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e sopravvivere come comparsa

# 6

- 작가가 조금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썼습니다.

- 대체 무슨 글인지 작가도 모릅니다.

- 왜 썼는지 작가도 모릅니다.

- 클리셰 덩어리입니다.

- 가볍게 읽어주세요... 어차피 개연성 개나 준 엉망진창인 글입니다...

-TRIGGER WARNING! 2010년대 초에 유행하던 인터넷 소설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폭력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엑스트라로 살아남는 법

: 어느 날 소설 속 엑스트라가 되어버렸습니다.

W. 그쁨





"연주야! 왜 이렇게 늦었어?"

"응? 아아, 매점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아 진짜? 하긴, 한창 더울 시간이니까! 역시 같이 갈 걸 그랬다!"

"으응, 아니야. 자! 물 마셔!"

"앗, 고마워!"

엉망으로 깨진 물병을 치우고, 다시 매점에 가 얼음물 두 개를 계산하는 데 실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되려 자괴감에 허덕이며 내 머리카락을 쥐 뜯는 탓에 시간을 허비한 탓이 컸지. 다른 때 같았으면 속절없이 깨져버린 물통에 쌩돈날린게 짜증이 나 얼굴이라도 구겼을 텐데 그런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에나 머릿속이 엉망이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남주인공을 좋아할 수도 있지, 그게 뭐 어때서?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친절히 충고하는데, 이곳이 소설 속이며, 나는 여주인공이 아닌 고작 엑스트라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겠다.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죽겠다고!

"축구 끝났나 보네? 몇 반이 이겼어?"

"우리 반! 마지막에 지민이가 두 골 더 넣었거든! 진짜 멋있었는데, 연주 너도 봤으면 좋았을걸!"

"으응, 그랬구나아…."

굳이 안 봐도 될 것 같아, 하는 말을 꾹 눌러 삼켰다. 다음은 뭐 한대? 하는 내 말에 이유진이 대답했다. 장애물 달리기!

"석진이랑 태형이가 나간대!"

"아 진짜? 근데 다들 운동장 근처에 모여있네, 혹시 집합하라고 했어?"

"응? 아니 아니-, 연주 너, 미션 달리기 설명 제대로 안 들었지?"

이유진의 말에 머쓱하게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얼버무렸다. 확실히, 1인 1종목 필참이라는 소리에 냅다 줄다리기에 출석번호를 적고 바로 엎드려버렸으니 그 뒤에 설명이 이어졌다 한들 제대로 들었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소설 짬이 몇 년인데, 미션 달리기란 종목 이름만 듣고서도 감이 올 수밖에 없잖은가? 또 쪽지에 좋아하는 사람, 호감 가는 사람 같은 거 적어놓고 데려오라고 하겠지. 운동장에 사람이 몰린 이유도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혹시나 김석진이, 아니면 김태형이랑 미션 달리기를 같이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나온 결과겠지. 안타깝지만 다들 포기하세요. 그 상대는 아마 우리 반 김여주가 될 테니까요!

이유진의 열띤 설명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스탠드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그런 날 보며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이유진이 내 눈치를 흘금흘금 보기 시작했다. 이유야 뻔했다. 저기 모여있는 인파들과 같은 이유로 경기를 좀 더 가까이서 구경하고 싶은 게 분명했다. 바닥에 딱 붙어있는 내 엉덩이와는 달리 금방이라도 앞으로 튀어나갈 듯 들썩이는 이유진의 엉덩이만 봐도 그랬다.

"연주야! 우리도 저기 가서 구경할까?"

아니나 다를까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운동장으로 내려가자는 말을 꺼내는 이유진이었다. 여긴 멀어서 잘 안 보이기도 하구, 또 저거 이기면 우리 반 전체 1등이니까 응원하는 게 좋을 것 같구 또…. 하며 이런저런 변명 아닌 변명들을 늘어놓았다. 어차피 저 근처로 가나 마나, 김석진이나 김태형이 데려가는 건 김여주 아니면 그 친구 권연희일테니 하등 쓸데없는 짓임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늘도 적당히 드리워지고, 근처에 인파라고는 한두 명 밖에 없는 이 개꿀 자리를 벗어나 굳이 저 수많은 인파 속으로 들어갈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었다. 평생 운을 다 끌어다가 김태형이나 김석진 둘 중 하나와 달리기를 하게 된다 치자, 그 순간부터 내가 지켜왔던 엑스트라로서의 조용한 삶이 멀어질게 뻔했다. '김태형이랑 미션 달리기 한 애'란 타이틀이 붙어서는, 전교에 포진해 있는 남주들의 팬클럽에게 옥상이나 소각장으로 불려 다니지 않으면 다행이지. 제법 유치한 일이 아닐까 싶지만, 지금까지 전개됐던 이 소설의 감성이 2010년대 초반 감성인 걸로 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허다했다. 그런고로, 나는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린 채 이유진에게 말했다. 난 여기 있을게.

"유진이 너 가까이서 보고 싶으면 보고 올래? 난 좀 피곤해서…."

"으음…, 혼자 안 심심하겠어?"

"괜찮아! 여기서 구경하고 있을게."

처음엔 망설이는가 하더니, 곧 미션 달리기가 시작된다는 안내방송에 반쯤 비운 얼음 물을 맡긴 이유진은 서둘러 저 아래로 달려나갔다. 그럼 나 갔다 올게! 하며 멀어지는 이유진의 뒤로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주었다. 금세 인파에 섞여들어 이유진의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조용히 손가락을 하나 둘 접으며 숫자를 헤아렸다. 대충 두 종목 남았나? 아까까지만 해도 새파랗기만 했던 하늘에 약간이나마 붉은 기가 돌기 시작한 걸로 보아 그런 듯싶었다.

거지 같은 체육대회의 막바지였다.





📘 📗 📕






"그래서 넌 왜 자연스럽게 여기 앉는 건데?"

고개를 돌려 이유진이 앉아있던 자리를 차지한 장본인을 쳐다보았다. 남주인공(후보)답게, 땀을 한 바가지를 흘려도 훤칠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존나 불공평해.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죄수복 소맷자락으로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벅벅 문질러닦았다. 괜히 땀방울이 신경 쓰인 탓이었다.

"그냥 너 보이길래 왔는데."

"학교에선 아는 척 말자는 말을 너네한테 몇 번을 더 해야 알아 처먹을까?"

"평생 해 보던가~,"

자연스레 내 손에 있던 물병을 열어 제 입으로 가져가는 꼴이 어이가 없었다. 내 얼음물 반절이 박지민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꼴을 보다 나는 슬금슬금 엉덩이를 움직여 박지민과의 거리를 벌렸다. 지나치게 가까운 탓이었다. 어째 김석진이나 박지민이나, 엑스트라로 빙의한 김에 1열에서 로맨스 구경만 좀 하다 가겠다는 날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는다. 아무리 구석에 처박혀있다 한들, 남주인공과 함께 있다는 엄청난 디버프 덕에 금방이라도 다른 사람의 눈에 띌 것 같아 나는 불퉁한 표정으로 박지민의 손에서 물병을 낚아채며 말했다. 다 마셨으면 가라.

"서운하다, 서운해. 친구를 그렇게 매정하게 내쫓고…."

"…열받게 하지 말고 가라? 너랑 있다가 또 괜히 엮여서 피곤해지기 싫거든?"

"나랑 엮여서 피곤할 일이 뭐 있는데?"

"몰라서 묻냐? 남주면 좀, 어? 여주인공한테 붙어있으라고! 나 같은 엑스트라 말고."

괜히 너 때문에 나까지 눈에 띄는 느낌이라고. 짜증을 한껏 담아 툴툴거렸다. 종목이 종목인지라, 대부분의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여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겠지만, 이따금씩 나처럼 스탠드에 앉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학생이라던가, 그늘 아래 앉아 친구와 수다를 떠는 사람이라던가, 건물 안팎을 드나드는 사람들도 꽤 있었기에, 내가 박지민과 함께 사이좋게 앉아있는 장면을 목격할 가능성도 꽤 높았다. 눈에 띄기 싫어. 그 일념 하나로 박지민으로부터 조금씩 조금씩 거리를 벌려가는데, 그런 내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박지민이 이내 푸하하, 하는 호탕한 소리와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여태까지 그게 그렇게 걱정돼서 아는 척하지 말라 한 거였어? 네 엑스트라 생활 개 망할까 봐? 김석진이 진짜 말 안 해줬어?"

"…뭘 말해줘?"

"아 진짜 미치겠네…."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박지민이 말했다. 저기 봐. 바람 빠지는 웃음을 몇 번 지으며 박지민이 제 손가락으로 이곳저곳을 짚었다. 스탠드에 앉아 멍 때리고 있던 학생이라던가, 우리의 정면에서 건물 쪽으로 걸어들어가는 학생이라던가, 운동장에서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학생이라던가. 그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할 때마다 허둥지둥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가리니 이제는 손뼉까지 쳐대며 좋다고 웃는 박지민을 죽어라 노려보았다.

"아니, 고개 숙이지 말고 저기 보라니까?"

"시발, 보긴 뭘 봐! 진짜 누구 인생 조질 일 있나…!"

"한 번만 봐봐, 어? 봐,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 안 한다니까?"

"뭘! 뭘 이상하게 생각을 안 해!"

"너랑 나랑 이렇게 둘이 있어도, 아무도 안 이상하게 본다고-,"

그 말과 함께 바싹 붙어서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는 박지민에 기겁을 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이쪽을 향해 있던 시선들이 떠올랐다. 좆됐다, 하는 생각과 함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일단 입막음할 수 있으면 입막음을…! 하며 눈을 치켜뜬 나와는 다르게 내 주변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그래, 평화로웠다. 이쪽을 향한 삿대질, 혹은 수군거림이라던가, 또는 그 이상의 것들을 상상하던 내 머릿속과는 달리 평화롭기 짝이 없었다는 말이었다. 들려오는 거라곤 쟤는 누구고, 왜 박지민과 붙어있는지 모르겠다는 불평과 질투 어린 수군거림이 아니라, 미친 듯이 깔깔거리는 박지민의 웃음소리뿐이었다. 한 마디로,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뜻이다.

봐, 괜찮다니까? 박지민이 말했다. 시선이 마주쳤다 생각했던 이들 모두 제 할 일을 하기 바빴다. 무관심. 박지민, 혹은 다른 남주들과 함께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나는 한낱 엑스트라고, 나 같은 엑스트라가 남주인공이랑 있으면 보통 이렇게 조용해질 수가 없지 않…나…? 얼굴에 물음표를 한가득 띄우곤 박지민을 쳐다보니 뭐가 그렇게 웃긴지 이제는 눈꼬리에 눈물까지 맺혀있는 모습이 보였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당장."

"말 그대로, 아무도 신경 안 쓴다니까?"

"그러니까, 대체 왜?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우리가 소설 속으로 들어온 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고?"

"……."

말문이 턱 막힌 나를 재미있다는 듯 쳐다보던 박지민이 설명을 이었다. 대충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소설은 이미 쓰여있고, 쓰인 장면과 내용이 크게 틀어지면 소설 속 인물들은 그 틀어진 일을 인지하지 못한다고. 쉽게 말하면 인지부조화가 일어나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예컨대 소설 속에선 절대 마주치지 않는 엑스트라인 나와 남주인공인 박지민이 친하다는 설정은 소설 속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 일이기에 소설 속 인물들은 나와 박지민이 친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박지민과 내가 나란히 앉아있다 한들 그들은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아예 없는 셈 쳐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캐붕나면 아예 우리를 인식조차 안 한다…?"

"너랑 나랑 손잡고 흔들어도 다들 신경도 안 쓸걸?"

박지민이 내 손을 잡아채려는 걸 기겁을 하며 빼내니, 그는 또 좋다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튼 그랬다. 박지민의 말에 따르면, 그간 내가 개고생을 해가며 학교에서 김석진과 박지민을 피해 다니던 것이 죄다 하등 쓸모없는 짓이었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내가 그들에게 친근하게 굴어봤자,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없던 일 취급 당할 테니까! 잔뜩 긴장해있던 몸에 힘을 풀었다. 하…, 하는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시발, 여태 헛고생을 했다는 사실이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암만 눈에 띄고 싶어 이 학교에서 발악 아닌 발악을 했더래도 난 여전히 분량 없는 엑스트라로 지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면 그게 내 역할이니까! 거기서 벗어나 봤자 없던 일이 될 거니까! 이런 시발! 억지로 내 역할을 지켜내려 아등바등할 이유가 전혀 없던 것이었다. 존나 헛고생. 멍하니 미션 달리기가 진행 중인 운동장을 내려다보며 내가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진작 알았으면 우리 집이 아지트 될 일도 없었던 거잖아…."

"한번 아지트는 영원한 아지트지. 이제 와서 무르기 없기다."

장난스러운 말에 열이 뻗쳐 주먹으로 박지민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끙끙 앓는 소리를 과하게 내는데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거 봐, 나 진짜 헛고생한 거네. 한숨을 내쉬었다.

운동장에 열렬한 환호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연스레 시선이 운동장으로 향했다. 환호성의 중심에는 어김없이, 이 소설의 남주인공(후보)인 김태형이 자리하고 있어 나는 턱을 괸 채로 운동장을 보았다. 그 뒤로 김태형에게 손목이 잡힌 채 쫄래쫄래 따라가는 인영이 보였다. 말해 뭐 하겠는가, 여주가 분명했다.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환호소리에 어리벙벙한 얼굴을 한 채 김태형의 뒤를 쫓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여주임이 분명했다. 그에 반해 시뻘겋게 익은 김태형의 귓바퀴가 여기서도 선명히 보일 지경이라 나는 오랜만에 로맨스 소설 속에 들어와있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마도 김태형의 쪽지에는 '좋아하는 사람' 따위가 적혀있었겠지.

"오-, 이 친구 아주 화끈하네요! 좋아하는 사람 데려오기!!"

결승선을 1등으로 통과한 김태형이 내민 쪽지를 받아든 심판이 종이를 펼쳐보더니 내뱉은 말이었다. 저럴 줄 알았지. 감흥 없는 표정으로 운동장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또 우렁찬 환호소리가 운동장을 메웠다. 김태형더러 상남자라느니, 멋있다느니 하는 소리가 난무하는 운동장 속에서 김태형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여주에게 무어라 말하는 것이 보였다. 설마 고백? 그렇다기엔 다년간 쌓아온 내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친구로서 좋아한다 어쩌고 하는 말이었다에 아이스크림 건다."

"오-, 어떻게 알았냐? 정답."

박지민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말했다. 어떻게 알긴, 여주의 말간 웃음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지금껏 봐온 여주는 남주 후보들을 연애 대상으로 인식하기는커녕, 어릴 적부터 함께 해온 소중한 친구!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타이밍에서 김태형이 여주에게 냅다 고백을 갈겨봤자 당황하기만 할 터, 저렇게 말간 웃음은 절대 나올 수가 없는 것이었다. 절대 고백이 아닐 것이라는 추측에 확신을 심어주는 미소, 여주의 웃음이 그랬다. 불쌍한 김태형, 고생길이 훤하구나.

"누가 봐도 고백받은 반응이 아니잖아…, 애초에, 김여주 너희 친구로밖에 안 보지?"

"와, 그런 게 다 보여? 역시, 네가 김여주가 됐어야 했는데,"

"또 또 미친 소리 하고 있네…."

"진심인데? 지금 김여주보다 적어도 참신함이 추가된 김여주였을거 아니야,"

"어차피 소설대로 행동해야 된다며…, 근데,"

순간 머릿속을 번뜩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박지민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날 쳐다보는 것을 보며 내가 말했다. 야, 잠시만,

"너도 이 소설 줄거리 다 알아? 너도 읽었어?"

"…어?"

박지민의 눈이 도로록-, 굴러가는 꼴을 보다 냅다 그의 멱살을 쥐었다. 야! 너도 줄거리 다 알고 있지! 치사하게 니들끼리만…! 억울함에 빼액, 소리를 질렀다. 소설 줄거리를 이미 알고 있다던 김석진은 내 수많은 질문 폭탄에도 그 입을 여는 법이 없어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건만, 그 줄거리를 아는 게 김석진뿐이 아니었다니. 배신감에 치를 떨며 박지민의 머리를 냅다 움켜쥐었다.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터져 나오건 말건 간에, 나는 결 좋은 머리카락을 쥔 손에서 절대 힘을 풀지 않았다.

"시발, 니들끼리만 알고! 왜 나는 안 알려주는데? 좋은 말 할 때 소설 줄거리 싹 다 불어라, 어?"

"악! 악! 좋은 말은 무슨! 미친! 머리 다 뽑힌다고 미친 가시나야!"

"말 하라고오!!"

난데없이 시작된 몸싸움에 또다시 몇몇 이들이 이쪽으로 시선을 던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차피 곧 사라질 시선임을 이제는 알고 있었기에 나는 박지민의 머리카락을 쥐 뜯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놔라, 이 미친년아!! 부산 사람이라더니 기어코 사투리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박지민에 헹, 하고 코웃음을 쳐주었다. 그러게 누가 니들끼리만 비밀 만들래? 존나 서운하게! 한참을 내 손아귀에 결 좋은 머리카락을 붙잡힌 채 고통받던 박지민은, 저 멀리서 우리 둘의 모습을 보고 헐레벌떡 뛰어온 김석진의 만류에 의해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물론, 그 둘의 굳게 닫힌 입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시발, 존나 너무해.





📘 📗 📕





그늘 한 점 없는 땡볕 아래 서 있는 것만으로도 고역이건만, 그 괴로움은 주변에서 들려오는 열띤 소음 덕에 두 배가 되었다. 아니, 애초에 스탠드에 가만히 앉아 박지민의 머리카락이나 쥐뜯고 있던 내가 왜, 운동장 한가운데 서서 이 고딩들의 뜨거운 열기를 감당하고 있어야 되냐고. 흙먼지를 들이마신 탓에 캘록캘록, 텁텁한 기침을 내뱉고 있으면 나와 비슷한 수준의(어쩌면 나보다 0.1% 정도 더 나은 수준의?) 존재감을 가진 엑스트라, 우리 반 반장이 다가와 말하는 것이었다.

"다음이 연주, 네 차례야. 느려도 괜찮으니까 끝까지 뛰기만 해!"

구겨지려는 인상을 겨우겨우 풀어내며 으응-, 하는 마뜩잖은 대답을 내놓았다. 하는둥 마는 둥 하더라도 대답은 들었으니 됐다는 것인지 반장은 말꼬리를 질질 늘리는 나를 내버려 두고는 서둘로 반대쪽으로 바쁜 걸음을 옮겼다.

"연주야, 화이팅! 넘어지지 말고! 다치면 안 돼!"

"으응…."

"반장 말대로 그냥 끝까지 뛰기만 해! 바통만 제대로 넘겨주면 그다음은 정국이가…, 세상에, 연주 너 그럼 혹시…!"

"…응?"

"정국이랑 손 스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꺄아아악!! 아, 너무 부럽다!! 나도 달리기 연습 좀 해둘걸!"

"…하…."

"어어, 시작하려나 봐! 연주야, 저쪽, 저쪽으로! 빨리!"

이유진이 우악스레 내 등을 떠밀었다. 출발선 근처에 다다름과 동시에 팡-, 하는 소리와 함께 신호탄이 쏘아 올려진다. 출발선에 있던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동시에 뛰기 시작함과 동시에 흙먼지가 시야를 뿌옇게 덮쳐왔다. 캑캑대며 뜀박질하는 이들에게로 시선을 옮기니, 흙먼지를 일으키며 열심히 달리고 있는 사람 중에서는 당연하게 여주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었다. 3반 이겨라-, 6반! 5반 화이팅! 하는 온갖 반 학생들의 응원소리와 초여름의 뜨거운 열기에 반쯤 녹다시피 한 내가 이유진에게 반쯤 이끌려 계주 라인에 서게 된 데는 별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래, 다 이유가 있다! 계주 바로 직전에 진행되었던 미션 달리기에서 여학생 하나가 발목 부상을 입었고, 하필이면 그 부상을 입은 여학생은 우리 반이었고, 또 하필이면 그 여학생이 계주 달리기에 출전하기로 되어있었으며, 또 또 하필이면 그 여학생을 대신할 사람이 내가 되었다는, 그런 큰 이유가 있었다. 시발! 어떻게 되어먹은 몸뚱이가 피구 공은 더럽게 못 피하면서 달리기는 꽤 빠른 건지, 억울함에 저절로 눈꼬리가 축 처지고 입꼬리가 파들거리는 것이었다.

"연주야! 잘 하고 와!"

양손을 주먹 쥐어 보이며 응원을 보내는 이유진을 뒤로한 채 세 번째 주자가 대기하는 곳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어느새 첫 번째 주자가 두 번째 주자와 바통을 주고받는 구간이었다. 여주가 두 번째 주자인 김태형을 향해 바통을 내밀었다. 넘어지려나? 이 지랄맞은 소설이라면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내 걱정과는 달리 여주가 이 흙바닥에 구른다던가, 김태형이 바통을 놓친다던가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주 안정적으로 바통을 손에 쥔 김태형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바람에 앞머리가 훤히 까져도 잘생긴 얼굴이 점점 선명하게 보였다. 다음이 내 차례였다. 열정 가득한 눈빛으로 제 반의 주자를 기다리는 다른 세 번째 주자들 사이에서 나 혼자만이 동태 눈깔을 한 채 김태형을 기다렸다.

온기에 살짝 따뜻해진 플라스틱이 손에 닿았다. 바통을 완전히 손에 쥠과 동시에 느릿하게 움직이던 발놀림에 속도를 붙였다. 텁텁한 흙먼지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목구멍에 기분 나쁘게 붙어왔다. 바람에 엉킨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나부꼈다. 2등이라, 나쁘지 않은 등수란 생각과 함께 최대한 빠르게, 네 번째 주자를 향해 달렸다. 저 멀리서 전정국이 한쪽 팔을 내민 채 이쪽을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얼마 남지 않은 거리에 바통을 쥔 팔을 뻗었다.

"어어, 어휴, 어떡해…."

"으 미친, 개 아프겠다…."

"…! 연주야…!"

쿠당탕, 하며 꼴사납게 넘어진 것은 그때였다. 발에 무언가가 걸림과 동시에 몸이 흙바닥을 굴렀다. 따끔한 통증과 묵직한 통증이 몸 이곳저곳에서 올라왔다. 어째서?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소설에 내가, 김연주가 계주에서 넘어진다는 설정이 있었나? 저 멀리 언듯 보이는 박지민과 김석진의 놀란 표정을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은 소설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걸 알았는데도 굳이 나한테 알려주지 않은 걸까? 아니면, 단순히 기억을 못 한 걸까. 아니, 애초에 여주인공도 아니고 한낱 엑스트라에게 이런 일이 벌어질 이유가 있나? 팔다리에서 피어오르는 고통에 명확한 생각을 이어나가기 힘들어 나는 무작정 바통을 든 팔만 앞으로 쭉 뻗었다. 어쨌든 주자가 교대하는 구간까진 왔으니 마지막 주자인 전정국이 지금이라도 달리면 꼴찌는 면하겠지.

"괜찮아?"

전정국은 바통을 잡아채 달리는 대신 내 팔을 붙잡고 내 몸을 일으켜주었다. 예상 밖의 그 행동에 나는 한껏 당황한 채 겨우 미안,이라는 말을 내뱉었다.

"뭐가 미안해,"

"…음, 나 때문에 우리 반이 꼴찌 할 것 같아서?"

"꼴찌 안 해. 가서 치료받아, 아프겠다."

까진 내 손바닥을 툭툭 털어준 전정국이 바통을 들고뛰기 시작했다. 뭐였지, 방금. 의아해할 틈도 없이 냅다 내게 달려와 괜찮냐며 호들갑을 떨어대는 이유진의 손에 이끌려 간이 보건실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마주친 반 아이들 몇몇이 괜찮냐며 물어오는 것에 괜찮다며 일일이 대답해 주면서도 신경은 온통 계주 경기에 쏠려있었다.

환호성이 들렸다. 3반이 2등으로 들어옵니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꼴찌였는데, 하는 생각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반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웃고 있는 전정국이 보였다. 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눈이 마주쳤다는 생각이 들기 무섭게 전정국이 내 쪽을 향해 바통을 흔들었다. 반대 손으로 브이 자를 그리기까지 한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이유진은 여전히 다리에 난 내 상처를 걱정하기 바빴고, 반 아이들은 계주 2등과 전체 성적 1위를 축하하기 바빴다. 운동장에 모인 그 많은 사람들 중 단 한 명도, 전정국이 내게 손짓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위화감이 들었다. 이전과는 다른 느낌의 위화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