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GAME[連載中断]

Gravatar


IN GAME

NO. 08

W. 설하

"율리아, 얘야!"

무엇이 그리도 급했을까, 마차가 멈춰 서자마자 급히 달려 나와 나를 꼬옥 껴안는 오르테 공작부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새어 나왔다. 다녀왔어요, 어머니-, 하는 내 말이 그리도 감격스러웠던지, 그 큰 눈에 눈물방울을 대롱대롱 매달고는 연신 내 뺨을 쓸어보는 것이었다. 얼굴이 반쪽이 됐네, 하는 그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지만. 난 분명 잘 먹고 잘 잤다.

"어서 와, 율리아."

"…오라버니,"

"고생 많았어 내 동생."

고운 볼에 쏙 들어간 보조개가 예뻤다. 알엠은 언제나 그러했듯 다정했으며, 나는 그 다정함이 기꺼워 얼굴을 구기며 활짝 웃어 보였다. 오르테 공작저, 한 달간 이곳에서 느꼈던 바와 같이 이곳에선 여전히 다정함이 흘러넘쳤다.

짧은 시간이었대도 흘러간 시간은 시간인지라,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편안해진 율리아의 방은 언제나 그러했듯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나는 오랜 여행길에 지친 몸을 침대 위로 뉘었다. 폭신한 이불이 내 몸을 감싸옴과 동시에, 내 시중을 전담하는 미아의 잔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외출복으로 침대에 누우시면 안 돼요!"

"으으, 미아…, 너무 피곤해서 그래…."

"…그래두요! 향유를 푼 목욕물을 준비하라 일렀으니, 몸을 좀 녹이신 후에 쉬는 건 어떠세요, 아가씨?"

"그럴까?"

목욕을 돕겠다며 발 벗고 나서는 미아의 도움을 받아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다. 달큼한 장미 향이 물에서부터 은은하게 퍼져 나왔다. 그 노곤노곤한 기운에 못 이겨 물에 몸을 담근 채로 눈을 반쯤 감았다. 노련한 시녀의 손길이 내 몸 여기저기에 닿았다.

"북부는 어떠셨어요, 아가씨?"

"북부? 음…, 그냥 그랬어. 아, 아카데미는 생각보다 크더라구. 더 구경하고 싶었는데 출입을 제한시켜서 좀 아쉬웠어."

"아카데미 입학시험의 보안이 무척 까다로우니까요. 입학하신 후에 둘러봐도 충분하실 거예요!"

"입학…, 응, 그렇지."

"소공작님과 같은 학부시죠? 나중에 소공작님께 아카데미 안내를 부탁드려도 되겠어요!"

미아의 말에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학부가 아니라는 사실이 내 양심을 콕, 콕, 찔러왔다. 응, 그래야지…, 하는 떨떠름한 내 대답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미아는 열심히 내 머리를 감겨줄 뿐이었다.

"어후, 어깨가 많이 뭉치셨어요, 아가씨."

"그래?"

"네, 이따 마사지를 좀 해드릴까요?"

"아니야. 오늘은 그냥 쉴래. 너무 피곤해…. 내일 부탁해도 될까?"

"물론이죠! 오늘은 그냥 주무셔요. 모처럼 집에 돌아오셨으니까 푹 쉬셔요!"

…응, 그럴게. 아랫입술이 살짝 물에 잠긴 탓에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집, 집이라. 나는 미아의 손길을 고스란히 받으며 생각했다. 어느새 이곳이 집이 되어버렸나? 돌아왔을 때, 아늑함을 느끼는 곳? 오르테 공작 저의 사람들은 확실히 다정했다. 모두가 친절했고, 모두가 공작가의 막내 공녀를 아낀다. 하지만,

"끝났어요, 아가씨! 따로 시키실 일이 있으세요?"

"아니, 나가봐도 돼!"

"시키실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뭉친 다리 근육을 풀어주고, 뽀송뽀송한 잠옷을 입는 걸 돕고, 내 머리카락을 말리고 곱게 빗어내린 후 향유까지 발라준 미아가 생긋 웃어 보였다. 빨랫감을 들고 미야가 내 방을 빠져나간 뒤에야 나는 침대에 늘어져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피곤해, 침대에 엎어지다시피 누운 채 눈을 가만히 감았다.

하지만, 이곳의 친절함과 다정함은 '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집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엄연히 율리아의 것이었으며, 나는 율리아의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중일뿐이었다. 율리아로서의 삶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절대 익숙해지리라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결코 율리아가 될 수 없었다. 율리아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러니 내게 이곳은 집이 아니었다. 집이라기보다는, 머리를 맹렬히 굴려 빠져나가야 하는 호랑이 굴과도 다름없는 곳이었다.

몸을 일으켰다. 엎어져 생각만 한다 해서 바뀌는 건 없다. 나는 미아가 밝혀둔 초를 책상 위에 올려둔 뒤, 서랍에 있던 종이 한 장을 꺼내들었다. 손에 익지 않은 깃펜의 촉을 잉크에 잘 적신 뒤, 나는 새하얀 종이 위에 글자들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율리아의 유려한 필체로, 제국어가 하얀 종이를 채워나갔다. 평범한 안부 인사가 전부인 편지 한 장,

'추신, 언제가 좋을까?'

마지막, 단 한 줄의 한국어. 분명 평생을 사용해온 한국어임에도, 율리아로써 한국어를 사용하려니 어색한 감이 없지 않았다. 낯선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나는 천천히 편지지를 접었다. 글자가 번지지 않도록 신경 쓰며, 깔끔하게 접은 편지 한 장을 편지봉투에 넣은 채, 초로 밀랍을 녹인 뒤 그 위로 인장을 꾸욱 눌러 찍어냈다. 오르테 가문의 상징, 백합이 그려진 문장이 새겨졌다. 나는 침대 근처에 달려있는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잠시 뒤,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미아가 방으로 들어섰다.

"미아, 이 편지를 좀 전달해 줄래?"

"예, 아가씨. 어디로 보낼까요?"

"음…,"

나는 내려놓았던 깃펜을 들어, 편지봉투 위로 글자들을 휘갈겨 썼다. To. V, 낯선 이니셜들이 새카만 잉크로 쓰였다.

"메를린 거리, 대장장이 로시아에게로."

IN GAME

쌉싸름한 맛이 혀끝을 맴돌았다. 새콤하게 느껴졌던 차의 향과는 퍽 다른 맛이었다. 차의 끝 맛이 생각보다 더 쓴맛이라, 나는 나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살풋 찌그러진 내 미간을 본 알엠이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달칵, 하며 찻잔을 내려놓은 그가 포크로 접시 위의 타르트를 잘게 잘라 집어 들었다.

"좀 씁쓸하지?"

익숙하게 내 앞으로 포크를 내민 그를 잠시 바라보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입을 벌려 그것을 받아먹었다. 달달한 딸기맛 시럽이 끈적하게 내 입안을 맴돌았다. 맛있다. 달달함에 자연스레 펴진 내 미간을 본 알엠이 다시금 낮게 웃는 것이 보였다. 자몽 차, 상큼한 향과는 달리 달콤 쌉쌀한 맛을 내는 차와 딸기 타르트의 조합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율리아,"

"응?"

"군사학부에 지원했다며?"

찻잔을 들어 올리던 내 손이 멈칫거렸다. 형에게 들었어, 하며 이어지는 알엠의 말에 나는 들어 올렸던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뚫어지듯, 나를 바라보고 있을 알엠의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는 찻잔과 타르트가 담긴 접시, 그 사이 어디쯤을 애매하게 쳐다보며 그의 눈을 피했다. 금방이라도 왜 그랬냐는 호통과 질책이 날아올 것만 같았다.

겁이 나는 걸까? 어쩌면 진이 그랬던 것처럼 알엠 또한 나를 탓할지도 모른다. 왜 널 걱정해 주는 내 마음을 몰라주냐며 속상해하고, 서운해할지도 모른다. 그럼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진에게 그랬던 것처럼 모진 말을 내뱉어야 하나, 그도 아니라면,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해야 할까. 대답이 없는 내 모습에서 긍정의 의미를 알아챈 것인지, 알엠이 입을 열었다.

"왜 하필 군사학부였어?"

나는 내 선택이 '납득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것이 싫었다. '율리아'를 걱정하는 마음에서부터 우러러나온 마음이라 해도 전혀 기껍지 않았다.

"그냥,"

"……."

"그냥, 그러고 싶었어."

어쩌면 내 모든 생각들은 그저 궤변에 지나지 않을 뿐일지도 모른다. 나도 알고 있다.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율리아이고, 내가 그녀의 몸에 들어와 하는 모든 선택들은 율리아의 선택이 아닌 '나'의 선택이라는 것을.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그들이 율리아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는다며 기분 나빠할 자격이 내게 있을까? 나는 내 선택을, 율리아의 선택으로 포장한 채 그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 그렇구나."

"…?"

"몸조심해야 해. 네가 다치면 슬퍼할 사람들이 많거든."

고개를 치켜들었다. 줄곧 나를 바라보고 있던 알엠의 눈을 마주하자, 그의 눈이 곱게 접혔다. 양 뺨에 자리 잡은 보조개가 움푹 파였다. 내 모든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알엠은 그저 다정한 미소만을 보여줄 뿐이었다.

"…화내지 않아?"

내가 물었다. 반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이 세게에 와, 처음으로 온전히 받은 '선택에 대한 존중'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알엠은 내 물음을 듣고는, 제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더 들이켠 뒤에야 입을 열었다.

"네 선택이니까. 난 네 선생도 아니고, 네 인생을 책임져줄 사람도 아니고, 그저 네 오라버니일 뿐이지."

"……."

"네가 하는 모든 일들에 대한 옳고 그름의 판단은 네 몫이야."

글쎄, 그 말이 왜 그리도 벅차게 들렸는지, 나는 모를 일이었다. 나는 웃었다. 벅차고 설레는 마음을 웃음 속에 감춘 채로, 나는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우리는 그 뒤로도 한참 동안이나 함께 티타임을 가졌다. 일상적인 대화들이 오고 가고, 이따금 내 기억의 상태를 묻는 알엠의 질문에 잘 둘러대가며, 어쩌면 진짜 '율리아'가 있었던 때의 모습이 이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끔 만드는, 그런 시간을 보냈다.

"아가씨, 아가씨 앞으로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나는 시녀가 건넨 봉투를 받아들었다. 무늬 하나 없는 밋밋한 봉투. 나는 그것의 정체를 쉽사리 예측할 수 있었다. 이틀 전 보낸 편지에 대한 답신이 틀림없다. 시녀가 함께 가져다준 페이퍼 나이프로 민무늬의 봉투를 찢어낸 뒤 편지를 집어 들었다. 역시 무늬 하나 없는 백색의 종이에 적혀있는 편지였다. 나는 곱게 접힌 종이를 펼쳐든 뒤, 그 안에 적힌 내용들을 줄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오르테 공녀님께,

잘 도착하셨다니 제 마음이 놓이는군요.

짧은 만남이나마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

·

·

아카데미에서의 만남 또한 기꺼이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반테 라 루미안]

"그러고 보니, 그새 친구도 사귀었다지?"

알엠의 말에 나는 빙그레 웃어 보일 뿐이었다. 서신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뒤, 한 모금가량 남은 차를 비워낸 나는 망설임 없이 몸을 일으켰다.

"답신을 써야겠어. 먼저 올라가도 될까?"

"원하는 대로 해."

알엠이 말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서신을 들고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그저 평범한 안부 인사가 적힌 말들뿐이었다. 어디까지나, 남들이 보기에 그러했다는 말이다.

'추신, 보름달이 뜨는 날.'

한국어로 적힌 단 한 개의 문장. 남들 눈에야 그저 낙서에 불과한 것으로 보일 그 문장을 곱씹으며 나는 저택의 계단을 올랐다. 보름달이 뜨는 날, 오늘 밤이었다.

/

저택은 고요했다. 모두가 잠에 빠져든 시간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만월, 가득 찬 달이 창 너머에 떠올랐다. 미리 챙겨두었던, 언젠가 미아가 아무도 모르게 구해다 준 총집에 시스템에게 받았던 리볼버 하나를 집어넣었다. 잠옷 치마를 걷어내고, 허벅지에 어설픈 손놀림으로 총집을 매단 나는 다시 잠옷 자락을 끌어내렸다. 역시, 얇은 잠옷이라 그런지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상관없나? 어차피 방 밖으로 나가는 건 아니었으니까.

서랍에 숨겨두었던 파란 돌을 집어 들었다. 처음 모습과는 다르게 그것은 반쯤 부서진 채였다. 바닥에 내려놓은 돌을 있는 힘껏 밟으니, 콰득-, 하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언젠가 경험한 적이 있는 감각이었다. 율리아의 방이 조각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것은 파란 조각들이 되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안녕,"

낯익은 목소리였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눈을 떴다. 후드를 깊게 눌러 쓴, 그럼에도 어딘가 익숙해 보이는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안녕, 하며 늦은 대답을 건네자, 왜인지 딱딱하게 굳어있던 그 얼굴이 사르르, 풀리는 것이 보였다.

"…잠옷?"

"아, 몰래 오느라…. 뭐, 굳이 차려입는 것도 웃기잖아?"

뻔뻔스러운 내 말에 김태형의 얼굴이 살짝 찌푸러지는 것이 보였다. 깊은 한숨을 내쉰 그는 이내 죄다 부서져 가루가 되다시피 한 조각들을 내밀었다.

"도망칠 때 꽤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1회용이라 아쉽게 됐어."

"어쩔 수 없지, 억지로 부숴서 나눠가진 거니까 성능이 떨어질 수밖에."

나는 그의 손에서 부스러진 돌조각들을 미련 없이 툭툭 털어내며 말했다. 공간의 돌, 언젠가 내가 그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사용했던 아이템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이템이라 김태형과 나눠갖기 위해 억지로 돌을 부숴 남은 이동 횟수를 모두 소진해야 했지만, 어쨌든 둘 다 무사히 아공간으로 오게 되었으니 원래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대체 이런 곳은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시스템의 도움을 좀 받았지."

"네가 말했던 그 목소리 말이지."

응, 맞아. 하며 나는 거리낌 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오늘도 시녀들과, 그리고 알엠과 공작저 여기저기를 돌아다닌 탓에 다리가 아팠다. 모로 보나 제국의 공녀가 할 법한 행동은 아닌지라, 태형이 잠시 고개를 치켜들고 '세상에…,'하며 중얼거리는 것이 고스란히 들렸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저 파란 벽들로 둘러싸인 공간을 둘러보던 그도 마지못해 바닥에 주저앉긴 했지만.

우리가 이 공간의 돌을 통해 만난 이유는, 남들의 시선을 피해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시스템이니 뭐니 하는 수상쩍은 단어들을 남발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김태형은 편하게 앉아있는 날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저가 아는 시스템에 대한 것들을 천천히 알려주기 시작했다. 작게는 상태창을 여는 법부터, 크게는 스탯 포인트를 사용하는 법까지. 엉망진창인 내 상태창 때문에 내 레벨이 몇인지, 스탯 포인트는 얼마나 남았는지를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감으로 찍어 맞춰야 한다는 사실만 빼면 그래도 퍽 유용하게 쓰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스템이라는 존재를, 여기서 만난 거야?"

저가 알려준 것들을 천천히 복습하고 있는 내게 김태형이 물었다. 응, 맞아. 하는 내 대답에 눈썹을 긁적거리던 김태형이 말했다. 그럼 지금 우리 모습도 다 보고 있는 건가? 그의 말에 나는 상태창에 박혀있던 시선을 뗀 채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아마, 다 보고 있을걸, 하는 내 대답에 그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존재인 건 맞고?"

"누구, 시스템?"

"응, …널 의심하는 건 아니야. 나는 그 시스템이라는 존재에 대해 아예 모르고 있기도 했고, 그냥, …네가 너무 쉽게 그 존재를 믿어버린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

변명처럼 주절거리는 김태형의 말에 나는 작게 웃어 보였다. 걱정 마, 오해 안 했으니까 하는 내 말에 그제야 안심한 듯, 주절대던 입을 꾹 다무는 그였다.

"솔직히 나도 의심을 안 해본 건 아닌데…."

"……."

"일단은, 이 세계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고. 또 결과적으로는 나한테 좋은 일만 해주게도 했고…. 참, 저번에 시스템이 준 총, 여기서 한번 쏴보려고 했는데."

허벅지에 매어둔 총집에서 리볼버를 꺼내기 위해 잠옷 치마를 살짝 들췄다. 미친, 뭐해! 하며 김태형이 기겁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리볼버를 꺼낸 뒤 치마를 내렸다. 목부터 귀 끝까지 붉어진 김태형의 얼굴이 보였다. 뭐 이런 걸로 그래? 하는, 태연하기 짝이 없는 내 말에 그는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는 무슨, 애가, 조심성도 없이…! 더듬더듬 무어라 계속 말하는 김태형을 깡그리 무시한 채, 나는 리볼버를 만지작거렸다. 로시아한테 맡겼던 것도 확인해야 되는데. 익숙한 손놀림으로 리볼버를 만지작대던 나는 총알을 장전한 채 새파란 벽에 총구를 겨누었다. 쫑알쫑알 떠들어대던 김태형도 어느새 입을 꾹 다물고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번 쏴 볼까, 하며 방아쇠를 당기려던 순간에 벽 중앙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희끄무레한 빛에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뭐야, 나 쏘려고?]

익숙한 목소리에 멍하니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빛무리 사이에서 누군가가 툭,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설마, 저게 시스템인가? 하는 의문을 담아 새까맣게 보이는 인영을 빤히 바라보자, 키득키득,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허리춤에 있던 단검을 꺼내 바짝 긴장하고 있는 김태형과 달리, 나는 낯선 인영을 향해 겨누었던 총구를 서서히 내려보았다.

[그 총, 내가 준 건데. 너무하네….]

"…무슨,"

"…시스템?"

[오랜만이야, 율리아!]

어느새 사그라든 빛무리 사이로 남성의 인영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훤칠한 키, 말랐지만 탄탄해 보이는 몸,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진 남자가 웃어 보였다.

/

남자는 자신을 '지민'이라 소개했다. 이 아공간의 주인이자, 우리의 전직을 도운 시스템이기도 했다. 김태형은 여전히 지민을 향해 경계하며 그의 말을 믿지 않는 듯한 눈치였지만, 내가 목소리가 시스템의 것이 맞다는 말을 하자 마지못해 단검을 허리춤으로 집어넣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손놀림이었다.

[안 그래도 널 부르려 했는데, 직접 와준 덕에 수고를 덜었어,]

남자, 그러니까 지민이 손을 튕길 때마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가령, 지금 내가 앉아 있는 꽤 푹신푹신한 의자라던가, 그 앞에 생겨난 테이블이라던가, 테이블 위를 장식한 갖가지 간식들과 차 따위라던가. 눈 돌아가게 신기한 장면들은 지민이 이 공간의 주인이라는 것을 다시금 인정하도록 만들었다.

[둘이 노는 거 보고 언제쯤 끼어들면 좋을까 하는 고민을 하긴 했지만 말이야. 어때, 너네 둘 생각보다 잘 맞지?]

"잘 맞긴 개뿔이…."

"…김태형 너 말 좀 서운하게 한다? 됐고, 지민, 아무튼 왜 부르려 했는데?"

오류에 대해 알아낸 게 있어? 하는 내 물음에 김태형이 그제야 불퉁하던 표정을 풀었다.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퍽 진지해지는 표정에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마저도 [알아낼 수밖에 없지. 명색이 이 세계의 관리자인데.]하는 지민의 대답에 얼굴에서 지워내야 했지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 뭐부터 들을래?]

보통 이런 건 좋은 조식보다 나쁜 소식이 더 파급력 있던데.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대는 지민을 보며 나는 얼굴을 구겨트렸다. 좋은 소식…,

[일단, 네 오류 난 시스템을 복구시키는데 성공했어. 어느 정도는 말이지. 스킬도 몇 개 추가해뒀으니까, 확인해 봐.]

"나쁜 소식은?"

[음…,]

지민이 무언가를 말하기를 망설이는가 싶더니, 이내 상태창을 한 번 켜보라며, 내게 말했다.

"상태창 확인,"

[플레이어 : 율리아 비안 오르테 / ? 혜 ?]

직업 : 블래스터

칭호 : 이름을 잊은 자

레벨 : 로딩 실패(ERROR/09)

스탯 : 체력 (LV. 3)

운 (LV. 측정불가)

민첩 (LV. 2)

지능 (LV. 2)

힘 (LV. 3)

패시브 스킬 : ?사수 (LV. 1)

?릿 부?? (LV. 1)

인피?티 불? ( LV. 1)

스킬 트리 : 해당 없음.

진행 중 : [?인 퀘?트 : 아카?미] 외 2

완료 : [?인 퀘?트 : ?직]

·

·

·

사용자를 조회할 수 없습니다.

원본 오류

스크립트 오류

정보 조회 불가능

ERROR CODE : 09

시스템 권한 : 없음

[나쁜 소식은, 내가 네 상태창 복구에 실패했다는 거지.]

여전히 내 상태창은 수많은 물음표들로 가득했다. 의문투성이인 것들. 이름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스킬조차 알 수 없는 상태창. 달라진 거라고 해봐야, 아주 약간 상승한 스킬들의 레벨이라던가, 퀘스트 목록의 변화가 전부였다.

[그리고 부작용도 있어.]

"부작용? 무슨 부작용, 설마…."

[너희가 아니라, 나한테 생긴 부작용이니까 걱정 마.]

지민이 제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해 보였는데, 그의 오른쪽 팔의 절반이 반투명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해 보자면, 노이즈 그 엇비슷한 것들이 그의 손에 나타나 있었다. 꼭 고장 난 모니터 화면을 보는 것 같았다. 쉴 틈 없이 지지직거리며 형태를 일그러트린다. 지민의 팔로 시선을 옮긴 김태형의 표정 또한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거 왜 이래? 하는 내 말에 그는 [영광의 상처?] 따위를 지껄이긴 했지만.

[생각보다… 그 오류를 만들어낸 놈이 꽤 똑똑하더라고? 함정을 만들어 놨어. 내가 오류에 접근하면 할수록, 그쪽에서 내 정보를 가져갈 수 있도록.]

"…정보를 빼앗겼다는 뜻이야?"

"[그럴 뻔했지. 내가 막긴 했지만. 아무튼 그 부작용이라고 생각하면 돼. 난 이제 곧 형태를 유지하는 것도 힘들어질 거야.]

"그건 네가 사라진다는 뜻인가?"

"사라져…?"

[아니, 아니야. 내가 사라지는 게 아니고 내 '형태'가 사라지는 것뿐이야. 이 세계와 원래 너희들의 세계가 사라지지 않는 한, 난 없어질 수 없어,]

'너희들의 세계', 그 말 한마디에 김태형이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저번 만남에서부터 쭉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을 입에 담았다. 언젠가 김태형과도 나누었던 대화이기도 했다. 왜 우리였을까? 김태형은 그렇게 말했다.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 세계로 난데없이 떨어져야만 했던 사람, 그게 왜 하필이면 우리였는지,

"왜 하필 우리였어?"

내가 물었다. 지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시스템, 그러니까 지민은 일전에 내게 날 이 세계로 데려온 것이 자신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첫 만남 때였지. 나를 직접 이 세계로 데려온 게 그라면, 어째서, 왜 하필이면 나여야 했는지, 그 이유 또한 설명해 줄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나는 기어이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지민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결코 내가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다.

[몰라. 왜 너희여야만 했는지.]

"…네가 우리를 이 세계로 데려온 거라며,"

[으음…,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어쨌든 문장 자체만 보면 그닥 틀린 말은 아니긴 해?]

수수께끼 같은 그의 말은 내 혼란만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무참히 일그러지는 내 표정을 똑바로 마주한 지민이 흠칫했다.

[그런 야차 같은 표정은 짓지 말고…. 아무튼, 난 정말 몰라. 왜 너희여야 했는지. 전에도 말했다시피, 난 그저 그분의 명령을 수행할 뿐이라니까? 그러니 네 궁금증을 풀어줄 만한 존재는 내가 아닌 '그분'이 되겠지.]

"그러니까, 그 '그분'은 뭐 하는 존재인데? 누군데?"

[그건 말할 수 없어. 직접 뵐 날이 언젠간 오겠지. 아무튼, 그 질문은 이제 넘어가 주면 안 될까? 내가 널 부르고자 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한 마디도 못했다고.]

지민이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제 왼팔마저 들어 보였다. 이제는 형체가 아예 사라져버린 오른팔과, 반투명해지며 노이즈가 끼기 시작한 왼팔, 시간이 없다는 지민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음을 느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내가 말하자 지민이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천천히 설명하되 한 번밖에 못 해줘. 질문은… 그럴 시간이 있으려나 모르겠네. 생각보다 붕괴가 빨라서. 아무튼, 너희도 알고 있는 사실부터 차근차근 말해보자면, 너희를 이 세계로 불러들이고자 한건 '그분'의 뜻이고, 나는 그분의 명령을 따라 너희들을 이 세게에 불러들였을 뿐이야.]

지민이 테이블에 있는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곧 형체조차 남지 않을 존재 치고는 태연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왜 하필 너희들이었는지, 그 자세한 이유는 나도 잘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게 우연은 아니었단 소리야. 너희들을 비롯한 플레이어들은 어떠한 목적에 의해 이 세계에 오게 되었고, 너희들에게 부여되는 '메인 퀘스트'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돕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거라 보면 돼. 그런데,"

"……."

[누군가가 그 '메인 퀘스트'를 다루는 시스템에 접근했어. 쉽게 말하자면 해킹이랑 비슷해. 아마도 여기에 접근하기 위해 사용한 매개체가 너, 율리아의 시스템이었던 것 같아. 추측일 뿐이지만.]

"…나를 통해서 시스템, 그러니까 네가 다루는 그 정보들에 접근했다는 소리야?"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높아. 그렇게 울상 안 지어도 돼. 네 탓 아니니까. 아무튼 이게 왜 문제가 되냐면, 나를 해킹하는데 성공하게 되면 '메인 퀘스트'를 마음대로 부여할 수 있게 되거든. 그런 권한이 생겨. 그 권한을 이용해서 그놈이 '그분'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너희들에게 퀘스트를 부여한다면?]

"……."

[너희들은 그 퀘스트를 따를 수밖에 없어. 페널티에 '사망'을 넣어두면 그 퀘스트는 강제성을 띨 수밖에 없으니까.]

"…와, 미친."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하나야, 언제나 메인 퀘스트의 목적에 대해 생각하라는 것.]

"그 목적이 뭔데?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랑도 관련되어 있을 거 아니야, 그 목적이라는 게."

[맞아, 그래서 그 목적에 대해 설명해 주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시간이 좀, 많이, 모자라네?]

지민이 웃으며 말했다. 팔 뿐만 아니라 하체마저도 투명해진 그의 몸뚱어리가 보였다. 아마도 지민의 힘으로 유지되고 있었을, 이 청(靑)의 아공간 또한 미세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중요한 이야기는 시작하지도 못했다. 점차 무너져내리는 벽들을 보며 나는 지민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힌트, 힌트라도 줘, 빨리!

[힌트, 어…, 아 그래, 이 세게에 있어선 안될 것을 찾아.]

"있어선 안될 것?"

[이 세계는 원래 너희 세계와 비슷하게 흘러가야만 하는 세게야. 하지만 너희도 알다시피,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되어버렸지. 이게 힌트야.]

"그건 또 무슨 말…,"

[미안한데 이제 진짜 시간이 없어서. 궁금한 게 많을 텐데, 큰 도움을 못 줘서 미안하고-,]

새파란 벽이 갈라진다. 자그마한 균열이었던 그것은 이제 거대한 틈이 되어 공간을 바스라트렸다. 지민이 이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손짓했다. 이제는 형체만 겨우 남은 왼손으로 살랑살랑, 손을 흔든다.

바닥이 갈라졌다. 김태형이 재빨리 나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파란 바닥이 갈라진 틈은 온통 새카만 어둠뿐이었다. 무(無). 아무것도 없는 곳. 무너져가는 바닥을 한 번, 우리를 한 번 보던 지민이 왼손을 들어 올렸다. [헤어질 시간이야-,] 태연한 음성이 들려왔다.

완전히 갈라진 새파란 벽들이 미친 듯이 솟아올랐다. 공간을 둘러싸던 벽이 깨지는 소리가 소란했다. 수많은 파란 조각들이 흩날렸다. 그 사이로, 지민이 여유롭게 웃으며 사라진 팔을 열심히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카데미에서 봐,"

"…그래,"

김태형이 대답했다. 옅은 웃음을 내보이던 그가 이내 새파란 조각들에 휩싸여 사라졌다. 나는 눈을 감았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들이 내 머리카락을 흩뜨리며 지나쳤다. 

그리고, 다시금 눈을 떴을 때, 나는 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익숙한 방이었다. 이제는 감히 '내 방'이라 칭할 수 있을 정도로. 혹여나 누가 이상함을 알아챌까, 꼭꼭 닫아두었던 창문과 빈틈없이 쳐둔 커튼마저도 아까와 다를 게 없었다. 누군가 들어온 흔적도 없었으며,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태형의 편지마저도 제자리에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몸을 굳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침대에서,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누군가를 마주한 뒤로, 나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으며,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너,"

목소리가 잔뜩 잠겨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꾹 눌러두는 듯한 목소리 같기도 했다. 일그러지는 얼굴을 마주하고는, 변명의 말이라도 꺼내려 나는 입을 달싹였으나,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없었다. 어떠한 말조차, 입에 담을 수가 없다.

"너, 율리아가 아니구나."

"……."

"그럼, …그럼 넌 누구지?"

혼란스러워 보이는 진의 두 눈을 보며, 나는 두 눈을 꾹, 감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