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sahabatan Pita

시대는 빠르게 변하고, 엠피쓰리가 등장하면서 작은 혁명이라고 불리웠던 카세트테이프도 이제는 한물간 고물이 되었다. 유행은 발명보다도 훨씬 더 앞서, 1년전에 듣던 노래도 이제 지겨워질 즈음이었다. 날이 제법 후텁지근 하였으나 수빈은 제 새하얀 피부를 돋보이게 하는 푸른색 셔츠를 꿋꿋하게 고집하고 있었다.

이 고집의 원인이 패션은 아니었다. 수빈은 제 한몸 돋보이겠답시고 옷을 입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그렇다고 수빈이 모든 것에 트집을 잡는 고지식한 스크루지 영감은 아니다. 사람에겐 어쩔 수 없이 날서게 되는 부분이 있다.


“어이! 최수빈!”


멀리서 대학동기가 걸어왔다. 털이 숭숭 난 다리를 훤히 드러내는 반바지 차림이었다. 다가오던 동기가 수빈의 옷차림을 확인하고서 또 한숨을 내쉬었다.


“야, 또 그 옷이냐? 안 더워?”

“덥긴 무슨.”

“아이고, 역시 한양대 냉혈한 최수빈답다. 솔직히 말해봐, 너 피 아니라 슬러시 흐르지?”


수빈이 ‘한양대 생물학과씩이나 되어서 무슨 신박한 개소리를 지껄이는거냐’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동기는 37도를 웃도는 지옥의 온도에 더위를 제대로 먹었는지 옆에서 ‘슬러시 최수빈~슬러시 최수빈~피에는 슬러시가 흐른다~’ 하며 되도않는 노래를 불렀다.


“내가 다 창피하다. 그만해.”

“야, 그러는 너는!”


너 진짜 이상해, 그거 알아? 다른 동기들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너 1년 내내 그 옷 차림이라고. 동기가 벌써부터 이마에 숭글숭글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쳐내었다. 솔직히 수빈도 인간이니 덥기는 했다. 단지 인간을 뛰어넘는 정신력을 가진 것이랄까.


“너 그 옷 빨긴 하냐? 하긴, 빨았으니까 좋은 냄새가 나겠지. 그럼 여러벌 사두고 쟁여두냐?”


수빈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동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도 참 징하다, 징해. 야, 다른 사람들 봐라. 다들 반팔 반바지 입잖아, 왜 너만 긴팔 긴바지인데! 내가 주목받겠냐, 니가 주목받겠냐?! 아 물론 얼굴 잘생긴 것도 있긴한데!”


어떻게 1년 내내 그 셔츠랑 그 바지냐고!! 걸치는 겉옷만 달라지고! 동기의 하소연이 곧 최수빈의 존재에 대한 의문-“너 뱀파이어 아니냐?” 같은 것 말이다-으로까지 진화할 것 같아 수빈은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래도 이 더위에 나왔네.”

“야, 그래. 니가 아이스크림 사준다며. 나도 이 더위에 나와서 무슨 개고생인지.”

“그러게.”

“아니 남자새끼가 카세트테이프 하나 고치러 못 가냐?”


그렇다. 이 극악무도한 폭염을 뚫고 건장한 남성 두명이 거리를 걷고 있는 이유는 순전히 수빈이 2년 정도 된 카세트테이프를 고치겠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동기는 카세트테이프 수리점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끌려나온 것이었다.


“근데 그 카세트테이프는 왜 고쳐? 엠피쓰리로 다 들을 수 있잖아.”

“그런게 있어.”

“여얼, 뭐냐? 요즘 교양으로 문학 배우더니 낭만을 추구하게 됐다, 뭐 그런거야?”

“낭만은 무슨.”

“하긴, 연애를 해야 진짜 낭만이지. 너는 좋~으시겠다? 여자 동기들 알아서 꼬이니까.”


아, 연애하고 싶다! 를 외치는 동기를 보며 수빈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쟤는 뭐가 저렇게 쉬운 건지 모르겠다. 아, 이 말 형이 나한테 했던 말인데. 불쑥 생각난 기억에 수빈은 텁텁한 웃음을 지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수빈은 낭만을 추구하러 가는 것이 아니었다. 낭만을 좇기에는 현실이 너무 각박했다. 이 카세트테이프는 수빈에게 있어 애증의 기억을 선사하는 것이다.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은데 지우면 고통스러울 기억과 총과 피가 난무하던 현실에서 있었던 가장 행복했던 기억. 그 두 기억을 카세트테이프 하나가 담고 있다. 효율적이면서도 리스크가 큰 것이다.





“자, 도착했다. 안은 조금 시원하려나.”


낡은 수리점 안에는 여러가지 회로와 전선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꽤나 나이가 들어보이는 노인이 둘을 힐끔 보았다.


“저…이거 수리하러 왔는데요…”

“아직도 테이프를 듣는 사람이 있구만.”


노인은 혀를 쯧쯧 차더니 곧 여기저기 박살난 테이프를 받아들고 수리를 시작했다. 그는 말이 많은 편이었는데, 대부분이 혼잣말이었다. 듣기 불쾌할 정도로 큰. 이쯤되면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었다.


“요즘 애들은 맨날 유행유행거리지, 이런 옛것의 아름다움을 몰라, 쯧! 그까짓 유행이 얼마나 지속될 것 같아? 1년도 안돼서 버릴 거면서 없으면 죽어버릴 것처럼 안달복달 하기는, 쯧!”

“칭찬해주시는 거 맞죠?”


눈치없는 동기의 말에 노인이 들고 있던 드라이버의 손잡이로 냅다 그의 머리를 때렸다. 악! 왜 때려요!


“하여간 요즘 애들은 말도 못 알아먹어, 쯧!”


그렇게 드라이버 손잡이를 피해 꽤나 조신한 자세로 카세트테이프 수리를 기다렸던 둘이다. 마침내 ‘다 됐다, 쯧!’하고 노인이 말끔한 카세트테이프를 내밀자 둘은 매우 황송한 마음으로 굽신거리며 그걸 받아들었다.





집에 돌아온 수빈은 좁은 자취방 안에 선풍기를 틀었다. 이 테이프 하나 듣겠다고 아직까지 남겨둔 카세트 플레이어가 곧 고장날 모양인지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수빈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카세트테이프를 플레이어 안에 넣었다.


“내 곁에만 머물러요 떠나면 안돼요 그리움 두고 머나먼 길 그대 무지개를 찾아올 수 없어요”


이문세의 음성이 플레이어에서 들려왔다. 노래가 끝나도 수빈은 계속해서 테이프를 재생시켰다. 마침내 똑같은 노래를 한 자리에서 20번은 들은 후에야 수빈은 카세트테이프를 꺼냈다.


‘1980.5.18.이문세-소녀/최연준’


테이프의 제목 부근에는 네임펜으로 휘갈겨 적은듯한 연준의 글씨가 있었다. 겨우 4년 지난 테이프건만 벌써부터 연준의 글씨가 지워질 기미가 보였다. 수빈은 부러 그 테이프를 손에 꾹 쥐어보았다. 1980년의 열기를 담은 그 테이프에서 왠지 익숙한 심장박동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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