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契約

***

소파에 앉자마자 뱉은 첫마디가 여기서 살라는 말이라니,

여주는 황당함에 넋이 나간 채로 정한을 쳐다본다.

정한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사글사글한 미소를 머금고는 찬찬히 설명해 주려 입을 뗀다.

아까 남성을 죽였을 때와는 다른 호의적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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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너와 손을 잡았을 때 지금껏 느껴보지 못 했던 포만감을 느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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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너도 알다시피 뱀파이어들은 음식을 섭취하지 않고 인간이나 동물의 피를 먹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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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근데 아무리 먹어도 이만큼의 포만감은 느낀 적이 없었어.

이여주

그러니까 저와의 그 짧고 간결한 스킨십에 포만감을 느꼈다는 말씀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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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그런 거지.

이여주

지금 이 말, 굉장히 변태적인 거 아시죠?

정한은 여주의 말에 소리를 내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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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해,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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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별다른 흑심은 없고, 그저 손만 잡아주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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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손등만 닿아도 되고.

이여주

여기서 살면서 저보고 그런 에너지 공급이나 하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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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에너지 공급이라…… 그것도 맞는 말일 수 있겠네.

여주는 그가 자신을 그저 물건 취급으로밖에 하지 않는 것이냐는 질문에 크게 반박하지 않자 어쩐지 씁쓸함이 밀려온다.

하지만 전에도 말했듯 여주에게 선택의 여지란 없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이곳에 있는 게 훨씬 안전할 것이다.

이여주

알겠어요.

이여주

그렇게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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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그렇게 결정해 줘서 고마워,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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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그럼 혹시 모를 불안함이 있을 수 있으니 계약서에 사인이라도 할까?

정한이 식탁 위에 놓여있던 A4용지를 손으로 쓸어내리자 그와 닿는 데 족족 글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여주

이것도 뱀파이어의 능력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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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응, 신기하지?

이여주

호그와트에 있어야 할 사람이 잘못 온 것 같은데.

여주의 실없는 농담에 정한은 웃음을 터트린다.

사글사글하게 웃어도 냉철함은 감추지 못 했던 얼굴이 어느새 부드럽고 달콤함만을 드러내고 있다.

그가 이렇게까지 흐트러진 적이 있었나.

차를 가져오던 지수는 잠시 멈칫한 채 그의 새로운 모습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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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지수야, 거기서 뭐 해. 너도 와서 앉아.

정한의 말에 정신을 차린 지수가 그들 앞에 차가 담긴 찻잔을 내려놓곤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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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수

웬일이래. 그렇게 웃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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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아가씨가 너무 웃겼나 보지.

정한의 얼굴은 금세 차갑게 굳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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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계약서는 다 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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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뭐 추가하고 싶은 건 없고?

이여주

그나저나 제가 갑이고 그쪽이 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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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응. 그게 뭐 잘못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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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에너지를 주는 쪽이 갑이어야지.

여주는 전부 읽긴 했지만 혹시 몰라 또 다시 한 번 계약서를 훑는다.

몇 번을 훑어봐도 여주가 갑이고, 정한이 을이었다.

그리고 계약서의 내용은 대충 이랬다.

갑은 을에게 짧고 간결한 스킨십으로 에너지를 줘야 하며 을은 갑의 안전을 무조건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이여주

서명하면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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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응. 그러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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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참, 그러고 보니 우리 통성명을 안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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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아가씨 이름이 뭐야?

여주는 계약서에 서명을 하며 말한다.

이여주

이여주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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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이름 예쁘네. 인생의 주인공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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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난 윤정한이야. 쟤는 홍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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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앞으로 잘 부탁해, 아가씨.

이여주

네. 잘 부탁드려요.

정한 또한 계약서에 서명을 함으로써 둘의 계약이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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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근데 이제 반말하는 게 어때?

이여주

그냥 계속 존댓말할게요.

이여주

그게 더 편하고, 반말은……

이여주

너무 친해진 것 같잖아요.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만 지내자구요.

실없는 농담을 했던 아까의 여주는 보이지 않고, 어느새 그녀는 정한에게 선을 긋는다.

정한 또한 그런 여주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비릿하게 웃으며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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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아가씨 성격 되게 마음에 든다.

정한의 몸이 여주 쪽으로 기운다.

그만큼 그녀에게 관심이 가고 흥미가 돋는다는 뜻일 거다.

{띵동- 띵동-}

두 번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정한은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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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한 번만 해도 된다니까……

그는 이미 초인종 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아는 듯하다.

그 초인종 소리의 주인은 아마 이곳에 올 때마다 습관적으로 또는 장난으로 초인종을 두 번 누르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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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아가씨는 잠깐 여기에 있어.

정한이 문을 열어주려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 쪽으로 향한다.

꽤 재잘대던 뱀파이어 하나가 사라지니 여주와 지수의 사이에선 어색한 정적만이 흐른다.

이여주

…지수 씨도 여기서 사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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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수

네, 그렇죠.

지수의 간결한 대답에 여주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계속되는 어색함과 침묵에 여주는 앞으로의 동거가 걱정되는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