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선을 넘지 않기로 했다
98화. 협상(2)

sophie97
2026.08.03Dilihat 38
나는 안도하는 그의 표정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 얘기는 안 하는 게 좋겠어...'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게 있어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한 집에 사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죠 훈지씨?"
나는 그의 특별한 상황 때문에
늘 조심스러웠다.
"한국이 아니라서 그런 생각까지는 못 했어요."
그는 이전보다 한결 고집을 내려놓은 듯했다.
"그리고...
혹시 부모님께는 뭐라고 말씀드리고 온 거에요?
설마 내 이야기까지 한 건 아니죠?
그냥 해외에 나가서 재충전하고 오겠다고
말씀드린 거 아니에요?
괜한 걱정끼쳐 드리지 않는 게 좋잖아요."
이렇게 말하고
나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내가 한 발 양보할께요.
정아씨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이번에는 당신 의견대로 해요."
'아... 다행이다.
계속 고집 부리면 어쩌나 했는데'
"역시 훈지 씨는 현명한 남자에요.
다른 사람 말에도 귀 기울일 줄 알고요."
"아니...
내가 아무거나 고집을 피우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정아 씨는 알죠?
대표님은 나를 보고 황소고집이라고 하시는데...
내가 그런 막무가내 스타일은 아니라구요."
"알죠 알죠.
태형씨가 사람 보는 눈이 좀 없구나...
나는 딱 알겠던데요?"
분위기가 한결 부드려워진 틈을 타,
그에게 꼭 밀어 붙이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훈지씨 여기서 지내는 동안
마냥 쉬지만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럼 뭐... 일이라도 하라고요?"
"아니요. 일을 하라는 게 아니고...
나한테 영어 수업 계속 받아요.
그리고, 스페인어나 다른 언어도
하나쯤 더 배워 보면 좋겠어요.
미겔이 있으니까 부탁해 볼 수 있잖아요."
"아... 언어요..."
"이렇게 여유 시간이 있을 때가 없는데
작정하고 온 거니까요.
대신 나한테도 수업료는 내도록 해요.
공짜 수업은 자꾸 미루게 되고,
성의없이 듣게 된단 말이에요.
미겔에게는 내가 부탁해 볼께요."
"대신 한 달 정도는 푹 쉬고 시작해도 돼요?
나 이 생활 시작하고 나서는
한 번도 이렇게 쉬어 본 적이 없어요."
"그럼요.
한 달 정도는 훈지 씨 하고 싶은 거 다 해요.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으니까요."
"알겠어요.
한 달 푹 쉬고 나면
영어도, 스페인어도 열심히 배워 볼께요."
처음 혼자 스페인에 왔을 때만큼이나,
그와 함께 생활한다는 사실이 긴장되고, 걱정됐다.
하지만,
처음에 엇갈렸던 것들이 많이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한 집에 살지 않는 만큼
각자의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하구요.
빨래, 요리 이런 것들?
대신 요리는 자신 없으면 내가 맡을께요.
그럼 훈지 씨는 청소를 담당해요."
"나 요리 자신 있는데?
먹어봐서 알잖아요?"
"아... 맞다.
훈지씨가 요리 잘 했었지ㅎ"
'나는 그 콩나물국 같은 요리를
또 먹을 자신은 없는데...
미각을 잃었나?
어디서 저 근자감이 나오는 걸까?
어떻게 해야 요리를 못 하게 할 수 있지?'
또 하나의 큰 숙제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내 생각보다 할 일이 엄청 많네요.
오히려 당신이 아니라
내가 함께 사는 것에 대해
판타지를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나는 이런 것들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나는 낮에는 일하는 시간이 꼭 필요하니까
그 시간에는 방해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요.
훈지 씨도 여기 있는 동안은 혼자 여행도 다니고,
조금 더 자유롭고 생산적인 시간을 보냈으면 해요.
그리고,
각자의 공간은 서로 존중하도록 하구요.
상대가 없을 때는
비밀번호 누르고 함부로 들어가지 않기.
그래 줄 수 있죠?"
"꼭 그렇게 남처럼 그래야 돼요?
난 정아 씨가 그렇게 선을 그을 때면
너무 차갑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이런 규칙이 없으면
나중에 서로 상처받거나,
어느 순간 무례하다고 느끼게 될 수도 있어요.
난 우리가 지금의 이 설레는 감정을
오래 간직했으면 좋겠어요."
그가 풀이 죽은 표정을 지었다.
"훈지 씨는 나한테 부탁하고 싶은 거 없어요?"
그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이 항상 나한테만은 다정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다에요."
"와... 그게 오히려 제일 어려운 부탁이에요.
어떻게 사람이 항상 다정해요?
기분이 우울할 때도 있고, 화가 날 때도 있는데..."
"그래도 훈지 씨한테만큼은 노력해 볼게요.
됐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내가 이 동거 아닌 동거 생활을 잘 해낼 수 있을까.'
"이럴 거면 다 그만 둬요." <99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