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GAME [Serie interrotta]

N. 14

Gravatar


IN GAME

NO. 14

W. 설하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북쪽 숲의 대표적인 마물 서식 구역은 이 세 곳이 전부다."

전정국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지도를 콕, 콕, 짚어내었다. 메를린 북쪽 숲의 초입, 개중에서도 지형이 가장 험준해 쉽게 사람들이 접근하기 힘든 구역이었다. 마물 토벌이 계속되는 만큼에나, 마물들 또한 제 살길을 찾기 위해 서식지를 험한 곳으로 정한 모양이라며 전정국이 설명을 덧붙였다.

"서식지 외의 마물을 처치하는 걸 목표로 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비효율적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서식지에서 토벌할 수도 없다. 실습생들이 죄다 몰릴 테니까."

"음…, 되도록이면 사람이 없는 틈을 노리는 편이 좋겠지. 아니면 다른 팀과 합의하에 시간대를 정하거나."

"하지만 알다시피 우리는 퀘스트라는 또 다른 과제가 남아있지. 솔직히 말하자면, 시간대를 정해 토벌할 만큼의 여유가 있을지조차 알 수 없다."

"……."

조목조목 문제점을 짚는 전정국의 말에는 틀린 것이 단 하나도 없었기에, 김태형과 나는 꽤 침울한 표정으로 지도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우리와는 다르게, 전정국은 망설임이 잔뜩 묻어나는 얼굴로 손을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그의 행동에서부터 나는 무언가를 눈치챌 수 있었다. 실습과 퀘스트, 두 마리 토끼를 최대한 빠르게 잡는 방법을 전정국이 알고 있으리라는 것을.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하다."

전정국이 눈을 꾹 감았다 뜨며 말했다. 전정국의 말에 김태형이 지도에 고정시켰던 시선을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뭔데? 하는 김태형의 짧은 물음에 전정국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유려한 손가락으로 세 서식지 중 한곳을 가리켰다. 메를린 북쪽 숲의 초입은 굳이 나누자면 두 개의 구역으로 나뉘는데, 북쪽 숲 깊은 곳에서부터 이어지는 물길과 계곡 하나가 그 중심이 된다. 계곡 부근의 지형은 웬만한 험한 산 못지않게 험난한 편이라, 당연하게도 마물의 서식지 세 곳 중 하나가 위치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전정국의 손가락이 바로 그 지점을 정확하게 짚었다.

"서식지는 세 곳이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실제로 실습생들이 주로 마물 토벌을 위해 가는 곳은 이 계곡을 제외한 두 군데가 전부이다."

"…왜?"

"이 계곡 부근은…, 지형이 다른 서식지에 비해 차원이 다를 정도로 험준하기도 하고, 북쪽 산 깊은 곳과 연결된 지점이기도 해서 꽤 위험한 마물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고작 실습일 뿐인데 목숨은 걸고 싶지 않을 테니, 자연스레 이 서식지는 모두가 기피하는 곳이 될 수밖에 없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더 큰 문제는,"

"여긴 지도가 없어."

낯선 목소리에 흠칫, 몸을 떨며 고개를 쳐들었다. 이제는 퍽 익숙해진 얼굴이 보였다. 민윤기, 늘 그래왔듯 퀭한 얼굴로 전정국이 짚은 지도 부근을 바라보던 그가 말을 얹은 것이었다. 그의 뒤편으로 정호석이 어색한 미소를 그리며 손을 살랑살랑 흔드는 것이 보였다.

"지도가 없다고? 단 한 장도?"

없어, 정확하게는 못 만드는 거지만, 김태형의 의문 어린 물음에 딸려온 민윤기의 대답은 퍽 충격적이었다. 그 정도로 지형이 험난하단 뜻인가? 이 계곡에서의 토벌을 속으로 반쯤 확정시키고 있던 나로서는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금하게 전정국을 바라보자, 그 또한 민윤기와 같은 말을 하려 한 듯, 작게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왜? 아니, 대체 어째서? 그러고 보니, 북쪽 숲의 초입을 그린 지도에도 계곡 부근은 마치 누군가가 물감을 번지게 하기라도 한 듯, 흐린 잔상만이 남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그마한 샛길까지도 표시되어 있는 다른 구역들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어째서? 이해할 수 없어 잔뜩 찌푸러진 내 얼굴을 본 민윤기가 말을 이었다. 계곡 근처에 이상한 힘이 있대, 하는 그 말에 모두가 집중했다. 민윤기는 마치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듯, 별 감흥 없는 얼굴로 이랬대, 저랬대 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길을 찾지 못하게 난동을 부리나 봐. 뭐…, 듣기로는 뭐에 홀린 것 같기도 하다나,"

"…들어? 누구한테?"

"망령들한테. 그 계곡 쪽에서 온 망령이 꽤 많아. 아무튼 뭔가가 자꾸 방해해서 길을 알지 못하게 만들어. 당연하게도 지도 만드는 것도 무리겠지."

옆에 마치 누군가가 있기라도 하다는 듯, 허공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민윤기의 모습이 새삼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네크로맨서라고 했지. 망령들을 부리는 자. 그저 명령을 내린다거나 하는 간단한 것 정도를 할 수 있겠거니-, 했는데, 그는 망령들과의 의사소통까지도 무리 없이 해낼 수 있는 모양이었다. 계곡에 대한 이야기를 망령들에게 들었다 하는 것을 보면 그랬다. 옆에 서있는 김태형의 팔이 작게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아무튼 민윤기와 전정국의 말을 도합 해보자면 이러했다. 계곡 부근의 서식지, 퀘스트까지 수행해야 되는 우리에게는 최상의 선택지이긴 하나, 지도 없음, 지형 험준함, 숲 초입에 나타나는 평균 마물보다 훨씬 강한 마물이 나타날 위험성 다수. 단 세 군데라는 적은 선택지에도 어째서 계곡 부근의 서식지가 실습생들에게 제외 대상이 되는지, 몇 가지 이유만 들어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전정국, 넌 알고 있었어? 계곡 쪽에 뭔가가 있다는 거."

"알고는 있었다. 길을 잃는 자들이 속출하니 모를 수가 없지. 너희들에게 계곡 쪽으로 토벌을 가자는 말을 꺼린 것도 그것 때문이고…,"

"그럼 뭐 하나만 물어보자, 너, 계곡에 '뭔가 이상한 것'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했지,"

"…그래."

"그게 우리가 찾는 '이상 현상'과 관련돼있는 거라는 생각은 전혀 안 해봤어?"

전정국의 눈이 크게 뜨였다. 상상도 못 해봤다는 듯한 저 표정. 위화감을 잡아낸 것은 아주 찰나의 순간 덕분이었다. 전정국과, 혹은 김태형과 대화할 때면 항상 은연중에 느끼곤 했던 그 느낌이 위화감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항상 무언가가 겉도는 느낌이었다. 분명 우리는 같은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그 주제의 핵심이 아닌, 주변의 것들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느낌. 마치, 무언가가 그 '핵심'을 들여다보는 것을 방해하는 듯한 그런 느낌을. 나는 딱딱하게 굳은 전정국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휴식 타령을 할 때가 아니었나 보다."

대화가 필요하다.

IN GAME

내가 전정국으로부터 느낀 위화감과는 별개로, 우리는 그것에 대해 허심탄회한 대화 시간을 가지는 것을 실습 뒤로 미루기로 했다. 어쨌거나 우리에게 우선순위는 무조건적으로 퀘스트였으며, 그 퀘스트가 이 '메를린 아카데미'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낀 이상, 대화보다 실습이 더욱 중요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바닥에 볼품없이 내동댕이쳐진 마물의 사체를 뒤적거렸다. 마물의 딱딱한 피부를 날카로운 단검이 갈라냈다. 촤악-, 하며 잔뜩 튀는 피를 피할 기운도 없어 나는 그 뜨뜻미지근한 불쾌한 보랏빛 액체를 온몸으로 맞아야 했다. 단전 깊숙한 곳에 있는 마물의 핵을 캐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단 것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몇 시간 동안이나 이 비린내를 맡으며 마물을 썰고 있자니 별 수없이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이었다. 나는 마물의 사체 깊은 곳에서 얻어낸 보랏빛 광석을 소중하게,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다. 오늘이 벌써 마물 토벌 실습의 세 번째 날인지라, 인벤토리에 쌓인 마물의 핵 개수 또한 꽤 많이 쌓여있었다. 인벤토리라는 편리한 시스템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초반에 주머니에 핵을 한가득 넣어 다니던 나를 보며 김태형이 얼마나 비웃던지, 전정국에게 인벤토리라는 기능의 사용법을 익힌 뒤에야 나는 그 묵직한 무게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와…, 이게, 네 스킬이라고?"

주변에 널브러진 마물의 사체 더미들을 바라보며 김태형이 입을 쩍, 벌렸다. 다른 마물의 사체에서 핵을 빼낸 내가 그것을 김태형에게 던지며 소리쳤다. 빨리 핵이나 캐, 이 멍청아! 역시 마물의 사체를 뒤적거리던 전정국 역시 멀거니 서있기만 하는 김태형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매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살기등등한 그 눈빛에 김태형이 투덜거리며 단검을 집어 들었다. 알겠어, 알겠다고, 하는 꿍얼거림을 무시한 채, 나는 또 다른 마물의 사체를 뒤적였다.

[난사], 사용할 때 내 기분이 몹시 더럽다는 점을 제외하면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스킬이었다. 결국 계곡 부근의 서식지 토벌을 선택한 우리는, 우리를 제외한 실습 팀이 단 한 팀도 얼씬거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처리해야 할 마물의 수가 더 많아졌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는데, 이 [난사] 스킬 한방이면 어지간한 하급 마물들은 죄다 배를 까뒤집고 죽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다. 여느 RPG 게임에 비교하자면 사냥기에 속할만한 스킬이랄까. 전정국과 김태형 또한 새로운 '스킬'을 받았지만, 내 [난사]만큼에나 마물을 학살시키는데 최적화된 스킬은 없었기에 자연스레 다수의 마물을 처리하는 것은 내 몫이 되었다. 간간이 나오는 적은 수의 마물은 전정국과 김태형이 무리 없이 해치웠다. 충분한 휴식만 취해준다면 [난사] 스킬을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었기에, 아무리 계곡 부근의 서식지라 해도 우리는 별다른 큰 위험 없이 마물 사냥을 계속했다.

마물의 사체가 뱉어낸 핵을 손에 쥐었다. 이번엔 연보라색이었다. 마물에도 '급'이란 게 있는지, 나오는 마물의 핵의 색이 가끔 다르기도 했다. 추측건대, 연한 색 핵을 가진 마물보다 진한 색 핵을 가진 마물이 조금 더 상위 마물에 속하는 듯싶었다. 나는 햇빛 아래 예쁘게 빛나는 핵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매개체,'

'혹시 이 핵이 매개체가 아닐까?'

시스템 창을 활성화시켜 열어본 퀘스트 창을 살펴보았다. 마물의 핵을 쥐고 있음에도 [조건 1]은 완료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변함없는 퀘스트 창을 바라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던 핵을 하나하나 꺼내보았다. 보라색, 연보라색, 진분홍색, 분홍색 등등, 수개의 핵을 꺼내 쥐어도 보고, 햇빛에 반짝이도록 높게 들어도 보고, 여러 개를 쥐고 흔들어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조건 1]의 충족은 완료되지 않았다. 이게 아닌가, 싶은 마음에 바닥에 내려놓았던 핵들을 인벤토리에 다시금 집어넣었다. 의욕이 점점 저하되는 기분이었다.

"뭐 하냐?"

"혼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길래 불러도 못 듣나,"

변동 없는 퀘스트 창을 얼마나 들여다보고 있었을까, 핵 몇 개를 양손 가득 쥐고 있는 전정국과 김태형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자, 네 몫, 하며 건네는 핵들의 개수가 꽤 많은지라, 나는 퍽 당황한 낯으로 그들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많이? 하는 내 물음에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 네가 다 죽였잖아-, 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래서 뭐 하고 있었는데? 뭐 발견한 거라도 있냐?"

"아니, 아무것도. 혹시 이 핵이 매개체가 아닐까 생각해 본 것뿐이야."

"그럴듯한데?"

"그치? 근데 아닌가 봐. 아무 반응도 없어."

가시 모드-, 하고 중얼거리자 반투명했던 시스템 창이 새파랗게 변했다. 김태형과 전정국의 눈이 [조건 1]이 적혀있는 부근을 살폈다. 내 손에 쥐여있는 마물들의 핵을 한 번, 퀘스트 창을 한 번 바라본 그들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확실히, 아닌가 보군. 하는 전정국의 말에 손에 쥐고 있던 마물의 핵을 인벤토리에 쑤셔 넣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늘은 이쯤 하는 게 좋겠어,"

벌써 해가 지려고 하는군, 하는 전정국의 말에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의 한구석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곧 북쪽 숲의 입구가 닫힐 시간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마물의 사체 더미에서 폴짝, 뛰어내린 김태형이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은 채 조심스레 걸음을 내디뎠다. 딱딱하고 미끄러운 마물의 표피가 아닌, 바스락거리는 흙이 밟혔다. 지체할 것 없이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마물이 나타나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빠르게 숲의 입구로 돌아갈 수 있었다. 기시감일까, 어둑어둑해진 하늘 너머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새가 길게 울었다. 싸늘하게 식은 팔뚝을 무의식적으로 문지르며 나는 다시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황태자와 공녀, 그리고 루미안 후작 영식이 북쪽 숲에서 행방불명되었다는 소문이 돈 것은, 그로부터 단 하루 뒤의 일이었다.

/

어쩌다 이렇게 되었더라, 욱신거리는 등 부근의 통증을 고스란히 느끼며 내가 생각했다. 울컥, 흘러나온 핏물이 바닥에 흥건히 고여 흘러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탈진한 몸뚱어리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에나 지쳐있던 터라, 나는 전정국이나 김태형을 부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끄으응-, 하는 꼴사나운 소리를 내며 누워있어야만 했다.

시작은 평범했다. 요컨대, 점심을 든든하게 먹은 뒤 여느 때와 같이 토벌에 나설 때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이런 꼴로 누워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단 것이다. 근 3일간 그랬던 것과 같이 교관의 안내를 받아 숲에 들어오고, 빠른 토벌을 위해 계곡 부근의 서식지로 걸음을 옮겼다. 당연하게도 내 곁에는 전정국과 김태형이 함께였으며, 단 하룻밤 새 불어난 하급 마물을 처리하기 위해 여전히 몸에 익지 않은 [난사] 스킬을 사용하던 것마저도 별다를 바 없었다.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면, 그날따라 숲이 몹시도 고요했던 것 밖에는 없으리라.

"이쪽은 끝, 도와줄까?"

"난 됐으니 율리아나 도와줘."

"쟤도 거의 끝난 것 같은데? 리아, 얼마나 남았어?!"

"금방 끝나!"

마물의 표피를 잘라내며 내가 대답했다. 몇 마리 남지 않은 마물을 마저 해체하고 나니, 어김없이 마물의 피를 포함한 온갖 더러운 것들에 엉망이 된 몰골이 되었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훅 끼쳐오는 역한 비린내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러졌다. 손에 가득 쥐고 있던 마물의 핵을 인벤토리에 넣은 뒤,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던 전정국과 김태형에게로 다가갔다.

"이게 마지막이야?"

"그래, 끝났다. 몰골이 말이 아니군그래,"

"너나 나나 거기서 거기거든? 핵 수거도 끝냈는데, 좀 쉬다 갈까?"

"대충이라도 씻고 가는 게 어떤가, 마침 근처에 계곡도 있는데."

물 소리가 나는 쪽을 가리키며 전정국이 말했다. 그럴까? 하며 김태형이 잔뜩 들뜬 얼굴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근 3일간 쉬지도 않고 마물의 핵을 모으고 다닌 터라, 다른 팀의 5배 가까이 되는 핵을 모은 우리로써는 더 급할 것이 없었기에 퀘스트와 관련된 '매개체'를 찾는 것을 우선으로 두기로 했다. 그 시작점이 바로 오늘이고. 적당히 마물을 토벌한 뒤 숲을 좀 수색해보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기에 한차례 토벌을 끝낸 뒤 숨 고를 시간을 가지는 중이었다. 그래 뭐, 대충이라도 씻는 게 낫겠지? 하는 내 말에 전정국도 김태형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마물의 피를 뒤집어쓴 탓에 찝찝함을 느끼기는 매한가지였는지, 비린내를 대충이나마 씻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전정국의 표정도 한층 풀어진 채였다.

북쪽 숲 계곡의 작은 폭포, 그 위쪽에 자리 잡은 우리는 재빠르게 몸에 묻은 마물의 피를 씻어내는데 집중했다. 마음 같아서야 옷을 홀라당 벗어던진 채 계곡물에 몸을 벅벅 씻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말도 안 되는 행동인 걸 잘 알고 있기에 얼굴과 머리카락에 묻은 핏자국을 지워내는데 만족하기로 했다. 

"힌트가 너무 짠 거 아니냐, 매개체가 대체 뭘 뜻하는지…,"

근처에서 대충 모아온 마른 나뭇가지에 불을 피우며 김태형이 투덜거렸다. 그의 말마따나 대체 무엇을 위한 매개체인지조차 알 수 없었기에 더욱 답답했다. 북쪽 숲을 배경으로 한 매개체를 찾아내는 것, 3일 내내 마물만 잡아댄 우리가 찾아낸 것도 없거니와, 솔직히 10일 내에 조건을 다 달성할 수 있을지조차 자신이 없었다.

"아마 우리가 '자료'를 얻지 못했기에 더 힘든 것일 수도 있겠지. 혹시 아나? 그 '자료'에 매개체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있을 수도 있으니…,"

"그 자료 열람권이 '협력' 퀘스트 완료 보상이었나? 50% 좀 넘은 걸로 보상 2 개를 받은 거면, 자료 열람권은 100%를 채웠을 때나 구경할 수 있단 소린데,"

"양심도 없지, 그걸 어떻게 100%로 채우냐. 채우다 캐린? 캐런? 걔 때문에 배때기에 구멍 뚫려 뒤질뻔했는데,"

"내 말이,"

캐런과 그녀에 의해 비참하게 죽임당한 세 명의 플레이어, 그 끔찍한 잔상을 떠올리자 저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많이 춥냐? 불 더 피울까? 내가 추워서 몸을 떤 것이라 생각하는지, 김태형이 작은 모닥불 안으로 나뭇가지 몇 개를 더 집어넣었다. 불꽃이 덩치를 조금 더 키워냈다.

"근데, 분명 퀘스트 창에는 '자료를 열람한 뒤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을 권장'한다고 써져 있었단 말이지, 꼭 우리가 '자료'를 언제든지 열람할 수 있다는 것처럼."

"굳이 '자료 열람권'이 없어도 된다?"

"'자료 열람권'이 반드시 필요한 게 아니라, 치트키 같은 거일 수도 있단 소리지."

"하지만 그 '자료'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료를 찾겠다고 나서는 건, 지금과 별다를 것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 아닌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 뭐 이런…,"

"그건 또 그래, 그러니까 오늘 대충이라도 훑어보자는 거지,"

덩치를 키운 모닥불 앞에, 잔뜩 젖었던 옷이 빠르게 말라갔다.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자, 고요한 숲속에서는 타닥, 하며 모닥불이 타오르는 소리만이 남아있었다. 혹시나 근처에서 마물이 튀어나오진 않을까 옆에 빼두었던 리볼버가 무색하게도 숲은 기이하리만치 고요했다. 문득 느껴지는 기시감에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숲이 원래 이렇게 고요했었나?

"…야 이거,"

"확실히, 뭔가 이상하지."

주변은 고요하고, 근처에 있어야 할 생물의 기척은 단 한 가지도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언젠가 전정국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 계곡 부근은…, 지형이 다른 서식지에 비해 차원이 다를 정도로 험준하기도 하고, 북쪽 산 깊은 곳과 연결된 지점이기도 해서 꽤 위험한 마물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고작…,'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리볼버를 고쳐 쥔 채 숲 깊은 곳을 응시했다. 여태껏 상대해온 마물과는 궤를 달리하는 기운, [난사] 따위로는 한 마리조차 제대로 잡을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일 났군그래, 하며 전정국이 중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길게 우는 마물의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상급 마물이다."

메를린 북쪽 숲의 포식자, 거대한 덩치에 걸맞은 강력한 기운을 뿜어대는 마물들이 서서히 다가왔다. 한두 마리가 아닌, 족히 수십 마리는 되어 보이는 마물들에 김태형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어갔다.

상급 마물, 이 마물들 또한 아카데미의 군사학부 학생들에게 토벌의 대상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각자의 위치와 역할이 정해져 있는, 완벽한 토벌대를 구성한 경우에나 해당되는 말이었다. 적어도 10명 이상의 학생들로 구성된 토벌대 여야만이 상대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상급 마물. 고작 신입생 3명에 불과한 우리가 저 많은 마물들을 죄다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이다. 더 절망적인 것은, 우리의 뒤쪽이 낭떠러지에 가까운 폭포라는 것이었다. 앞으로는 상급 마물, 뒤로는 낭떠러지라, 운이 얼마나 좋아야 이 끔찍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는지,

"적당히 상대하다 왼쪽으로 빠져, 도망만이 살길이다."

"발 빠른 마물이 없길 바라야지…,"

전정국이 마물들에게 덤벼들었다. 칼끝이 마물의 표피를 길게 베었으나, 카강-, 하는 소리만을 남긴 검은 마물의 표피를 뚫지 못했다. 공격이 먹혀들지 않으니, 불리한 건 전정국 쪽이었다. 그것을 빠르게 눈치챈 전정국이 몸을 뒤로 물렸다. 마물의 커다란 앞발이 방금까지 전정국이 자리하고 있던 바닥을 내리쳤다. 쾅-, 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공격이 먹히지 않는 건 김태형도 마찬가지인듯했다. 암살자 직업군의 덕을 톡톡히 본 덕에 마물들이 눈치채지 못하게끔 그들에게 접근하는 것은 가능했으나, 역시나, 날이 잔뜩 선 단검으로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는 마물의 표피를 뚫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 마력탄 또한 별 볼일 없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새카만 자국만을 남긴 마력탄이 힘없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공격이 먹히질 않으니 도망갈 틈을 만드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거대한 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앞이 깜깜하기 그지없었다. 마물이 온 힘을 다해 내리찍은 발을 피하며, 나는 전정국과 김태형을 향해 소리쳤다.

"야! 차라리 뛰어내리자!"

"뭐?"

"돌았냐?"

"공격도 안 먹히는데 뭘 어쩌자고 그럼! 마물의 밥이 되느니, 차라리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편이 낫지! 운 좋으면 살 수도 있잖아?"

"…제정신 맞냐?!"

"놀랍도록! 아주! 멀쩡하거든?! 야, 빨리 뛰어!"

그들이 무어라 반박할 새도 없이, 나는 전정국과 김태형의 팔을 붙잡고는 물길 쪽으로 달려갔다. 성난 마물들이 쿵쿵거리며 뒤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수영은 할 줄 알지?"

"야, 야, 진짜로 뛰어내리자고?!"

"…폭포로 떨어진다면, 적어도 머리가 깨져 즉사하는 일은 없겠군."

"넌 또 그걸 진지하게…! 야! 밀지 말라고!"

"아 빨리 뛰어내려 멍청아, 이러다 다 죽는다고!"

큰 덩치로 인한 둔한 움직임 덕에 벌려놓은 거리를 마물들이 빠르게 좁혀나가고 있었다. 아, 몰라!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총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뒤,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고는,

"…! 야, 이, 미친년아아!!"

온 힘을 다해, 김태형을 발로 찼다. 방심한 틈에 떠밀린 몸이 하릴없이 폭포 아래로 낙하했다. 욕설이 분명한 불분명한 말들을 들으며, 나는 전정국을 바라보았다. 발에 차이긴 싫었던 듯, 내 눈을 마주한 전정국이 흠칫하더니 제 발로 폭포 아래로 떨어졌다.

"…진짜, 별 짓을 다 해보네,"

운이 나빠 죽는다고 하더라도, 죽어서도 내 목숨 값은 톡톡히 받아내리라. 더불어 율리아의 목숨 값까지도.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망설임 없이 폭포 아래로 몸을 던졌다. 달려오던 마물들이 물가에서 걸음을 늦추는 것을 보며 나는 눈을 감았다. 첨벙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