야, 깔끔히 의대를 포기하고 말지. 엄마가 들었으면 경을 칠 생각을 하며 나는 침대 위를 굴러다녔다. 그래, 입학시험 때는 평범한 성적이었던 애가 갑자기 전교권에서 놀면 얼마나 관심받겠어? 내 목표는 오직 가늘고 길게,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고 소설의 완결까지 엑스트라로 남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벼락치기마저도 손에서 놓아버리고 말았다. 아무튼 그랬다. 절대 공부하기 싫어서 김석진의 핑계를 댄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응, 그렇고말고.





📗 📘 📕





그래도 대학생 체면이 있지, 전교권에서 놀지는 못하더라도 성적이 바닥에 붙어있는 꼴은 피하고 싶었기에 나는 적당히 문제집과 교과서를 몇 번 훑어보는 정도의 공부는 계속했다. 말 그대로 적당히. 덕분에 중간고사에서도 나름 괜찮다 생각하는 성적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성적표를 집에 가져간 날 엄마한테 등짝을 더 얻어맞기는 했다. 의대는 무슨 의대! 턱도 없다며 등짝을 후려치더라. 아닌 척해도 은근 기대하고 있었나 보다. 불효녀라 미안해 엄마….

아무튼, 폭풍 같던 중간고사가 끝나고 며칠이 지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나를 향해 끈질기게 달라붙던 시선이 사라졌다. 시험 기간이라고 정신을 빼놓고 다녔더니만 시선이 사라진 줄도 몰랐더랬다. 거머리처럼 달라붙던 시선이 없어지고 나니 속이 다 시원했다. 내가 바라던 조용한 엑스트라로서의 삶이 돌아왔다! 만족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체육 강당이래 연주야. 체육복 가져왔어?"

"응응, 있어. 날 더운데 자습이나 하지…."

"그래도 체육 재미있지 않아? 몸 움직이니까 잠도 깨고, 무엇보다-,"

B4가 운동하는 것도 볼 수 있고…! 내가 그 말 할 줄 알았지. 이유진이 눈을 반짝이며 하는 말에 나는 그래, 그래-, 하는 성의 없는 대답을 하며 교복 블라우스를 벗었다. 흰 반팔 위에 그대로 체육복을 덧입고는 치마 아래로 단번에 체육복 바지를 끌어올렸다. 처음 체육복을 갈아입을 땐 혹시나 다른 애들이 이상하게 볼까 봐 꼬박꼬박 화장실에서 갈아입는 수고로움을 감수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 소설에 현실 패치가 꽤 많이 되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여자애들이 체육복 바지를 입을 때 치마 밑으로 체육복을 입고 치마를 벗는다던가 하는 것들 말이다.

"오늘도 발야구하려나?"

"글쎄…, 발야구 아니면 피구 아닐까?"

"또? 에이-, 너무 많이 해서 이제 재미없는데…."

그냥 앉아서 축구하는 거 구경이나 하고 싶다! 사심이 잔뜩 들어간 말을 종알종알 뱉어내는 이유진과 강당으로 걸어갔다.

"앗, 지민아! 너 썬크림 덜 발렸어!"

"…여기?"

"아니! 조금 더 오른쪽…, 앗, 거기 아닌데…!"

"어딘데."

"거기보다 쪼금 밑에…,"

"그냥 네가 발라줘."

염병…. 강당으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표정이 무참히 일그러지려는 것을 겨우 막았다. 아오, 오늘이 체육관 씬이었어? 하필이면 얼마 전까지 내 신경을 건드리던 박지민에 관한 장면이었다 혹시나 눈이 마주치는 불상사가 또 일어나는 것 아닐까 하는 마음 반, 설렘이라곤 느껴지질 않는 로맨틱한 장면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기 위한 마음 반. 여주의 손이 박지민의 얼굴로 향하는 것을 보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

체육관 구석탱이에 쭈그려앉아 이유진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저 멀리서부터 체육 선생이 껄렁껄렁한 걸음으로 느긋하게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체육 왔다, 하며 일사불란하게 집합하는 모습을 보다 나도 몸을 일으켰다. 가자, 체육 왔대. 하며 이유진을 일으켜 세운 뒤 느릿한 걸음으로 반 아이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차피 또 여자는 피구, 남자는 축구겠지 뭐…. 적당히 죽고 나갈 생각을 하며 체육 쌤이 부르는 출석번호에 맞춰 네-, 하는 대답을 했다. 하지만 내 예상은 출석부를 탁, 닫고는 입을 여는 체육 쌤의 말 한마디에 와장창, 박살 나버렸다.

"오늘은 짝피구 할 거니까 남녀 한 쌍으로 짝 만들어라-,"

"이쪽에 남자, 이쪽에 여자! 출석번호 순대로 줄 서고!"

…체육관에 들어서자마자 소설 장면이 보일 때부터 예상했어야 했는데. 아마도 오늘 진행될 소설의 장면은 짝피구인 듯 했다. 아니고서야 수업에 관심도 없고 열정도 없는 체육쌤이 난데없이 짝피구란 종목을 들고 올 리가 없었으니까. 전처럼 공이나 던져주고 지는 에어컨 밑에서 꾸벅꾸벅 졸기나 했겠지.

체육쌤의 말에 혹시 네 남주 후보들과 짝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품은 여자애들이 저들의 출석번호와 남주 후보들의 출석번호를 헤아리며 걸음을 옮겼다. 물론 이유진도 그 여자애들 중 하나였다. 다들 행복 회로를 돌리며 남주 후보들과 짝이 되기 위해 머리를 열심히 굴려보는 애들 옆에서 나도 슬쩍 머리를 굴려 내 출석번호를 확인했다. 왜? 혹시 남주 후보들 중 하나와 짝이 되는 불상사가 일어날까 봐. 여주의 출석번호가 7번, 내가 8번. 나머지 애들이…. 생존을 위해 알아두었던 남주 후보들의 출석번호를 하나하나 곱씹어 보던 나는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웃음 지을 수 있었다. 역시, 아직까진 분량이 0에 가까운 엑스트라로 남아있는데 성공했구나! 여주의 뒤에 서 있는 내 옆으로 다가오는 출석번호 22번 남학생을 보며 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었다. 그는 당연히 남주인공 후보들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남학생이었다,

"앗, 석진이 네가 내 짝이야?"

"응, 잘 부탁해 여주야."

여주의 짝은 김석진이었다. 이럴 줄 알았지. 여주인공이 남주인공 후보와 엮이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 짝이 아니라면, 짝피구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뭐 아무튼, 체육 선생의 지도 아래 갈라진 팀은 대충 김석진, 김여주, 박지민이 한 팀, 그리고 김태형과 전정국이 상대팀이었다. 나? 나는 여주와 같은 팀이었다.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지만. 아무튼 그렇게 짝피구가 시작되었고, 이름도 모르는 출석번호 22번 남학생의 뒤를 얌전히 쫓아다니던 나는-,

"…엌!"

첫 번째로 아웃당했다. 나름 운동신경 꽤 있다고 자부하고 살았는데, 개뿔이었나 보다. 괜찮냐고 물어오는 출석번호 22번 남학생에게 괜찮다는 대답을 해준 뒤 나는 느릿느릿 외야로 빠져나갔다.

"야!! 이쪽, 이쪽!! 패스해!!"

"너 아웃! 방금 팔 스쳤어!"

"야야야야야, 뒤로, 뒤로 가! 공 뺏겼다!"

"잡아, 잡아!"

뭐, 외야로 나간 뒤부터 나는 한 발짝 뒤에서 주인공들의 피구 경기를 구경했다. 어차피 내가 외야에 있다 해서 나한테 공이 오는 것도 아니고, 해봤자 이따금 내 쪽으로 오는 공을 주워 운동신경이 뛰어난 다른 애들에게 공을 주는 게 전부였다. 이 정도면 관전이라고 봐도 되지.

"야 김태형! 이쪽으로 패스!"

관전이라 해봤자 시선을 잡아끄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기에,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의 주인공들 말이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건 전정국이었다. 아주 날아다닌다. 쟤는 얼굴도 잘났고, 성격도 (상대적 기준이긴 하지만)서글서글하다고 하고, 거기다 운동신경도 특출났다. 여자애들이 환장할만하네. 실제로 지금도 전정국의 뒤에 꼭 달라붙어있는 전정국의 짝만 봐도 뭐…. 얼굴 터지겠다, 곧. 아무튼, 전정국의 반대편 코트에 있던 아이들이 우후죽순으로 아웃당하는 것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와, 진작 아웃당해서 다행이다.

전정국이 아무리 날아다닌다고 한들, 짝피구는 원래 뒤에 숨어있는 여학생을 맞추면 되는 게임이다. 김석진이 전정국이 던진 공을 받아 재빠르게 전정국의 짝이던 여학생을 맞췄다. 아쉬운 소리를 내며 전정국이 넘어진 여학생을 일으켜 세워 외야로 나갔다. 김석진 쟤는 전정국보다 더하다. 얼굴도 잘났고, 성격도 괜찮고, 운동도 잘하는데 공부도 잘한다. 작가는 무슨 생각으로 주인공들을 싹 다 사기 캐로 만들었을까? 누가 클리셰 집합체 아니랄까 봐 밸런스라는 게 존재하질 않았다. 으휴.

"연주야-!"

"유진아, 아웃당했어?"

"으응, 헤헤."

꽤 오래 남아있던 이유진마저 아웃당해 외야로 나왔다. 상대방을 쓸어버리다시피하던 전정국이 아웃당하고 나니 의외로 두 팀 다 막상막하의 실력을 보이고 있었다. 경기가 슬슬 길어질 것 같아 나는 외야에서도 가장 구석탱이에 쪼그려앉아 경기를 구경했다.

"……."

근데…, 소설 장면 치고는 너무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무섭게 여주를 향해 공이 날아갔다. 김석진이 팔로 막지 않았더라면 얼굴을 맞을법한 위치였다.

"…으음,"

"…어째, 공이 자꾸 한쪽으로만 날아가는 것 같다?"

내 말에 이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 그대로 공이 자꾸 한쪽으로만 몰리고 있었다. 여주에게로.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중앙선과 가까이에 있는 여자애가 아닌 엔드라인 가까이 있던 여주에게로 굳이 공을 던진다거나, 머리를 노린 것 같은 교묘한 위치에 자꾸만 공이 날아간다거나. 다행히 여주가 피구 공에 맞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김석진이 그만큼 여주에게 날아오는 공을 잘 쳐냈기 때문이기도 하고, 여주가 생각보다 날랜 탓도 있었다.

전정국이 있던 팀, 그러니까 김석진의 상대팀에 있던 여자애가 공을 던졌다. 또 여주에게로 공이 향했다. 이쯤 되니 김석진도 경기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표정을 굳히곤 공을 던진 여자아이를 쳐다보았다. 제가 한 행동에 찔리는 것이라도 있는 것 마냥 김석진의 시선을 피하는 여자아이였다. 이름이 뭐였더라, 강혜미였나? 아무튼, 그가 김여주에게 그다지 좋지 못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얼마나 싫었으면 남주 후보들이 다 있는 짝피구 자리에서 여주를 노리겠어?

"혜미 말이야… 아까부터 여주한테만 계속 공 던지고 있지? 그것도 머리 쪽으로 자꾸…."

"그런 것 같아."

"저러다 여주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혜미는 갑자기 왜 저럴까?"

"…?"

나는 이유진을 보며 눈을 끔뻑였다. 초조한 듯 발을 동동 굴러대며 경기를 지켜보던 이유진이 나를 보더니 왜?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냥…. 하며 나는 말꼬리를 늘렸다.

"…너 김여주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으응?"

"왜 학기 초에, 네가, 음…."

"아아, 여주 뒷담 까다가 태형이한테 한소리 들었던 거 말하는 거지?"

혹시나 이유진에겐 떠올리기 싫은 기억 중 하나일까 봐 말을 아꼈건만, 그런 기색이라곤 하나도 없이 되려 그날의 일을 꺼내는 이유진이었다.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맞노라 대답했다. 그때, 김여주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하길래 난 네가 김여주 싫어하는 줄 알았어. 내 말에 이유진이 머쓱한 듯 눈가를 긁적이며 말했다.

"실은, 그때 여주한테 싫은 감정이 있었던 건 기억이 나는데, 그게 왜인지는 모르겠어. 난 중학교 때도 여주랑 그럭저럭 잘 지냈거든."

"잘 지냈다고?"

"응, 인사 정도는 하고 지냈어. 여주에 대해 별로 나쁜 기억도 없는데, 되려 착한 애였는데…. 진짜 그땐 왜 그랬지? 뭐에 홀린 것처럼 막, 여주가 괜히 미워지고 그랬었는데…. 물론 지금은 아니야! 여주 진짜 괜찮은 애라고 생각해!"

"으음…, 그랬구나."

본능적으로 이유진이 여주를 미워했던 이유가 '역할'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 속에서 이유진의 역할은 나와 같은 엑스트라, 그것도 반짝 등장했다 금방 잊혀지는 악역 엑스트라였다. 잠시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을 빛내기 위한 도구로 쓰일 뿐인 엑스트라에게 서사가 필요하겠는가? 본인도 모르는 새 여주인공을 미워하게 된 것일 테다. 왜냐면 작가가 그렇게 설정했을 테니까. 또다시 여주를 향해 공을 던지는 강혜미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쟤도 이유진과 같은 이유로 여주를 미워하게 된 걸까?

잠깐 한눈판 새 경기는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여전히 강혜미가 던진 공은 여주가 있는 쪽으로만 날아갔다. 이쯤 되니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지. 김석진은 물론이고 나머지 셋(김태형, 전정국, 그리고 박지민) 또한 강혜미가 의도적으로 여주에게만 공을 던진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인지 무섭도록 표정이 굳어갔다. 일촉즉발. 하지만 여주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외야로 빠져 구경만 하고 있던 나에게는 이만큼 흥미진진한 상황도 없었다. 거의 끝나가는 경기가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안절부절못하며 여주의 걱정을 늘어놓던 이유진도 양손을 꼭 모은 채 경기에 집중했다. 공이 외야에서 도는 동안 김석진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제 옷자락을 꼬옥, 붙잡고 있던 김여주의 손을 떼어냈다. 으잉? 하는 새 물 흐르듯 자연스레 이어진 김석진의 행동에 이유진이 옆에서 숨을 들이켰다. 허억…! 하면서.

제 허리에 김여주의 손을 두른 김석진이 고개를 살짝 숙이곤 김여주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거리가 꽤 있는 탓에 당연히 여기까지 그 내용이 들릴 리 없었지만, 이유진은 김석진이 꼭 제게 귓속말을 하는 것처럼 몸을 움찔거리며 격한 반응을 내보였다. 어머어머, 하는 추임새도 넣으면서. 상대편 외야에 공이 넘어가자 김석진은 여주를 매달곤 뒤로 물러났다. 공이 다시 내야로 넘어갔다. 김석진이 급하게 뒤도는 바람에 여주의 몸이 휘청거렸다. 강혜미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공을 쥐었다.

"야,"

"…어, 어?"

"적당히 해, 너."

김태형이 강혜미의 손목을 붙잡지 않았더라면, 아마 강혜미의 손에 있던 공은 그대로 여주의 얼굴로 날아갔을 것이다. 비틀거리는 여주를 잡아주던 김석진이 김태형과 강혜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껏 당황한 채 잡힌 손목을 보고 있는 강혜미와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강혜미를 내려다보는 김태형을 보는 그의 표정도 그리 좋진 않았다.

"재밌냐? 너 아까부터 김여주 쪽으로만 공 던졌지."

"태형아, 나는, 나는 그게 아니고…."

"너 방금도 김여주쪽으로 공 던지려고 했잖아, 아니야?"

왜 인터넷 소설 속 악역들은 여주인공을 괴롭히다 걸리면 '그런 게 아니라…'는 말만 반복할까? 차라리 그런 적 없다고 시치미를 떼던가. 참신함이 없어요, 참신함이.

"작작해라, 진짜."

김태형이 강혜미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마치 더러운 것을 만지고 있던 것처럼 손을 쫙 펼쳤다. 손을 두어 번 탁, 탁 털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물 취급. 졸지에 반 아이들의 시선과 웅성거림을 혼자 견뎌내게 생긴 강혜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음, 어디서 많이 본 장면 아닌가? 나는 곁눈질로 이유진을 살폈다. 학기 초에 제가 당했던 일이 떠오르는지 이유진의 얼굴이 허옇게 질려있었다. 어쩐지 조금 안쓰러워져서 나는 이유진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이런 걸 보고 갑분싸라 하는 걸까. 피구를 다시 시작할 분위기는 절대 아니었기에 짝피구는 그대로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타이밍 좋게 수업 끝 종이 울린 탓도 있었다. 여태 어디 있었는지 모를 체육 선생은 하품이나 쩍-, 하며 대충 정리하고 들어가라는 듯 손을 휘젓는 게 끝이었다. 개판이구만, 아주. 이유진의 손을 잡은 채 교실로 올라가며 생각했다. 강혜미는 어떤 악역일까. 이유진처럼 반짝을 위해 잠깐 나타난 악역인 걸까, 아니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여주인공을 괴롭히는 역할일까? 어떤 역할이건 간에, 그 역할이 본인이 원해서가 아닌 작가의 뜻에 의해 결정된다는 걸 떠올리면 어쩐지 강혜미가 조금 안쓰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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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 내일 봐!"

"응응, 잘 가, 유진아-,"

손을 붕붕 흔들며 인사하는 유진이에게 마저 손을 흔들어준 뒤 나는 천천히 신발을 갈아 신었다. 이미 대부분의 아이들이 빠져나간 학교는 조용했다. 이럴 때면 여기가 소설 속이 아닌 진짜 현실인 것만 같았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풍경이니까. 느릿느릿 걸음을 떼 계단을 내려갔다. 도서관이나 들릴까, 하는 생각에 집으로 향하려던 걸음을 도서관 쪽으로 틀었다.

요즘 들어 책 읽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 원래도 소설 읽는 걸 좋아해 책을 달고 사는 편이긴 했지만, 직접 소설 속으로 들어오고 나서는 그 정도가 심해졌다. 이유인즉슨, 책 읽는 거 말고는 할 게 없어서 그렇다. 핸드폰이 있으면 뭐 하나, 얼굴책이라던가, 인별그램, 짹짹이, 모든 게 다 그림의 떡이다, 그림의 떡. 왜냐고? 당장 sns에 들어가 봤자, 피드에 뜨는 거라곤 죄다 B4, 아니면 다른 학교 사대천왕, 각 학교 일짱들…, 뭐 이런 거 밖에 없다. 물론, 역시 인터넷 소설답게 모두 외모가 출중하긴 하지만…,

'오글거려….'

전에도 말했듯, 소설은 소설일 때 가장 재밌는 법이다. 소설이 현실이 돼보니까 영 아니더라….

두 달을 뺀질 나게 도서관 문턱을 드나들었더니 이제는 가벼운 인사와 책 추천 정도는 주고받게 된 사서 언니가 추천해 준 책을 빌렸다. 그 외에도 한동안 내 심심함을 달래줄 책 몇 권도. 금세 묵직해진 책가방을 꾸역꾸역 메고는 도서관을 나섰다. 사서 언니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것도 잊지 않고. 그리고 난 도서관 문을 나서기도 전에 걸음을 멈춰야 했다. 도서관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맑았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고 있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도서관 문 앞에 기대선 인영이 어쩐지 익숙해 보였다. …음 그래, 쟤가 굳이, 하교 시간이 훨씬 지난 지금, 동네 도서관에 있을 수… 있지, 그래. 어차피 나는 이 소설에서 한낱 엑스트라에 불과할 뿐이니까, 혹시라도 쟤가 나 때문에 이 도서관에 왔을 거란 근거 없는 생각은 집어치우자-,

"아,"

-라고 생각하며 도서관 출입구를 지나려던 순간에 나는 팔목을 붙잡혔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삐걱거리는 움직임으로 나는 내 손목을 붙잡은 김석진을 쳐다보았다.

"안녕, 네가 김연주구나?"

방실방실 웃는 낯짝에서 빛이 난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말, 저번에도 한 것 같은데 말이지….

엑스트라로 조용히 살고 싶은데 이번에는 남주 후보가 도와주질 않아요. 진짜 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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