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만 사랑하고, ‘그’만 사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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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만나기로 한 남자친구. 하지만 약속 시간이 다 되어도 연락이 없는 남자친구에 결국 남자친구 집으로 향했다.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오지 않는 답에 나는 결국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
원래라면 아무리 늦어도 씻고 있어야 할 윤기, 하지만 집 안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은 채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집안을 샅샅이 뒤져봤지만 윤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평소 윤기가 가지 않던 작은방으로 향했다.
내 예상과는 다르게 윤기는 작은방에 있었고, 배를 부여잡은 상태로 차디찬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나는 바로 윤기에게 달려가 어깨를 흔들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윤기… 윤기야.”
차오르는 눈물을 뒤로한 채 윤기의 맥을 짚어보았지만 고요했다. 내 두 손가락에 느껴져야 하는 심장의 이완과 수축은 느껴지지 않았으며 불안한 마음에 코 아래에도 손을 대어보았지만 역시 숨을 쉬지 않았다.
나는 그 상태로 윤기를 부여잡고 눈물만 흘렸다. 그렇게 울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작은방에 있는 간이침대 위의 편지, 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약통까지. 약통을 들어보니 텅 비어있었다. 아마 윤기가 전부 먹었을 것이다.
나는 차마 편지를 읽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편지를 손에 쥐고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까, 이미 숨을 쉬지 않는 윤기지만 조금의 희망을 걸어 119에 신고를 했다. 왜 이제서야 정신이 드는 건지, 사람이 패닉 상태에 빠지면 이렇게 되는 거구나를 느꼈다.
나는 119에 신고를 한 뒤 구급차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 몇 분 사이 내 뇌리에는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윤기가 지금까지 버티며 얼마나 힘들었을지, 나는 왜 그런 윤기의 마음을 몰라주었는지. 윤기 스스로도 많은 생각을 한 후 결정했을 일이지만 가슴이 미어져서 그런지 괜스레 윤기가 미웠다.
윤기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고 있자니 눈에 보이지 않던 방이 눈에 들어왔다. 선반 위에는 작은 화분들과 함께 내가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약통들이 많았으며 서랍장 위에는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이 가지런히 액자에 꽂혀 있었다. 그 액자를 보니 그날의 추억이 생각나 눈물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생각이 교차하고 있을 무렵 구급차 오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문을 열어두었다. 그러자 구급 대원들이 집안으로 들어와 윤기의 상태를 살폈다. 윤기는 흰 천이 덮인 채로 구급차에 실려갔다. 나는 구급차에 같이 타게 되었고, 눈물을 흘리는 나를 보며 구급 대원이 말했다.
“환자분은 약물 과다 복용으로 인해 이미 사망하셨어요, 가까운 대학병원에서 장례를 치러줄 겁니다.”
“…”
나는 그 말을 듣고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으며, 그저 눈에서 눈물만 미친 듯이 흘릴 뿐이었다. 구급 대원은 나에게 탈수할 것 같다며 물을 건네었고, 나는 그 물을 손에 쥐고만 있었다. 윤기가 고통에 몸부림쳤을 걸 생각하니 물을 마실 수 없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윤기는 보호자가 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장례식의 상주가 되었다. 상주인 내가 이끌어야 하지만 나는 패닉 상태였고, 그런 나를 친구가 도와주었지만 나아지는 건 없었다. 그저 윤기의 장례식이 잘 끝난 것뿐.
나는 윤기의 짐을 정리하며 갑자기 생각난 편지를 꺼내어 읽어보았다. 이미 꼬깃꼬깃해진 편지에는 윤기의 눈물 자국이 있었다. 아직 편지를 읽어보지도 않았지만 그 눈물 자국을 보자 내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져 편지를 적셔갔다.
나는 겨우 마음을 추스른 뒤 편지를 찬찬히 읽어나갔다. 그 편지는 역시나 유서였고, 나에 대한 말만 쓰여 있었다. 나는 그 편지를 읽으면서 심장이 죄어오는 느낌이 들었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아마 눈물을 너무 많이 흘린 탓일 것이다. 이 편지를 쓰면서도 눈물을 흘리는 윤기는 어떤 생각이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분명히 마지막으로 통화를 했던 날도 윤기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회사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으며 자책을 했다는 점 빼고는. 내가 몰랐던 사실이지만 윤기는 이미 우울증 불안장애를 앓고 있던 환자였다. 윤기가 내 앞에서는 밝은 척을 하며 숨겼던 건지 내가 둔했던 건지 알아채지 못한 나에 대해 자책을 했다.
먼저 떠난 윤기를 한동안 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윤기의 유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자기는 잊고 다른 좋은 남자를 만나라고, 그게 자기의 소원이라고. 어찌 그럴 수 있을까,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죽었는데 내가 어떻게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윤기의 바람을 안 들어줄 수는 없는 법. 나는 결국 소개팅도 다니고 새로운 남자친구도 사귀었다. 새로운 남자친구에게 설레었던 적도 있다. 심장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든 적도 있지만 그건 아주 잠시였다.
새로운 남자친구가 무슨 일을 하든 윤기가 떠올라 미칠 것만 같았다. 새로운 남자친구가 웃으면 나를 보며 환하게 웃던 윤기가 겹쳐 보이고, 새로운 남자친구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윤기가 나에게 하던 말이 그대로 생각나 겹쳐 보였다.

새로운 남자친구의 품인데도, 내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오로지 윤기였다. 이 남자는 분명히 나를 생각하고 있을 테지만, 나는 윤기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도, 내 마음속에도 윤기밖에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이 정도로 윤기를 사랑했구나,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렇기에 도저히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없었다. 누구는 노력으로 무슨 일이든 가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사랑은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랑을 어떻게 노력으로 쟁취할 수 있을까, 내 뜻대로 안 되는 게 내 마음인데.
대화를 하지도, 닿지도 못하는 윤기지만 내 마음은 윤기에게만 향해있었다. 내가 그를 사랑한다면 분명 나만 상처받으며 시련과 고난을 겪는 건 단연코 내가 될 것이다. 그 누구도 내 마음을 꺾지 못하며 내가 윤기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큰마음을 가지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누군가를 그만 사랑하고, 오직 민윤기 ‘그’만을 사랑하기로 했다. 이 마음은 절대 변치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