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같은 날이 지나고, 다시 일상.
여주는 회사 탕비실에 멍하니 서 있었다.
잠을 깨기 위해 탔던 진한 블랙 커피는 이미 다 식었는데, 여주는 한 모금도 못 마시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팀장님한테 한참 깨지고 나온 탓이었다. 큰 사고를 친 건 아니었지만, 자기가 맡은 자료에 수정이 엄청 들어갔고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이건 미리 더 확인했어야죠. 이제 그럴 연차잖아.”
그 말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다.
여주는 괜히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오늘따라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아침부터 정신없이 출근했는데 점심도 제대로 못 먹었고, 끝엔 이렇게 혼나기까지 했다.
진짜 너무 속상했다.
퇴근 시간도 한참 지났고, 사무실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여주는 결국 핸드폰을 들었다.
친한 친구 채팅창을 눌렀다.
[나 오늘 진짜 개털림]
잠깐 뒤 바로 답이 왔다.
[뭐야 아직 회사야?]
[응]
[나 근처인데 볼래?]
여주는 잠깐 고민했다.
집에 가서 혼자 누워 있고 싶기도 했는데, 그러면 더 우울할 것 같았다.
[응 나갈래]
짧게 답을 보내고 여주는 가방을 챙겼다.
회사 근처 카페 문을 열자 따뜻한 공기가 훅 들어왔다.
여주는 친구를 찾으려고 안쪽을 봤다가 걸음을 딱 멈췄다.
친구 맞은편에 전정국이 앉아 있었다.
“…뭐야?”
여주 입에서 바로 말이 튀어나왔다.
친구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오히려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왜 그렇게 놀라. 둘이 완전 남도 아니잖아.”
“아니, 그래도.”
“저번에 보니까 얘기도 잘 하던데 뭐. 근처에서 마주쳤어.”
너 만난다니까 자기도 오겠다던데.
여주는 여전히 당황스러웠다.
정국은 별말 없이 여주를 한 번 올려다봤다.
“앉아.”
짧은 한마디에 여주는 더 애매한 기분이 됐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다시 나갈 수도 없어서 결국 자리에 앉았다.
그때 친구가 여주 앞에 컵을 밀어줬다.
“이거 네 거.”
여주는 컵을 봤다.
따뜻한 캐모마일차였다.
“…이거 내가 좋아하는 거잖아.”
친구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시킨 거 아님.”
여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정국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아까 너 들어오기 전에 뭐 마실지 물어보길래.”
“…그래서 네가 이걸 골랐다고?”
“응.”
괜히 심장이 또 이상해졌다.
별거 아닌데.
진짜 별거 아닌데, 하필 좋아하는 캐모마일차라서 더 그랬다. 여주가 기분 안 좋을 때 따뜻한 거 찾는 거, 예전부터 정국은 알고 있었다.
여주는 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고마워.”
정국은 그냥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친구가 여주를 보며 물었다.
“그래서 왜 그렇게 털렸는데?”
여주는 한숨을 쉬며 회사 얘기를 꺼냈다.
자기가 맡은 자료에 수정이 엄청 들어갔고, 팀장님한테도 한 소리 들었고, 오늘따라 다 꼬여서 진짜 기분이 최악이라고.
말하면서도 괜히 짜증이 났다.
다시 생각하니까 더 속상했다.
“열심히 했는데, 나랑 이 일이랑 안 맞나 싶어.”
친구가 바로 맞장구쳤다.
“아이고 우리 여주 속상했네.”
여주는 입술을 삐죽였다.
“진짜 너무 짜증 나.”
그때 정국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속상했겠네.”
여주는 바로 고개를 들었다.
그게 끝이었다.
정국은 더 길게 말하지도 않았고, 괜찮다고 달래지도 않았다. 그냥 그 한마디만 툭 꺼냈다.
이상하게 그 말 하나가 더 위로가 됐다.
생각해보니까 원래 그랬다.
전정국은 늘 이런 식이었다. 처음엔 나한테 별 관심도 없는 줄 알았다. 말수도 적고, 무슨 생각 하는지도 잘 안 보여서. 그런데 꼭 여주가 진짜 힘들 때만 저렇게 한마디씩 했다.
속상했겠네.
괜찮아.
밥 먹었어?
별거 아닌 말 같은데, 꼭 이상하게 마음에 남는 말들.
그럼 지금은?
그때랑 똑같은 지금은?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여주는 얼른 고개를 푹 숙였다.
에이, 설마.
괜히 혼자 의미 부여하는 것 같아서 더 민망해졌다.
-
오늘 정국은 정말 몇 마디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제 얘기를 들어주러 온 건가.
여주는 괜히 캐모마일차를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향이 올라오자 긴장이 조금 풀렸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오늘 회사에서 깨지고 완전 엉망이었던 마음이
지금 이 자리에서, 조금씩 다시 흔들리고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이유가 전정국이라는 게 제일 문제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