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a crescente

andare

__1943년 2월 5일
“早く歩いて!(빨리빨리 걸어!)”


시야는 멍하니 앞이 흐리고 형무소 밖은 안과 다를 바가 없었다. 지독히도 춥고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머리에 눈이 닿자 온 털이 곤두서는 듯하였다. 눈은 그칠 줄을 모르고 하염없이 내리기만 했다. 마치 하늘이 슬피 우는 것 같이 말이다. 이 엄동설한에 맨발로 눈길을 걷는 자. 그를 가엾게 여긴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묻는다면 공허한 눈으로 이리 답하리라. 나는 그저 하찮은 아무개요.


“頭のため。(고개 들어.)”


커다란 손이 우악스럽게 왼쪽 어깨를 밀었다. 손이 떼어진 자리에는 수감번호가 적혀 있었다. ‘5728’. 이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그의 이름이었다. 사진기 뒤에는 또 다른 헌병이 서 있었다. 그 헌병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그 소리가 마치 총성과도 같았다. 셔터는 그 뒤로도 너댓 번 눌러졌다. 총성의 환청은 그때마다 들렸다. 마침내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이 멈추자, 그 헌병의 머리 위에 새가 하나 날았다. 저 가련한 것은 저의 운명을 알까. 빼앗긴 하늘과 빼앗긴 들의 짐승들은 저희가 갇힌 존재라는 것을 알까. 헌병이 새를 바라보며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5728은 온몸의 힘을 짜내어 입을 오므리고 ‘휘익’하는 소리를 내었다. 거칠게 갈라진 입술에서 새의 울음소리와 흡사한 음성이 날카롭게 흩어졌다. 성가시다는 듯 새를 보던 헌병은 이 기이한 행동에 더욱 성가시다는 얼굴로 걸어왔다.


“もうクレイジーだな。(이젠 미쳤나보군.)”


헌병은 징이 달린 신발로 수감번호 5728의 복부를 걷어찼다. 그는 힘없이 고꾸라져 막힌 숨을 내쉬었다. 헌병들은 마치 재미있는 유희를 보듯이 그를 에워싸고서는 다같이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치욕을 느낄 새도 없었으며, 때마침 찾아온 추위를 느낄 새도 없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새는 이미 가고 없었다. 침을 뱉고 욕설을 하며 발길질을 하던 헌병들은 넝마처럼 늘어진 그를 다시 우악스럽게 일으켜 세웠다.


“ちょっと、医師さん!(어이, 의사 양반!)”


그들은 곧 그 조선인 사내의 황토색 옷을 벗겨내었다. 족히 열 명은 되어 보이는 그들 앞에서 그 사내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채 알몸뚱이로 서 있었다. ‘의사 양반’이라 불린 그 체구가 작은 일본인은 줄자를 가지고서 그 사내의 몸 이곳저곳을 살피며 종이에 펜을 사각거렸다. 그는 종이 안에 평범한 키, 얼굴 생김새, 눈에 띌만한 특징을 넘어 가슴둘레, 허리둘레, 손 크기 등을 적어넣었다. 성기의 크기나 둔부의 둘레 같이 수치스러운 것까지 모두 적은 그는 헌병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幸い、今回の囚人はかなり元気になりたい。(다행이오, 이번 죄수는 꽤 건강한 듯 싶소.)”


의사의 말이 끝나자 말단 헌병이 사내에게 다시 옷을 입혔다.


“どうですか?(어때?)”
“……”
“なんと独房だ。(무려 독방이다.)”


겨우 누울 수 있을 듯한 방의 문을 열며 간수로 보이는 이가 실실 웃었다. 전에 이곳을 쓰던 사람은 죽은 지 오래인지 사람의 온기라곤 남아있지 않았다. 하긴, 이러한 곳에서 어찌 온기를 기대하겠는가.


“だからこそ、この表情をちょっと解けたんだ。(그러니까 이 표정 좀 풀란 말이야.)”


간수가 어깨를 툭툭 쳤다. 그리고선 죄수를 밀어 넣고 문을 잠갔다. 속절없이 바닥에 내팽개쳐진 죄수는 독방의 손톱만한 창문으로 바깥을 올려다보았다. 기력을 소진한 듯 그에겐 앉아 있을 힘도 없었다.


“……별 하나에 추억과…별 하나에 사랑과…별 하나에 쓸쓸함과…별 하나에 동경과…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쓰러지듯 누운 채 사내는 가빠오는 숨을 내쉬며 웅얼거리다 힘없이 눈을 감았다.
그의 이름은 아무개도 아니요, 5728도 아니거니와,
그의 이름은 ‘크게 나타날’ 석자.
‘강태현’ 이었다.





__1942년 3월 17일
김 씨네 집은 아침부터 바빴다. 10년간 미국에 유학을 다녀온 막내가 곧 돌아온다 하였기 때문이었다. 10년 동안 편지로만 보았던 차남을 드디어 마주한다는 소식에 그 집 안주인은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하였다. 그 집 하인 중 하나가 인력거꾼을 데리고 먼저 휑하니 출발하였다. 인력거꾼을 쉬지 않고 닦달한 결과, 그 하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차역 앞에 다다랐다. 부산항에서부터 기차를 타고 먼걸음을 하였을 도련님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목이 메었다. 사람들이 탄성을 지르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서 기차가 내뿜는 증기가 보일락 말락 하였다.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며 역에 선 기차는 우레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도련님? 도련님? 어디계십니까요?!”


밀려오는 인파 사이로 도련님을 찾던 하인은 곧 한 사내 앞에서 딱 멈추었다. 양장을 입고 트렁크를 든 그는 키가 크며 기골이 늠름한 사내였다. 하인은 이 사내에게 압도당한 나머지 입을 두어 번 뻐끔거리다가 곧 소리를 질렀다.


“도련님!”


장성하셨습니다, 아주 대장부가 되셨어요. 그러는 자네는 내가 조선을 떠날 때와 다를 바가 없군. 한결같아서 좋네. 자네를 보니 집에 온 기분이야. 정답게 대화를 나눈 두 사람은 지나가는 인력거꾼을 발견하고서 인력거에 탔다.


“10년 사이에 조선이 참 많이 바뀌었군.”
“아무렴요. 10년 전하고는 완전히 다릅니다요.”


당연히 그러길 바랐다. 그간 조선의 저항에 보복이라도 하려는 듯 일제의 탄압이 더욱 거세지고 그에 따라 도망치듯이 조선을 떠나면서, 그는 가소롭게도 저가 떠나있는 사이 조선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랐다. 석진은 가죽 가방을 만지작거리며 경성을 두 눈에 담았다. 아름다웠다. 아메리카에서 질리도록 봤던 풍경임에도 흐뭇하고 가슴이 간질거렸다. 바쁘게 움직이는 전철, 팔짱을 끼고 부끄럼 없이 걸어가는 모던 보이와 모던 걸. 석진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도련님께서는 어디 좋은 여자가 없으십니까?”
“그건 왜…”
“들어보니까, 미국엘 가면 하루가 멀다 하고 동침을 한다고,”
“내가 미국인도 아니고 그들의 그런 그릇된 습성을 배워 어찌하겠는가. 허튼 소리 하지 말게.”
“아유 그래도 도련님도 곧 사랑을 하셔야죠.”
“언젠가는 하겠지.”


피곤하네. 잠시 눈을 붙일 터니 도착하면 깨워주게.


“석진아!”


10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아름다운 그의 어머니가 석진을 꽉 끌어안았다. 이젠 훌쩍 커버린 아들에 그녀는 절로 눈물이 맺히는 모양이었다. 석진은 허리를 굽혀 조그마해져 버린 어머니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저 왔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다음으로 아버지와 뜨거운 포옹을 나눈 석진은 그의 귀국 소식을 듣고 본가로 온 그의 형제들과 만났다. 이미 모두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까지 생긴 상태였다. 아직 돌이 채 지나지 않았다는 갓난아이 상혁이는 무얼 아는지 석진에게 안기려 안달을 하였다.


“미국 생활은 어땠니?”
“양이들이 무시하진 않던?”
“편지로 다 말해주었지만, 그래도 궁금해서 말이다.”
“뭐……”


석진이 빙긋이 웃었다.


“확실한 것은 고국에 돌아오니 그 어느 때보다 기쁘다는 것입니다.”


과거 경성이 한양이었던 시절부터 대대로 부를 쌓아온 김씨 가문은 여즉 강성하였다. 친일파도 아닌 집에서 하인을 여럿 거느리고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아이가 안 보입니다.”


떠날 때 그대로인 방에 들어와 허전함을 느낀 석진이 물었다.


“누구?”
“호석…아닙니다.”
“아, 그 아이 말이니?”


어머니가 말했다. 부정할 순 없어 석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가 원래 네 놀이친구였잖니. 너도 가고 이제 더는 여기서 남아 있을 이유가 없겠다 싶었어. 이젠 자유의 몸이니, 하고 싶은 일이 있거들랑 그걸 좇아 떠나라고 했단다.”


석진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인자한 부모는 하인들에게 결코 박한 법이 없었다. 그의 유년시절의 좋은 친구였던 그 아이도 어디선가 신바람나게 살고 있을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자, 그럼 잘 자려무나.”




__1942년 3월 24일
누이의 딸, 희원이 계속 석진을 곁눈질 했다. 다른 식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석진은 밥상 앞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다들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피곤하니?”
“…아무래도 그런 듯 합니다. 아직 피로가 덜 풀렸나 봐요.”
“일주일씩이나 그리 끙끙 앓다니, 미국 유학이 쉽지는 않았나 보구나. 그럼 목욕이라도 하지 그러니? 내가 물을 받으라고 할게.”


큰형과 큰누나가 한마디씩 했다. 큰누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도령 어멈이 일어나 석진을 데리고 욕조로 향했다. 어제부터 도령 어멈은 통 말하는 법이 없었다. 분명 오랜만에 본 도련님을 누구보다 기뻐하며 반길 터, 석진은 입을 다문 그녀를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도령 어멈.”
“…예, 도련님.”


그녀는 석진을 보는가 싶다가도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석진은 더욱 의구심이 들었다. 도령 어멈은 평소 석진이 좋아하던 입욕제를 물에 풀어 넣었다. 그리고선 옷을 벗는 것을 도와주겠다며 손짓을 했다. 여전히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석진은 그녀의 손길이 유난히도 떨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령 어멈은 천천히 석진의 옷을 끌러 벗겼다. 얇은 가운을 입혀준 도령어멈은 등을 돌렸다.


“…유모.”


석진이 낮게 말했다. 도령 어멈은 흠칫했다. 이미 노쇠한 그녀의 잔머리조차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석진은 대답을 받기로 결심하였다.


“어째서 아무런 말이 없는 거지?”
“…”
“유모, 날 아들처럼 돌봐준 사람이 당신이잖아. 장장 10년 만에 돌아온 아들인데, 반갑지 않아?”


도령 어멈은 석진의 눈을 곁눈질로 쳐다보며 입을 앙다물었다. 그리고서는 묵묵히 그의 등에 온수를 끼얹어 주기만 했다. 향기롭게 올라오는 입욕제의 향기에 석진의 근육은 긴장을 풀었다. 도령 어멈은 몇 번 온수를 더 끼얹더니, 곧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가 들고 있던 커다란 나무바가지가 큰 소리를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석진은 눈 깜짝할 새에 욕조에서 나와 총을 꺼내 겨누었다. 도령 어멈은 나무 바가지에 있던 물을 뒤집어쓴 채로 석진을 올려다보았다.


“도련님…! 도련님…!”
“조용히 해, 유모.”


쏴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도령 어멈은 자기 머리 위에 겨눠진 총구를 보며 벌벌 떨었다. 석진은 그녀의 입을 막아 아까와 같이 소리지르지 못하게 하였다. 도령 어멈의 눈은 공포로 커져 있었다.


“뭘 본 거지?”
“…!”
“당장 말해.”


도령 어멈은 손가락으로 제 손바닥에 까만 새를 그렸다. 석진은 한숨을 내쉬며 도령 어멈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은 형형한 기색으로 빛났다.


“그래서, 이제 어쩔 셈이야. 이 집안 식구들을 모두 부르려고?”


도령 어멈이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석진은 잠시 도령 어멈을 보다가 그녀의 입을 막은 손을 떼어냈다. 이미 충격은 가신 모양인지 도령 어멈은 떨면서 나무바가지를 집어들었다.


“도, 도련님……”


도령 어멈이 일어서서 석진을 마주 보았다.


“그 소문이…사실이어요…?”Gravat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