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ccolta di racconti bre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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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어느 오후, 풍경만으로 가득한 내 그림에 그녀가 침범했다.


말랑공 씀.




*본 글의 소재는 영광스럽게도 보라해해ㅐㅐ 님께서 주신 소재입니다.




 스위스의 그린델발트, 어느 오후, 새하얀 구름이 분홍빛으로 물들 때,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풍경을 내 스케치북에 담으려 자리를 잡는다. 푸른 초원 위에 담겨있는 갈색빛의 지붕이 위로 솟아오른 집들과 여유롭게 지나가는 시간, 온통 연두색으로 물든 땅. 이 모든 게 너무 아름다워서,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로 너무 아름다워서 내 스케치북에 담아 본다.


 분홍빛 구름이 점점 붉은빛으로 물들어가고, 어두컴컴한 밤하늘이 별빛들만을 허용할 때까지 그 과정을 모두 내 스케치북에 담는다. 그렇게 내 스케치북엔 풍경만으로 가득찬다. 원래부터 풍경화를 좋아하기에. 그런 내가 갑자기 무언가에 홀린 듯 그녀를 그리고 있다. 저녁의 아름다운 그린텔발트와 그녀가 어울리고 낭만적이어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이 그림 같아서 내 스케치북에 담아 본다.


 이번엔 알록달록한 물감이 아닌 오직 연필만을 사용해서 그린다. 그녀와 내 스케치북을 번갈아가며 바라보고, 그리고, 또 그녀와 내 스케치북을 번갈아가며 바라보고, 그리고. 그것을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때즈음 그녀가 분명 있어야 할 곳에 그녀가 사라지고 없다. 내가 너무 스케치북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아직 그녀에 대한 그림을 다 못 그렸는데… 혹여 근처에 있지 않을까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러다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느낌에 뒤를 돌아본다.


 “우와, 이거 저 그리신 거예요?”


 그녀다. 풍경만으로 가득한 내 스케치북에 급작스레 침범한 그녀다. 그녀는 내가 뒤돌아봄과 동시에 내 쪽으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는 내 그림을 보며 감탄한다.


 “아, 네, 네…”


 가까이서 그녀의 얼굴을 보니 너무 설레서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만다. 그녀는 내가 말을 더듬고 시선을 피하는 것 따위 신경쓰지 않고 계속해서 감탄사를 쏟아낸다. 나는 그녀의 칭찬에, 가까워서 내 볼에 닿는 그녀의 숨결에,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내 뒷목을 스치는 그녀의 갈색빛 긴 생머리에 얼굴이 빨개진다. 가뜩이나 낯을 많이 가리는데 그녀와 가까이서 있으니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어색해서 죽을 것만 같다.


 “와, 그림 진짜 잘그리신다. 사실 저도 그림을 되게 좋아하거든요. 아, 그쪽은 그림을 좋아하는 건 아닌가…?”


 “좋아하죠…”


 “그럼 그림 같은 거 많이 그리셨겠네요!”


 “그렇… 죠.”


 “혹시 저 그림 보여 주실 수 있어요?”


 그녀는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내게 스스럼없이 다가온다. 평소같았으면 계속해서 다가오는 낯선 이를 밀어냈을 테지만 왠지 그녀라서, 그녀이기 때문에 밀어낼 수가 없다.


 “네, 뭐… 그래요.”


 “헐, 너무 고마워요! 아 참, 저희 통성명도 안 했네요? 저는 이윤소예요. 그쪽은요?”


 “아, 전 전정국이에요.”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정국 씨!”


 “네, 그래요. 윤소 씨.”


 “우리 번호도 교환할까요? 자주 연락하면서 지내고 싶어서.”


 “좋죠.”


 그녀와 내가 통성명을 마치고 번호까지 교환한다. 그러곤 그녀는 내 스케치북을 구경한다. 인물화는 전혀 없는, 오직 풍경화만 잔뜩 있는 내 스케치북을. 아, 인물화가 하나 있긴 하지. 그녀, 이윤소.


 “풍경화를 되게 좋아하시나 봐요. 사실 저도 풍경화가 제일 좋거든요.”


 “윤소 씨도 풍경화 좋아하세요?”


 “네! 자연의 아름다움, 자연의 낭만적인 사랑, 자연의 비극적인 운명, 사람을 담은 자연… 정말 너무 아름답지 않아요?”


 그녀는 별빛만을 허용한 어두컴컴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한다. 그녀가 내 쪽을 보고 있지 않은 탓인지 벌겋게 달아올랐던 내 얼굴이 식는다. 차가운 저녁 바람에 얼굴이 식은 건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내게서 시선을 뗀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는 여전히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한 그녀의 얼굴. 그녀의 속눈썹은 꽤 길고 코도 오뚝하고 입술은 빠알간 앵두같다. 차가운 저녁 바람을 타고 휘날리는 갈색빛 머리칼은 춤을 추듯 우아하고 아름답다. 희미한 갈색빛이 맴도는 그녀의 눈은 별빛을 담아낸 듯 반짝인다.


 “그러게요, 너무 아름답네요…”


 그녀의 물음에 대답한 것인지 그녀를 보고 대답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저도 모르게 홀린 듯 대답해버린다. 너무 아름답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