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e sopravvivere come comparsa

# 1

- 작가가 조금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썼습니다.

- 대체 무슨 글인지 작가도 모릅니다.

- 왜 썼는지 작가도 모릅니다.

- 클리셰 덩어리입니다.


- 가볍게 읽어주세요... 어차피 개연성 개나 준 엉망진창인 글입니다...

- 초반에 여주의 이름이 나오는 부분은 일부러 비워뒀습니다. 독자님들 이름 넣어서 읽으시면 될듯...





엑스트라로 살아남는 법

: 어느 날 소설 속 엑스트라가 되어버렸습니다.

W. 그쁨





자, 우선 상황 정리부터 해 보자.

서울살이 5년째, 5년 동안 서울 이곳저곳을 빠짐없이 돌아다녀 보았음에도 절대, 단 한 번도 눈에도 귀에도 담아 본 적이 없는 낯설디 낯선 고등학교 앞에서 나는 생각했다. 초면에 인사도 없이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냐고? 그럼 인사부터 하도록 하자. 안녕, 내 이름은 어제까진 OOO였고, 오늘부터는 김연주다. 대체 아까부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묻는다면, 그거야말로 내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이라고 대답할 테다.

"야 김연주! 거기서 뭐해? 그러다 지각한다!"

"…나?"

"잠 덜 깼니? 그럼 여기 너 말고 김연주가 또 있어?"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난 너랑 초면인데…. 속에서 튀어나오려는 말을 눌러 담고 어색해진 상황을 웃음으로 무마시켰다. 다행히도 말을 걸어온 여학생은 찰나의 정적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인지 금세 재잘재잘 말을 걸어오며 등굣길을 채웠다. 투 머치 토커. 귀가 쨍할 정도로 높은 목소리로 연신 옆에서 떠들어대니 잠자코 그 말을 들어주는 것마저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긴 했지만 참 다행스럽게도 그 혼자만의 수다 속에서 건진 정보가 몇 가지 있었다. 가령 이 투 머치 토커의 이름이 다영이라는 사실이라던가, 다영이와 나는 같이 연화중을 졸업한 동창이라는 사실이라던가, 내가 이제 1학년이 된다는 사실이라던가, 반 배정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 등등. 아니, 반 배정이 아직 안 나왔다고? 그럼 다들 어떻게 알고 반을 찾아가는 거야?

"앗, 나는 3반! 연주 너는? 반 확인했어?"

"…실화냐…."

쌍팔년도도 아니고 누가 요즘 반 배정을 이따위로 알려줘요…. 본관 현관에 위치하고 있는 게시판에 떡하니 붙어있는 반배정표를 본 나는 좀 어이가 없어졌다. 나 고등학교 다닐 때도 반 배정은 그냥 문자로 알려줬는데 이게 뭐냐.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것이 이벤트를 위한 밑밥이었음을 깨달았다.

"야 대박, 이번에 B4 전부 다 같은 반이야!!"

뭐?! 진짜?! 가 난무하는 본관에서 나 혼자만이 얼굴을 구겼다. B4…? 어쩐지 꽃X다 남자가 생각나는 단어에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B4…?"

"연주 너, 소식 못 들었어? 우리 학교에 설하중 B4 네명 전부 다 올라왔대!"

"B4…."

그 B가 설마 Beautiful의 약자는 아니겠지.

"뷰티 4라고, 설하중에서 제일 잘생긴 네 명…."

진짜냐고…. 팔을 타고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옆에서 자꾸만 비폰지 뭔지 사대천왕 뺨치는 별명을 가진 이들의 소개를 주절대는 다영이의 말을 흘려들으며 나는 반배정표에서 내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습관이 무섭다고, -로 살아오던 세월이 결코 짧지 않아서 반배정표에서 -를 찾는 멍청한 짓을 한번 하긴 했지만,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나는 쉽게 '김연주'의 이름을 찾아낼 수 있었다.

"…다영아, 그 B, 4, 가 몇 반이라고?"

같은 반만 아니게 해주세요, 속으로 간절히 빌었지만 원래 이런 간절하고 사소한 소원은 이뤄지지 않는 법이었다.

"응? 3반이래! 3반 애들 진짜 부럽다, 걔네 얼굴 맨날 볼 수 있을 거 아니야,"

진짜 싫다. 나는 1학년 3반, 그 아래 위치하고 있는 '김연주'라는 이름을 죽어라 노려보았다. 첫날부터 존나 망한 것 같다.





📕 📗 📘





그래, 밑도 끝도 없이 어이없는 상황에 마주한 나와,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여러분을 위해 아까 하지 못한 상황 정리를 좀 하고 넘어가 볼까 한다. 일단 예의 있게 자기소개부터 시작해 보자. 먼저 어제까지 '나'였던 사람에 대해 소개해보자면, 이름은 OOO. 나이는 24세. 직업은 대학생 되는 사람이었다. OOO로 기억에 남는 마지막 순간이라 함은, 오랜만에 방 청소를 해볼까 하다 발견한 MP4에서 내가 중학생일 적에 나 유행하던 인터넷 소설을 발견한 게 시작이었고, 그 뒤로 청소는 뒤로 미뤄둔 채 온종일 인터넷 소설을 읽고, 읽고, 또 읽은 게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잠에 들었던 것 같은데, 그 뒤 일어나 보니까 내가 파릇파릇한 17살 여고생인 김연주가 되어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설명 진짜 성의도 없고 어이도 없다고? 24살 먹고 고등학교 다시 다니게 생긴 나보다 어이없겠냐고.

아무튼, 눈을 떴을 땐 이미 평범한 고등학생의 기상시간인 6시 30분이었고, 나는 상황 파악을 할 틈도 없이 엄마에게 등짝을 맞아가며 등교 준비를 해야 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가족 구성원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 정도. 실제로 오늘 아침에도 엄마를 보자마자 엄마 왜 이렇게 젊어! 회춘했어?! 하는 개소리를 지껄이다 안 맞을 수도 있던 등짝을 몇 대 더 맞았어야 했으니까. 아무튼, 내 이름이 '김연주'가 된 것과, 내 나이가 열일곱이 되었다는 사실 외에는 별로 달라진 게 없어서 내 상황을 이해하는데 별 어려움은 없었다. 물론 아이보리색 마이에 베이지색 체크무늬 치마를 교복으로 선택한 이 학교의 교장의 생각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긴 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현실이 소설 속이라는 걸 확신한 데에는 꽤 여러 가지 이유들이 존재했다. 첫 번째는 앞으로 내가 다니게 될 이 고등학교의 이름이 은하별 고등학교로, 혹시나 내가 빙의가 아니라 회귀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단번에 사그라들게 만들었기 때문(당연히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이름은 '은하별' 따위가 아니었다.)이었고, 두 번째는 등교하는 내내 학교의 공주님이니, 여신님이니 손발이 오그라드는 별명이 몇몇 학생들을 지칭하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까 반배정표 앞에서 들었던 'B4'라는 무리의 이름을 들은 순간 나는 이곳이 현실이 아님을 확신했다. 그렇잖아,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B4 같은 촌스러운 이름을 쓴다고…. 사대천왕이 차라리 낫지….

"안녕! 혹시 자리 비었으면 옆에 앉아도 될까?"

"응, 괜찮아."

쾌활한 목소리로 묻는 여자아이에게 사근사근 웃으며 대답해 주고는 나는 머릿속의 생각들을 마저 정리했다. 아무튼 이곳은 소설 속이고, 나는 난데없이 고등학생으로 살게 생겼고. 한때 죽어라 인소를 읽어대던 짬을 발휘해보았을 때, 여주인공이 B4 중 한 명과 이어짐으로써 소설이 마무리될 것 같은데…. 그럼 그동안 내가 해야 될 일은 무엇인고 하니, 생각보단 별거 없었다.

"넌 이름이 뭐야? 난 김여주!"

"아, 난 김연주…, 우리 이름이 비슷하네?"

"한 글자 차이네! 우와! 완전 신기해!"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생글생글 예쁘게 웃는 모습에 마음이 동해 그러자는 말을 내뱉었다. 첫날부터 예쁜 친구도 사귀고, 시작이 좋다. 아, 그래서 내가 해야 될 일이 뭐냐고? 뻔하지, 일단 주인공들을 피한다. 괜히 엮였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중에서도 여주인공, 여주인공은 절대적으로 피해야 할 존재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유야 뻔했다. 어떤 관계로 얽히든 여주인공과 엮이는 순간 비포인지 뭔지랑은 자동적으로 엮이는 거고, 그뿐만 아니라 여주인공과의 관계에서 포지션을 잘못 잡았다가는 비포뿐만 아니라 전교생으로부터 미움을 산다거나할 확률이 높아질 테니까. 그럼 필연적으로 조용한 학교생활은 물 건너가는 셈이다. 왜, 그런 소설 다들 한 번쯤 읽은 적 있지 않나? 인터넷 소설 중에서도 고전 반열에 오른, 여주인공을 곤란에 빠트리는 악역 1과 악역을 처단하는 남주인공이라던가, 여주인공이 남주인공과 너무 잘 지내는 바람에 질투에 눈이 먼 악역 2가 여주인공을 괴롭히다 남주인공에게 퇴치당한다던가…. 아무튼, 그런 끔찍하게 진부한 전개에 휘말려드는 건 죽어도 사양이었다. 응, 당연하지. 나는 그냥 멀리서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의 사랑을 지켜보는, 그런 포지션이 되고 싶다고.

"연주는 중학교 어디 나왔어?"

"난 연화중학교 나왔어."

고맙다 다영아, 네가 아니었으면 난 아마 자기가 졸업한 중학교 이름도 기억 못 하는 멍청이로 찍혔겠지. 여러모로 도움이 된 다영이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내가 대답했다.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예쁜 짝꿍, 여주에게 너는 어느 중학교에 나왔느냐 물었다. 사실 어차피 들어봤자 어딘지도 모를게 분명했지만.

"나는 설하중학교! 원래는 설하고등학교로 가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

"으음…, 왜 설하고등학교로 안 가고?"

"아! 나 친구들이랑 같은 학교로 온 거거든. 나까지 5명! 전부 다 여기 붙어서 오게 됐어!"

"아 진짜? 그럼 친구들은 다른 반 된 거야?"

"앗, 아니! 다들 같은 반이야! 사실 오늘 다들 늦잠을 잤다고 해서…, 어쩌다 보니까 혼자 등교하게 됐네,"

음, 넷이서 동시에 지각을? 이 정도면 사실 예쁘고 착한 내 짝꿍이 알게 모르게 다른 네 명으로부터 은근한 따돌림을 받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지만,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헤헤, 하며 웃는 여주의 얼굴에다 대고 그런 발언을 할 정도로 내 인성이 바닥은 아니었다. …그렇구나! 하는 반응이 최대긴 했지만. 그리고 진짜 따돌림이라고 해도, 예쁘고 착한 여주를 제가 챙기면 될 일이었다. 어차피 아는 애들 하나 없을 텐데, 잘 된 일이지 뭐.

조례를 기다리며 나눈 짧은 대화 속에서도 여주의 착하고 순수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재잘재잘 대며 말하는 목소리도 곱고, 대화의 내용도 대부분 저가 뭘 좋아한다느니 하는 것들로 가득해서 여주의 말을 듣는 내내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조금 의아한 게 있다면, 다 같은 반이라던 여주의 친구 네 명이 결국 조례 시간이 다 돼가도록 여주의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는 점 정도였다. 진짜 따돌림 아냐? 주위에 넷씩 앉은 아이들을 괜히 한 번씩 째려봐주며 나는 여주의 말을 경청했다. 여주인공이 있다면 딱 이런 애가 아닐까?

그리고 그 말이 플래그인 줄 알았다면, 진짜 죽어도 그 말을 입에 담지 않았을 텐데. 여주인공 같다는 내 말에 여주는 꺄르르 웃었다. 무슨 주접이 그렇냐며 툭, 내 어깨를 치고는 말갛게 웃는데 세상에 천사가 내려온 줄 알았더랬다. 그만큼 곱다. 아무튼 간에, 여주는 그 뒤로도 담임으로 보이는 선생이 앞문을 벌컥 열고 들어올 때까지 재잘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다들 앉아라-, 하는 고전적인 말을 하며 들어서는 선생을 보고 나서는 아직 오지 않은(혹은 여주를 알게 모르게 따돌리고 있을…?) 제 친구들을 찾는 듯 교실을 두리번거리더니 미묘하게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난 깨달았다. 잠깐, 우리 반에 비포인지 육포인지 뭔지 있다 하지 않았나…? 그리고 그 사실을 떠올린 순간부터 나는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생생하게 느끼며 온갖 신에게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내용인즉슨 이랬다. 제발, 우리 착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짝꿍 여주가 말한 '친구들'이 비포…는 아닐 거라 믿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원래 이런 간절하고 사소한 소원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었다.

"여주야, 친구들은 아직 안 온 거야?"

제발 이미 왔다고 말해. 간절한 내 외침이 들리지 않았는지, 야속하게도 여주는 세상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응…, 늦잠 잤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준비가 많이 늦어지나 봐."

그 입에서 긍정의 대답이 나온 순간부터 좆됐음을 직감한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렇구나, 하는 어색한 대답을 하는 것도 잊지 않고서. 1학년 3반, 그러니까 우리 반에서 아직 등교하지 않은 애들은 B4가 유일했다. 얼굴도 모르면서 어떻게 아냐고? 그야, 아까 본관 현관에서도 B4 이름 하나로 그 사달이 났는데, B4가 등교한 교실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잖아…. 다년간 수십, 수백 개의 인터넷 소설을 격파해온 내 감이 미친 듯이 말해주고 있었다.

"빨리 오면 좋겠다! 다 착한 애들이야, 연주 너랑도 금방 친해질 수 있을걸?"

김여주는 여주인공이다. 고로, 벌써부터 김여주와 '우정'을 형성해버린 나는 좋던 싫던 비포와 마주할 운명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시발, 진짜 좆됐네. 아니, 누가 소설 여주인공 이름을 개 성의 없이 김여주라고 지어요.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억울함에 자꾸 구겨지려는 얼굴을 피려고 나는 무던히도 애를 써야 했다. 젠장, 첫날부터 존나게 망한 것 같다.





📕 📗 📘





신은 내 편이었다. 물론 앞선 두 개의 기도는 들어주지 않긴 했지만, 적어도 내가 그 비포와 엮일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지게 되었다는 데 있어서 나름 만족스러운 결과라고 볼 수 있었다. 이게 다, 우리 반 담임이 꼰대인 덕이었다. 지금부터 자리 바꿀 거니까 한 명씩 나와서 종이 뽑아가라, 하는 담임의 말에 반 아이들의 아우성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원래부터 친한 사이였거나, 나와 여주처럼 조례를 앞둔 그 짧은 시간 동안 짝꿍과 친분을 쌓은 애들이 내는 아쉬운 소리였다. 물론 김여주도 포함이었다. 다시 짝 되면 좋을 텐데…, 울상을 지으며 말하는 여주에 나는 좋아하는 티도 못 내고는 그러게…, 하며 말꼬리를 질질 늘렸다.

안타깝게도 김여주가 바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운이 좋게도 김연주가 바라는 일은 일어났다. 김여주와 B4 무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한 내 출석번호를 확인하고 있자니, '어떻게 하면 비포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김여주와 멀어질 수 있을까?'하는 고민으로 가득했던 머릿속이 깔끔하게 비워지는 것 같았다. 거의 끝과 끝에 위치해 있는 서로의 자리를 확인한 여주가 울상을 지었다. 아쉬워 죽겠다고 우는소리를 내며 달라붙어오는 여주의 등을 토닥이며 생각했다. 럭키, 위험할 뻔했다. 하마터면 여주인공 친구 자리에 꼼짝없이 점찍힐 뻔 했다. 상상만으로도 벌써부터 온몸에 소름이 돋아다는 것 같았다.

이쯤에서, 여주인공의 친구 자리를 꿰차면 되려 이득인 부분이 아니냐고 묻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조금 반박해 보려 한다. 아마도 여주인공 바로 옆에서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의 달콤한 로맨스 현장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으니 개이득이라 생각하는 것 같은데, 천만의 말씀. 득보다 실이 많은 게 이 여주인공의 친구 자리라 할 수 있다. 그간 내가 읽어온 인터넷 소설이라던가, 로판이라던가, 수많은 로맨스 소설 속에서 여주인공의 친구는 나중에 성공한 여주인공의 덕을 볼지언정, 그 험난한 과정 속에서 언제나 잃는 게 더 많았다. 가령, 악역들의 질투에 못 이겨 전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여주인공 옆을 참된 우정으로 지키는 여주인공의 친구는, 여주인공의 위험을 항상 먼저 알아차리고 남주에게 알려주는 전서구 역할을 한다거나, 여주인공을 대신해 위험에 휘말리는 일들을 겪고는 그대로 분량에서 사라진다. 또, 언제까지고 여주인공의 옆을 지킬 것만 같았던 착한 여주인공의 친구는 악역들의 꼬심에 넘어가 되려 여주인공을 괴롭히다 모든 것을 다 뒤집어쓰고 남주인공에게 참교육을 받기도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눈새가 틀림없는 여주인공 옆에서 성심성의껏 조언을 아끼지 않는, 그야말로 사랑의 작대기가 되어준다거나. 그리고 흔한 인터넷 소설 속에서는 마지막에 이렇게 등장하지. 네 명의 남주 후보들 중 진짜 남자 주인공을 제외한 나머지들 중 한 명과 눈이 맞아 사귀게 된다고. 이만큼 성심성의껏 설명해 주었으니 다시 묻겠다. 너 같으면 하겠냐?

"계속 짝꿍 하고 싶었는데…."

"새로 바뀐 짝꿍도 괜찮을 거야. 그리고, 같은 반이니까 계속 친하게 지내면 되지!"

"진짜지?"

"당연하지,"

당연히 절친한 친구 사이는 아니고, 같은 반 친구 정도의 거리감은 두겠지만.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자는 뉘앙스를 풍기는 내 말에 여주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 느껴져 새삼 양심이 따끔따끔 찔려왔지만, 내가 살려면 어쩔 수 없다. 어차피 넌 비포인지 육포인지 걔네들하고 잘 지낼게 뻔하니까. 앞으로도 나는 그냥 이름이 비슷한 반 친구! 정도로만 기억해 주길 바라! 홀가분한 미소를 짓고 여주를 꼭 끌어안아주자, 여주도 내 몸을 마주 끌어안아왔다.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새로운 자리로 가는 내내 여주의 아련한 시선이 따라붙었지만, 나는 굳이 그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여주가 아닌 새로운 짝에게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네곤 새로운 자리에 가방을 올려둘 뿐이었다. 뭐, 여주도 알아서 잘 지내겠지. 내 생각이 옳음을 증명하듯, 새로 바뀐 자리에서 새로 만난 짝꿍을 향해 수줍게 인사를 건네는 여주의 모습을 금방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새로 짝이 된 아이는 최은지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아이였다. 여주에게 그랬듯 '난 김연주야~' 하며 사근사근하게 대화를 이어나가자, 어김없이 친하게 지내자,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등의 말들이 흘러나왔다. 응, 그러자! 진짜 고등학생일 때도 이런 식으로 대답한 적은 없었는데, 따위의 생각을 하며 나는 괜히 빈 서랍에 손을 넣고 꼼지락거렸다.

"근데 연주야, 너도 그거 들었어?"

"응? 뭐?"

"우리 반에 B4 네 명 다 있다는 거!"

아하, 또 그 얘기구나. 어, 나 들었어! 하는 대답은 내 입이 아닌, 내 뒷자리 여자아이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같은 반인 거 보고 소리 질렀잖아! 완전 좋아!

"아직 등교 안 했지?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러게, 참! 너넨 이름이 뭐야? 난 이유진! 설하중학교 나왔어."

"설하중이면 B4랑 같은 학교 아니야? 완전 부럽다! 난 최은지, 유일중학교 나왔어!"

"난 김연주야. 연화중학교 다녔어."

역시 인터넷 소설이라 그런지 말투도 죄다 작위적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대답했다. 요즘 고등학생들은 저런 말투 안 쓰지. 아무튼 소설 속 세계에 자꾸만 현실을 반영시키려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기에 나는 잠자코 그 작위적인 말투에 내 말투를 맞춰나갔다. 손발이 좀 오그라들고, 민망해서 귓바퀴가 좀 빨개지는 것 같지만 뭐 어쩌겠어? 별 수 없지….

"빨리 전정국 실물 영접하고 싶다…. 유진이 너 그럼, 걔네 네 명 다 실제로 본 적 있겠네?"

"운 좋게 전정국이랑 같은 반 된 적 한번 있어. 말도 마, 진짜 얼굴에서 빛이 난다니까? 불 안 켜도 전정국 용안만 있으면 세상이 밝아져…."

"그 네 명이 무려 같은 반이라니…. 성격은 어땠어?"

"그냥 모난 곳 없이 둥글둥글했던 것 같아! 다른 세 명에 비하면 성격도 꽤 좋은 편이고, 다정하기도 하고…."

"아 맞아, 전정국 빼고 다른 세 명은 좀 무뚝뚝하다며?"

"좀 쉽게 다가갈 수가 없다고 해야 되나? 그런 분위기가 있긴 하지. 그래도 잘생겼으니까!"

시공간이 오그라들면 딱 이런 느낌일 거야.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이 도저히 펴지질 않는다. 생각보다 고역인데, 이거. 금방이라도 내려갈 것처럼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유지하며 나는 은지와 유진이의 대화를 들었다. 정확히는, 그 작위적인 말투들로 이어나가는 대화들 속에서 그나마 기억해 둘 만한 것을 뇌리에 집어넣으려 애썼다. 엮일 생각도 없으면서 뭐 하러 그런 걸 다 기억해두냐고? 혹시 모르잖아, 걔네를 피하는 데 도움이 될지.

"특히 그중에서 제일 잘생긴 건 김태형이지. 진짜 세상 화려하게 생겼어. 듣기로는 V 기업 막내아들이라는데, 확실하진 않아."

"V 기업?? 완전 대기업이잖아!"

"그러니까, 그래서 다들 환장하는 거지. 잘생긴 데다가 돈도 많으니까! 내가 알기론 네 명 중에 김태형이 고백 제일 많이 받은 걸로 알고 있어."

"대박이다…. 성격은? 성격은 어때?"

"진짜 무뚝뚝해. 잘 웃지도 않아서, 걔 웃는 거 보려고 몸 개그까지 하는 애도 있었다니까. 근데 또 자기 친구들이랑 이야기할 때 진짜, 아주 가끔 웃거든? 환장해…, 진짜 순둥순둥하게 웃는대."

음, 대기업 막내아들이라. 그래, 그래도 인터넷 소설인데 이런 설정 하나쯤은 있어야지. 그래서 그다음은?

"김석진도 만만치 않게 잘생겼지 않아?"

"맞아! 김태형이 화려한 느낌으로 잘생겼다면, 김석진은 약간 귀공자 같은 느낌? 둘 다 다른 느낌으로 잘생겼지. 게다가 김석진은 공부도 잘하니까."

"들었어! 설하중학교에서 3년 내내 전교 1등이었다며?"

"응응, 매번 거의 올백에 가까운 점수를 받아서, 쌤들도 이뻐하셨어. 그래서 설하고등학교로 갈 줄 알았는데, 아마 다른 애들 따라서 여기로 온 것 같아."

"잘생긴 데다가 공부도 잘한다니…. 성격은?"

"쌤들한테는 꽤 서글서글한데, 애들한테는 약간 벽치는 느낌? 뭔지 알지, 그, 쉽게 말 못 거는 그런 분위기 있잖아."

전교 1등, 지능 캐구나! 사대천왕에 지능 캐가 빠지면 또 섭섭하지, 그래. 그래서 대망의 마지막 비포는 누군데?

"마지막은 역시…."

"걔지, 박지민."

방금까지와는 확연히 달라진 유진의 톤에 나는 속으로 의문을 표했다. 걔는 어땠는데?

"어머, 연주 너 박지민 몰라?"

"응? 아니? 당연히 알지! 내 말은, 걔는 설하중학교때 어땠냐구…."

"연주, 박지민 얼굴만 알고 소문은 잘 모르는구나…."

"앗, 응…."

사실 얼굴도 몰라. 그래도 너네 반응을 보니 걔가 남주인공쯤 되는 애라는 건 알겠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박지민, 얼굴도 얼굴인데, 얘는 소문이 장난 아니야…."

"나도 들었어! 하늘공원 패싸움 말하는 거지?"

"그거 말고도 엄청 많아! 선배들도 걔한테는 꼼짝 못 한다는 소리가 있고, 또 P 기업 장남이잖아…!"

"진짜?!"

"응, 저번엔 기사까지 났었대. P 기업 장남이 설하중학교 다닌다고. 다들 대체 그게 누군가 했는데 박지민이었던 거지…."

그래, 패싸움 이야기도 안나오면 섭섭하지…. 걔도 뭐, 17:1로 싸워서 혼자 열일곱 명을 다 이겼다니? 아니면 걔가 17이었다던가….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이어지는 유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성격도 장난 없어, 어지간한 애들은 말도 제대로 못 걸걸? 그 왜, 생긴 것도 진짜 날카롭게 생겼잖아. 완전 냉미남 재질에…. 물론 거기 죽고 못 사는 애들도 있었지만. 아무튼 네 명 중에서 제일 무섭다고 할 수 있지. 애초에 학교도 잘 안 나오긴 하지만, 학교에 오는 날도 자기 친구들 아니면 말 잘 안 걸어."

완전 남자 주인공 재질이네. 박지민, 얘만 좀 많이 조심하면 된다는 거지? 나는 새로 받아들인 정보들을 머릿속에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그러고 보니까, B4랑 같이 다니는 여자애도 한 명 있었다며."

이렇게 바로 여주인공 이야기로 흘러갈 줄이야. …그래? 하며 시치미를 떼는 나와 달리, 은지의 말에 어쩐지 유진이 분한 표정을 지었다. 어라, 이거 왠지 좀….

"쟤야, 김여주."

"헐 뭐야, 걔도 같은 반이었어?"

"그렇더라니까, 쟤 진짜 재수 없어. 다른애들이 싸고도니까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안다니까? 지가 뭐라고…."

음, 하필이면 이 소설에서 여주인공의 존재는 남주인공들에게 보호받는…, 그러니까 여리고 착한 여주인공 포지션인가 보다. 그 말은 즉, 다른 여학생들의 시기와 질투를 온몸에 받는 여주인공이라는 뜻이지. 이로써 여주인공의 친구 자리에서 멀어져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생겼다. 괜히 나섰다가 잘못하면 전교생을 적으로 돌리게 되는 건 사양이었다. 조용히 묻어가야지, 조용히.

"연주 너, 아까 쟤랑 막 이야기하고 그러지 않았어? 어때?"

은지의 물음에 와락, 일그러지려던 표정을 겨우 갈무리했다. 잠깐 짝꿍 된 걸로도 화살이 날아올 줄이야. 여기서 대답 잘 해야 된다. 괜히 어중간하게 여주인공 편을 들거나, 여주인공을 욕하거나, 뭘 해도 그 결말이 내가 바라던 결말은 아니게 될 테니까.

"음, 글쎄…, 나쁜 애 같지는 않았어."

"그래?"

설하중에서는 어땠는데? 미적지근한 내 대답에 얻어낼 것이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은지는 질문의 방향을 유진이에게 돌렸다. 그 질문만을 기다렸다는 듯, 여주에 대한 말들을 와르르 쏟아내는 유진에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당연하게도, 여주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들이 99.9%를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잘 가라 유진아, 멀리는 안 나갈게. 인터넷 소설에서 가장 먼저 퇴치되는 엑스트라가 어떤 유형인지 알아? 바로 입 함부로 놀리다 골로 가는 애들이다. 딱, 내 뒷자리 유진이 같은.

나는 앞으로 일어날 법한 일 몇 개를 가만히 유추해보다 망설임 없이 몸을 일으켰다. 여기에 더 있어봤자 좋을 일 없다는 판단하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유를 몰라 의아해하고 있을 여러분을 위해 간단히 설명을 해 주자면, 어차피 저렇게 여주인공을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내고 다니는 단역은 머지않아 여주인공을 사랑해 마지않는 남주인공들에게 퇴치될 거라는 게 가장 큰 이유이고, 또 B4…, 들이 아직 등교하지 않은 시점에서 아주 우연하게도 유진이가 여주에 대해 내뱉는 뒷담을 들으며 입장할 가능성이 아주 다분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같이 있어봤자 남주인공들에게 미운털 박히는 것 말고 더 하겠어? 주인공들에게 받는 너무 큰 관심도 사양이지만, 미운 털도 사양이다! 왜냐면 난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휘말릴 생각은 전혀 없거든!

"어디 가?"

"응,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아마도 예의상 묻는 것일 은지의 물음에 나는 싱긋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응응, 얼른 갔다 와! 하는 대답을 뒤로하고는 나는 교실을 빠져나갔다. 5분이면 다 끝나있겠지? 따위의 생각을 하며 어딘지도 모르는 화장실로 옮겨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소설 속에 들어왔다는 걸 깨달은 뒤로, 내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소설 속 엑스트라로, 이 소설이 완결 날 때까지 아주 조용히 지내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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