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mma

D-Day start







무엇을 보러 오셨나요?


옛 전통인 가련하고 연약미 넘치는 여자 주인공?
그런 여자 주인공을 둘러싼 남자들의 이야기?


아니면···, 요즘 메타도 괜찮을 수 있겠네요.


마냥 당하지 않는 당돌한 여자 주인공과,
그런 여자 주인공에게 코 꿰이고 결국 휘감아지는 남자들.



그게 무엇이든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풍부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겠죠.

아, 너무 흥분한 나머지 제 소개를 놓치고 말았네요.
저는 이 이야기를 풀어낼, 당신의 시점인 나레이션입니다.

저의 주요 역할은 말 그대로 이야기 풀이꾼이죠.
거기서 더 하자면 모든 드라마의 엑스트라.
딱, 그 정도이겠네요.


뭐, 아무튼.


오늘, 이 페이지를 시작으로 전 여러 드라마를 다닙니다.
제가 여러분들의 눈과 생각, 그리고 입장이 되는 거죠.
물론 여러분들이 그리 생각 안 해도 제가 그리 할 겁니다.


이기적이라고요?


어쩌겠어요, 제 역할이 그런 것인데요 뭐.
그렇다고 여러분들과 통화를 하면서 말할 순 없잖아요?


그러한 오점은 눈 감아주시고.
이제 슬슬 페이지를 시작해 봅시다.
더 늦어봤자, 좋을 건 없으니까요.











***












지금 제 주변을 좀 보세요. 방금 전까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었던 치정 멜로의 배경이었던 화려한 대저택이, 인부들의 손에 의해 순식간에 철거되고 있습니다. 여주인공이 바닥에 주저앉아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라고 외치던 그 대리석 바닥은 이제 그냥 차가운 돌덩어리로 돌아갔죠. 저는 그 옆에서 주연과 조연들이 먹다 남긴 케이터링 샌드위치를 몰래 챙기며 생각합니다. 


'역시 유기농이라 그런지 엑스트라 입맛에는 좀 싱겁네.' 


사실 엑스트라로 산다는 건 꽤나 고독하면서도 스릴 넘치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카메라가 비추는 화려한 조명만 보시겠지만, 저는 조명 뒤편의 먼지 쌓인 전선들과 작가들의 거친 숨소리까지 다 듣거든요.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했을 때? 주인공들이 백신을 찾겠다고 도시를 휘젓는 동안, 저는 화면 구석에서 좀비 1에게 발목을 잡힌 척하며 '오늘 저녁은 짜장면인가, 짬뽕인가'를 고민했습니다. 어차피 저는 곧 죽을 배역이었고, 그 죽음조차 뒤로가기에 사라질지 모르는 운명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여러분, 반전은 늘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지는 법이죠. 모두가 박수를 치며 떠난 이 에필로그의 현장에 홀로 남겨진 건 바로 저, '나레이션'입니다. 


주인공들은 이미 다음 시즌 출연 확정 도장을 찍으러 고급 세단을 타고 떠났고, 저는 이 텅 빈 무대 위에서 여러분과 눈을 맞추고 있죠. 이게 바로 엑스트라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주인공은 결말이 나면 사라지지만, 배경은 영원하거든요. 제가 이 세계관의 주인이라고 우겨도 지금은 말릴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기적이라고요? 아까도 말씀드렸잖아요.
제 역할이 원래 그렇다니까요.


​여러분은 아마 저에게 거창한 결말을 기대하셨을 겁니다. 


"그래서 그 엑스트라는 나중에 재벌 2세가 되었나요?"


라거나 


"알고 보니 그가 숨겨진 최종 흑막이었나요?"


같은 것들 말이죠. 


미안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여전히 다음 드라마에서도 지나가는 행인 3, 혹은 주인공의 화를 돋우는 무례한 점원 1로 등장할 예정이니까요.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요? 주인공들은 한 번 정해진 성격이라는 감옥에 갇혀 평생을 살아야 하지만, 저는 매 페이지마다 새로운 인생을 삽니다.

​어떨 때는 수천만 마리의 좀비 군단 중 하나가 되어 세상을 멸망시키러 달려가기도 하고, 어떨 때는 로맨스 판타지 속에서 여주인공에게 손수건을 건네주고 사라지는 이름 모를 기사가 되기도 하죠. 

제 인생은 단 한 줄의 대사로 요약될지 모르나, 그 한 줄을 위해 저는 수천 가지의 표정을 준비합니다. 이 에필로그가 길어지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제가 여러분의 '시점'이기 때문이죠. 

제가 말을 멈추는 순간, 여러분의 시야도 암전될 겁니다. 그러니 조금 더 이기적으로 굴어보겠습니다. 저는 이 페이지가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엑스트라들의 뒷이야기를 속삭여봅니다.


​주인공들이 멋진 대사를 읊조릴 때, 그 뒤에서 병풍처럼 서 있던 우리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지 않으셨나요?


"빨리 끝내고 국밥이나 먹으러 가고 싶다"거나 "내일 카드 값은 어떻게 막지" 같은


지극히 인간적인 고민들이 그 웅장한 배경 음악 뒤에 숨겨져 있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인생에서는 주인공이라고들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누군가의 엑스트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책임감은 적고, 구경하는 재미는 쏠쏠하거든요. 세상이 멸망하든 말든, 여주인공이 누구랑 결혼하든 말든, 우리는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짧은 컷을 무사히 촬영하면 그만입니다.

​자, 이제 진짜로 다음 페이지를 넘겨야 할 시간입니다. 제가 너무 오래 붙잡아 두었나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제가 아까 말씀드렸죠? 전 여러분의 눈과 생각, 그리고 입장이 될 거라고요. 

다음 드라마에서 제가 또 어떤 하찮은 모습으로 등장할지 지켜보는 것도 나름의 관전 포인트가 될 겁니다. 비록 지금은 이 에필로그의 마지막 문장을 적어 내려가고 있지만, 이건 끝이 아니라 '장르 변경'일 뿐입니다. 좀비물에서 로맨스로, 로맨스에서 다시 코믹극으로. 저는 어디에나 있고, 동시에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에휴, 그래도 이번 생은 분량 좀 챙겼네."


​이게 제가 여러분께 남기는 마지막 나레이션입니다. 이제 카메라 불이 꺼집니다. 관객 여러분도 이제 그만 퇴근하세요. 저도 이 구질구질한 엑스트라 의상을 벗고, 내일의 '지나가는 사람 A'를 준비하러 가봐야겠거든요. 부디 여러분의 페이지도 저처럼 하찮지만 즐거운 이야기들로 가득 차길 바랍니다. 자, 이제 진짜 갑니다! 셋, 둘, 하나... 컷!







































​아, 아직 안 가셨어요?


곧 주인공들이 칼싸움 한 번 하면 채워질 분량인데, 저 같은 엑스트라는 입담으로라도 채워야 하거든요. 여러분, 혹시 그거 아세요? 저기 저 구석에서 좀비 분장을 지우고 있는 저 친구, 사실 아까 로맨스 드라마에서는 여주인공한테 고백했다가 차인 '재벌집 막내아들'이었다는 거. 

이 바닥이 그래요.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전부인 장면이 누군가에게는 그냥 잘 사다가 찌질해져야 하는 삶이거든요.
​세상이 멸망할 때 제가 왜 아무것도 안 했냐고요?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엑스트라니까요. 

제가 갑자기 각성해서 좀비를 다 때려잡으면 그건 '먼치킨물'이지 제가 하던 '일반 드라마'가 아니게 되거든요. 장르를 파괴하는 건 나레이션으로서의 직무유기죠. 저는 그저 여러분이 보는 화면이 매끄럽게 넘어가도록 윤활유 역할을 할 뿐입니다. 이기적인 게 아니라 철저한 프로 정신이라고 해주세요.

​자, 이제 진짜로 다음 촬영지인 '캠퍼스 청춘 로맨스' 현장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거기선 제가 아마 주인공 뒤에서 도서관 책을 빌리는 학생 4쯤 될 것 같네요. 여러분도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세요. 아, 혹시 길 가다가 저처럼 생긴 사람을 봐도 모른 척해주시고요. 제가 여러분의 눈과 입장이 되어드리는 건 오직 이 '페이지' 안에서만이니까요. 자, 진짜로 안녕! 퇴근합니다! 에휴, 내일은 좀 덜 걸어 다니는 역할이었으면 좋겠네. 그럼 이만!








































생각해보니 제가 여러분께 '엑스트라의 생존 법칙'을 안 알려드렸네요. 


첫째, 주인공 근처에 너무 오래 머물지 마라. 벼락을 맞든 칼을 맞든 주인공 옆은 항상 위험하거든요. 
둘째, 대사가 없어도 표정 관리는 해라. 혹시 알아요? 작가님이 기분이 좋아서 다음 씬에 대사 한 줄 더 넣어줄지. 
셋째, 결말에 연연하지 마라. 어차피 세상은 넓고 드라마는 많습니다. 이번 생이 엑스트라로 끝났다고 해서 슬퍼할 거 없어요. 다음 채널을 돌리면 거기선 또 다른 내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자, 이 정도면 충분히 전달됐겠죠? 여러분의 인생이라는 드라마에서도 가끔은 제가 되어보세요. 주인공이 아니라서 얻는 자유, 그게 생각보다 달콤하거든요. 그럼 저는 진짜로 이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다음 페이지에서 만나요! 
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