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빙의글] 세 번째 결말

3화. 그가 다가온다

그날 밤은 뜬눈으로 지새우다시피 했다. 유리에 간 금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도 엘리베이터에서 동민과 마주쳤다. 인사만 짧게 주고받고 각자 자리로 흩어졌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아침이었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머릿속엔 온통 그 장부 생각뿐이었다.

 

장부의 구멍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회수액 32억 원, 입금액 29억 6,000만 원. 소장님한테 슬쩍 물어봤더니 "어차피 곧 정산 들어가니까 그때 맞추면 돼" 하고 넘겼다.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눈치였다.

 

거래처 이름은 '선일 캐피탈'이었다. 서류철을 뒤지다가 그 이름 옆에 작은 스티커 메모가 붙어 있는 걸 봤다. 소장님 글씨였다. '채권 조사 의뢰 — BND'.

 

손이 멈췄다.

 

BND면 바로 옆 사무실이었다. 동민이 다니는 곳.

 

 

 

*

 

 

 

점심시간에 일부러 복도를 서성였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지만, 뭘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그때 유리문이 열리고 동민이 나왔다. 통화 중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이번 건은 조용히 처리하겠습니다. 대표님 귀에는 안 들어가게."

 

낮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평소 나한테 쓰던 말투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가 전화를 끊고 뒤돌아서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 여기서 뭐 하세요."

"그냥, 바람 좀 쐬려고요. 그보다, 선일 캐피탈이라고 아세요?"

 

말이 먼저 나가 버렸다. 동민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건 왜 물으세요."

"저희 거래처인데, 장부에 구멍이 좀 있어서요."

 

"…그 회사 얘기는 안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목소리가 낮아졌다. 장난기라곤 하나도 없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무슨 말이에요, 그게."

 

동민이 잠깐 나를 쳐다보다가, 뭔가 참는 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유는 안 궁금해하시는 게 나아요. 그냥, 다치는 거 보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말해 놓고 자기도 당황한 눈치였다. 급하게 덧붙였다.

 

"…아니, 그러니까, 저희 회사 일에 말려들면 피곤해지실 거란 뜻이에요."

 

수습이 더 어색했다. 나는 그 어색함을 못 본 척하기가 더 힘들었다.

 

"…알겠어요."

 

그는 그 말만 듣고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유리문 너머로 그가 책상 위 파일을 서둘러 서랍에 넣는 게 보였다. 표지에 붉은 글씨로 뭔가 적혀 있었는데, 멀어서 다 읽지는 못했다. '선일'이라는 두 글자만 겨우 알아봤다.

 

 

 

*

 

 

 

오후 내내 그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다치는 거 보고 싶지 않다는 말도, 그 말을 하고 당황하던 얼굴도.

 

퇴근 무렵까지 선일 캐피탈 쪽 서류를 몇 번 더 뒤졌지만, 더 나오는 건 없었다. 대신 유리문 너머로 BND 쪽을 자꾸 힐끔거리게 됐다. 동민은 오후 내내 자리에 붙어 있지 않았다. 어딘가로 계속 불려 나가는 눈치였다.

 

이유는 안 궁금해하는 게 낫다면서, 정작 자기가 더 초조해 보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1회차의 그도 이걸 알고 있었을까. 사귀는 내내 회사 얘기는 입도 뻥긋 안 하던 사람이었다. 그때는 그냥 원래 말이 없는 성격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쩌면 알면서도 나한테 숨기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었다. 그날 밤 그 차를 배정한 사람 이름까지, 죽는 순간에야 겨우 흘렸을 정도로.

 

 

 

*

 

 

 

퇴근길에 비가 쏟아졌다.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데, 옆에 동민이 와서 섰다. 우산을 이미 펼친 채였다.

 

"…같이 쓰고 가요."

"…괜찮아요. 방향도 다르실 텐데."

"그냥 알아요. 이 근처서 맨날 이쪽으로 걸어가시던데."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그런 걸 눈여겨보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도 저는 좀 더 기다렸다 갈게요."

"비 그칠 때까지 기다리시게요? 일기예보에 밤새 온다고 했는데."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까부터 날씨를 신경 쓰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아니에요. 진짜 괜찮아요."

 

동민이 물러나지 않았다. 우산을 든 손을 아예 내 쪽으로 기울이며 한 걸음 다가왔다.

 

"그럼 우산만 쓰세요. 저는 뛰어가면 되니까."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럼 동민 씨가 다 젖잖아요."

"…이름, 기억하시네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실수였다. 동민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스쳤다.

 

"…됐어요. 그냥 같이 써요."

 

결국 그 말이 먼저 나가 버렸다. 동민이 잠깐 놀란 얼굴을 하더니, 이내 우산을 다시 우리 둘 사이로 되돌렸다. 어깨가 닿을 듯 말 듯한 거리로 나란히 걸었다. 몇 걸음 말없이 걷던 동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요즘 저 좀 피하시죠."

"…아니에요."

"아니긴요. 농담해도 웃지도 않으시고, 눈도 잘 안 마주치시고. 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목소리에 서운함이 묻어 있었다. 다그치는 게 아니라, 진짜 몰라서 묻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잘못한 건 그가 아니라 나였다.

 

"…아무 일도 없어요. 그냥 요즘 정신이 없어서요."

 

거짓말이 자꾸 늘고 있었다. 동민은 더 캐묻지 않고 그저 우산을 조금 더 내 쪽으로 기울였다.

 

"…그럼 다행이고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표정은 다 믿는 얼굴이 아니었다. 밀어내려고 할수록 자꾸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이었다. 이번엔 사람 쪽뿐만 아니라, 그가 감추고 있는 무언가까지 나를 향해 오고 있는 것 같았다.

 

한참을 걷다 갈림길에 다다르자 동민이 우산을 건넸다.

 

"…이건 쓰고 들어가세요. 저는 뛰어가면 돼요."

 

말릴 새도 없이 그가 빗속으로 뛰어갔다. 손에 남은 우산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손목의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유리에 간 금이 빗물에 젖어 유난히 선명했다.

Cerita populer di kalangan penggemar Taes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