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선을 넘지 않기로 했다

48화. my summer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까만 화면을

그냥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보고 있는데,

훈지씨가 잠에서 깼다.






"이번에는 내가 잠 든 거에요?"






"촬영하고 와서 피곤한데,

 자장가로 잔잔하게 비발디 음악이 나오니까

 잠이 솔솔 오죠ㅎ"






"클래식 들으면서 자서 그런가...

 아주 꿀잠 잤어요ㅎㅎ

 근데, 영화 끝났는데

  왜 그렇게 멍 때리고 있어요?"






"그냥...

 어둡고, 조용하고, 훈지씨가 옆에서 자고 있고..

 이 분위기가 좋아서요."






"참, 나 물어보고 싶은 거 있었는데...생각났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내 번호 뭘로 저장했었는지 물어 봤었잖아요.

 '훈찌학생' 이라고 얘기했던 거 기억나죠?"






"기억나요. 근데 그게 왜요?"





"아직도 같은 이름으로 되어 있나 궁금했었어요."






"훈지씨는 그런 게 왜 궁금해요?

 이럴 땐 정말 너무 예상 밖이야 ㅎ"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보인다고 할까.."






"음...그럴 수도 있겠다.

 지금은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죠. 당연히...

 그 때는 정말 학생이었고."






"뭘로 바꿨어요?"






"음...꼭 얘기해야 돼요?"




나는 말해 주기가 좀 쑥쓰러워서

잠시 망설였다.




"꼭 말해야 돼요. 내가 너무 궁금하니까."



나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

그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는 화면을 보여줬다.






photo



"와....무슨 의미인지 잘은 모르겠는데

 누군가의 여름이라니...

 왠지 낭만적이고, 멋지다."






그는 아이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거실 속 어둠을 환하게 비추는 것 같았다.





"무슨 의미에요?"






"내 인생의 여름처럼 뜨겁고,

밝게 빛나는 존재."






"와...나 지금 눈물 나올 거 같애요.

 그거에 비하면

 내가 저장한 이름이 너무 보잘 것 없는데..."






"뭔지 안 물어볼께요."






"왜요? 알고 싶지 않아요?"







"뭐라도 상관없어요.

 훈지씨만 알고 있어요. 그냥"





'어차피 그 번호 곧 없앨 거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간식꺼리를 정리했다.





"왜 안 궁금해요?

 그렇게 얘기하니까 또 너무 섭섭한데.."






"저장한 이름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이렇게 지금 내 앞에 있는 게 중요하지.

 안 그렇습니까 박훈지씨!"





"나 여기서 내일 촬영장으로 바로 갈까요?"





"아니요. 그러지 말고 빨리 가요."





"지금 앞에 있는 게 중요하다면서요..."






"아이...또 이상한 논리 펼치지 말고 빨리 가요.

 가서 푹 쉬고 내일 촬영장으로 가야 프로죠."





입이 삐죽 나온 그를 빨리 보내고,

나는 책상 앞에 앉았다.





언젠가 꼭 해 보고 싶은 일이 있었는데.

영화를 보면서 오늘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에게 편지를 써 보는 것.

길고, 구구절절한 내용이 담긴 편지가 아닌

지금 내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한 구절.



photo

(그대를 여름날에 비할까.

 당신은 여름보다 사랑스럽고, 온화하다.

 거친 바람이 5월의 꽃봉오리를 흔들고,

 우리가 빌려온 여름날은 짧기만 하다.)
 ....


fr. Sonnet 18. by William Shakespeare ]



언젠가 우리가 헤어지고 나서

나중까지 좋은 추억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

그래...그건 욕심이겠지.





헤어지고 나서 버릴 수도 있겠지만...

나라면...

내 젊음의 한 순간을 함께한 상대에게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다.




편지를 반으로 접어 봉투에 넣었다.

다음에 만날 때

몰래 주머니에 넣어 줘야지 생각했다.



그렇게 짧지만 긴 편지를 쓰고 나서 잠이 들었다.





아침에 김대표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하고,

나는 다시 현실 속으로 돌아와야 했다.




[오늘 저녁 때 좀 만나.

 퇴근하면서 단지로 갈께.

 어제 그렇게 수업 그만 둔다고 문자 보내 놓고

 끝이야?

 대체 네 계획이 뭔데?]






[당장 그만 둔다는 게 아니고..
 
 다른 분이 맡을 때까지는 할꺼야.

 화부터 내지 말고.
 
 우선 미리 말한 거고 만나서 설명한다고 했잖아.

 이따 오피스텔로 와 줄래?]





[7시까지 오피스텔로 갈께.]





나는 오늘 저녁,

내 계획의 조력자를 만나기로 했다.





"넌 뭐가 그렇게 복잡해..."

<49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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