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빙의글] 세 번째 결말

6화. 못 하는 말

점심시간, 분식집 앞에서 누군가 동민을 붙잡았다.

 

"형, 저 밥 사 주신다고 한 거 잊으신 건 아니죠?"

 

얼마 전 이 앞에서 동민을 붙잡고 저녁을 조르던 그 후배였다. 그

날은 그냥 스쳐 지나갔는데, 이번엔 동민이 나를 의식했는지 먼저 소개를 시켜 줬다.

 

"…이쪽은, 김운학 씨."

 

동민이 짧게 소개했다. 운학이 먼저 꾸벅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저 이번에 선일 캐피탈 쪽 자료 정리 도와드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번호 저장해 두실래요? 연락 주고받을 일 생길 수도 있어서요."

 

별생각 없이 번호를 저장했다. 동민의 후배라는 사실 말고는 특별할 게 없는 사람이었다.

 

 

 

*

 

 

 

그날 밤, 사무소에 혼자 남아 서랍 속 서류를 다시 꺼냈다.

형광펜 표시를 하나씩 짚어 가며 계좌 흐름을 따라가던 중, 승인란 한 귀퉁이에 작게 적힌 연락처가 눈에 들어왔다.

 

010-****-5321

 

이름은 없고 번호뿐이었다.

그냥 담당자 연락처인가 보다 하고 넘기려다, 손이 멈췄다.

 

낮에 저장한 번호와 뒷자리가 같았다.

 

휴대폰을 꺼내 다시 확인했다. 틀림없었다. 김운학.

 

번호만 적혀 있어서 눈에 안 띄었을 것이다.

동민도 이 페이지에 형광펜 표시를 해 뒀지만, 자기 후배 번호까지 외우고 있을 리는 없었다.

 

점심때 번호를 저장해 주며 웃던 그 흔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 사람이 이 장부 어딘가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동민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는 게 더 마음에 걸렸다.

 

 

 

*

 

 

 

다음 날 저녁, 야근하던 동민이 커피 두 잔을 들고 내 자리로 왔다.

 

"…이거, 드세요."

"…감사합니다."

 

받아 들면서도 손이 조금 떨렸다.

어젯밤 확인한 번호가 아직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동민이 의자를 끌어다 맞은편에 앉았다.

 

"…정산일 다가오니까 다들 예민하네요. 저희 쪽도 이번 분기 안에 선일 캐피탈 건 정리 못 하면 위에서 말 나올 것 같고."

 

커피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한 모금 더 삼켰다.

 

"…다들, 그날 바쁘겠네요."

"그렇겠죠."

 

짧게 답하고는 말이 없었다.

가만히 커피잔만 보고 있던 동민이 문득 입을 열었다.

 

"…저 요즘 좀 궁금한 게 있는데."

"…네."

 

"저 피하시는 거, 맞죠."

 

손끝이 멈췄다. 아니라고 하기엔 이미 몇 번이나 들켰던 티였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면 다행이고요. 그 사진 일도 있었고 해서, 요즘 같은 땐 오히려 붙어 다녀야 안심이 될 텐데.

근데 자꾸 피하시니까, 걱정도 되고 서운하기도 하고. 저 혼자 착각한 건가 싶기도 하고요."

"…뭘요."

"그쪽도 저한테 마음 있는 줄 알았거든요. 아니면 말고요."

 

심장이 내려앉았다. 틀린 말이 아니라서 더 할 말이 없었다.

저도 그렇다고, 사실은 1회차에도 늘 이랬다고.

그 말을 하면 가까워지지 않겠다던 다짐도, 끼지 않겠다던 다짐도 전부 무너질 것 같았다.

그리고 정산일이 오면, 그 마음이 결국 그를 또 그 차에 태우게 될 거라는 걸, 나만 알고 있었다.

 

부정하는 말이 나와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침묵이 벌써 대답이라는 걸 알면서도, 끝내 아니라는 말도 맞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동민이 그 침묵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더는 캐묻지 않고 작게 웃었다.

 

"…대답 안 하셔도 돼요. 그냥, 제가 착각한 건 아니라는 것만 알았으면 됐어요."

 

웃는 얼굴이 쓸쓸해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니었다.

묻지 않은 질문이 둘 사이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게 느껴졌다.

 

 

 

*

 

 

 

며칠 뒤, 탕비실을 지나가다 김운학의 통화 소리를 들었다.

 

"…아니, 그러니까 정산 전에 숫자 맞춰 놓으라면서요. 이제 열흘도 안 남았는데 저보고 어쩌라고요."

 

전화를 끊고 돌아서던 운학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한 박자 늦게 웃었다.

 

"…어, 들으셨어요? 저희 쪽도 요즘 숫자 맞추느라 다들 난리예요. 그쪽도 요즘 야근 많으시죠?"

 

넉살 좋게 웃으며 슬쩍 말을 돌리더니,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가벼운 걸음으로 자리를 피했다.

방금 한 말을 들켰다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저렇게 태연하게 넘어갈 수 있는 것도, 생각해 보면 보통 능구렁이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정산 전에 숫자 맞추라'는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성호 쪽도 같은 날짜를 보고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날짜 밑에서 죽을 걸 알고, 저쪽은 그 날짜 전에 뭔가를 끝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같은 날을 향해 서로 다른 이유로 달려가고 있는 셈이었다.

 

동민한테 말할 수는 없었다.

자기 회사 후배가 연루돼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아직 증거도 없이 꺼낼 수는 없었다.

그 또한 "그의 일에 끼지 않는다"는 다짐을 지키는 걸로 쳐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이미 어긴 건지 알 수 없었다.

 

 

 

*

 

 

 

며칠 뒤, 동민이 선일 캐피탈 쪽 다른 서류를 확인하는 자리에 넌지시 끼어들었다.

 

"…이 계좌 쪽 관리는, 동민 씨 혼자 하세요?"

 

"아뇨, 이쪽 라인은 운학이도 같이 보고 있어요. 왜요?"

"그냥요. 둘이 보니까 확인은 더 꼼꼼하겠다 싶어서요."

"걔가 좀 어리바리해 보여도 일은 야무지게 해요. 믿을 만한 애예요."

 

믿을 만하다는 말이 가슴에 걸렸다. 여기서 더 물으면 의심하는 티가 날 게 뻔했다.

증거도 없이 동민이 제일 믿는 사람을 의심하라고 할 수는 없었다.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

 

 

 

그날 밤, 혼자 등기소 자료와 서류를 다시 펼쳐 놓고 운학의 이름을 찾을 수 있는 다른 흔적이 더 없는지 뒤졌다.

 

같은 계좌, 같은 번호만 반복될 뿐 새로운 건 나오지 않았다.

더 파고들려면 운학 본인한테 직접 묻거나, 동민한테 털어놓는 수밖에 없었는데 둘 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이렇게 답답한 건지 몰랐다.

 

그렇게 며칠이 제자리걸음으로 지나갔다.

운학은 그날 이후로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넉살을 떨었고, 동민은 더 캐묻지 않았고, 나는 매일 밤 서류를 펼쳤다가 그대로 덮기를 반복했다.

아무 일도 없는 척, 다들 그렇게 하루하루를 넘기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손목의 시계를 풀어 책상 위에 올려놓고 달력을 봤다.

 

동그라미 친 날짜에 손끝이 닿았다.

내일이었다.

 

내가 죽은 바로 그날이, 이번에도 내일로 다가와 있었다.

 

유리에 간 금 위로 동민이 했던 말이 겹쳐 떠올랐다.

 

'대답 안 하셔도 돼요. 그냥, 제가 착각한 건 아니라는 것만 알았으면 됐어요.'

 

좋아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 말 한마디로 다짐이 또 한 번 기울었다.

지키고 있다고 믿었던 선이 사실은 진작부터 희미해져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계를 서랍에 넣고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도 유리에 간 금만은, 그리고 내일이라는 두 글자만은 또렷하게 눈에 밟혔다.

 

 


 

 

이번엔 살짝 조직물로 쓰고 싶어서 심각한 사건을 넣어 봤는데 사건 자체가 어렵네요 ㅠㅠㅜ

전 다 알고 쓰는 거라 다 이해가 되지만 독자님들은 이해가 어려우실 수도 있는 것 같아서 걱정입니당....

혹시 이해 안가거나 궁금한 부분 질문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재밌게 읽어주세요 ㅎㅎㅎㅎ

Cerita populer di kalangan penggemar Taes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