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빙의글] 세 번째 결말

17화. 세 번째 결말

새벽같이 집을 나섰다.

자료 가방을 품에 꼭 안고.

동민한테는 그 문자 한 통만 남겼다.

 

"먼저 가 있을게요. 걱정 마요."

 

거짓말이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부터가.

대문을 나서기 전, 손목의 그 깨진 시계를 한 번 쓸어 봤다.

더는 시간을 가리키지 않는 물건인데도, 자꾸 손이 거기로 갔다.

택시를 미리 불러 뒀다. 걷는 것보다 차로 빨리 가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벤치에서 울었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 이제 혼자 안 둔다고, 같이 가는 거라고 했던 그 말도.

그 말을 믿지 않는 게 아니었다.

그냥 혹시 다치게 된다면, 이번엔 나 하나로 충분했다.

 

 

 

*

 

 

 

택시에 올라타자마자, 창밖을 살폈다.

이른 시간이라 도로가 한산했다.

별일 없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신호에 걸려 멈춰 설 때마다, 사이드미러를 흘깃거리는 게 버릇이 됐다.

처음 몇 분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씩 긴장이 풀리려는 참이었다.

 

그러다, 세 번째 신호에서 그 차를 다시 봤다.

회색 승합차. 두 블록 전에도 똑같은 차가 있었던 것 같았다.

 

착각이라고 생각하려 했다.

그런데 다음 신호에서도, 그다음 신호에서도 그 차가 있었다.

 

"…기사님, 혹시 뒤에 저 승합차요."

"아까부터 따라오긴 하네요. 왜요?"

"그냥, 좀 멀리 돌아서 가 주실 수 있을까요."

 

기사가 별말 없이 핸들을 꺾었다.

큰길에서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런데도 백미러 속, 그 차가 계속 따라붙었다.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었다.

휴대폰을 쥔 손에 땀이 뱄다.

동민한테 전화를 걸어 볼까 하다가, 그만뒀다.

전화를 받으면, 분명 뛰쳐나올 사람이었다.

 

"…빨리 좀 가 주세요."

 

택시가 속도를 올렸다.

승합차도 똑같이 속도를 올렸다.

좁은 골목을 빠져나와 다시 큰길로 들어서는 순간, 승합차가 거리를 바짝 좁혀 왔다.

 

옆 차선까지 붙었다.

창문 너머로, 운전석에 앉은 사람의 형체만 겨우 보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어어, 저 왜 저래."

 

기사가 당황한 목소리로 핸들을 꺾었다.

승합차가 그대로 밀고 들어왔다.

차체가 부딪힐 듯 가까워졌다.

 

눈을 질끈 감았다.

두 번의 생에서 겪었던, 똑같은 그림이었다.

 

이번에도, 정말로 여기서 끝나는 걸까.

난 미래를 바꾸지 못하는 걸까.

 

그래도 집에 있을 동민을 생각하면 다행이다 싶었다.

이번에는 너를 살릴 수 있겠구나.

안도감이 들며 눈을 꼭 감았다.

 

 

 

*

 

 

 

그 순간, 굉음이 귀를 때렸다.

유리 조각이 흩날렸다.

택시가 크게 휘청이다 겨우 멈춰 섰다.

 

반대편에서 다른 차가 튀어나와 승합차 옆구리를 그대로 들이박았다.

 

승합차가 밀려나 가로수를 들이받았다.

그 옆으로, 완전히 찌그러진 차 한 대가 비스듬히 서 있었다.

 

낯익은 차였다.

 

"…동민 씨?"

 

설마.

설마 너가 여기 있진 않겠지.

너가 여기 있으면 안돼.

 

힘이 풀려 제대로 걸어지지 않는 다리를 겨우 붙잡고 사고가 난 차에 다가갔다.

운전석 문이 찌그러져 열리지 않았다.

창 너머로, 동민이 핸들에 고개를 기댄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 그랬나.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는 동민을 보니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동민 씨! 동민 씨, 눈 떠요!"

 

깨진 유리 틈으로 손을 넣어 뺨을 만졌다.

따뜻했다.

그런데 반응이 없었다.

 

"…안 돼. 안 돼요, 눈 떠요. 제발요."

 

흔들어도, 불러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숨은 쉬고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손끝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엔진 소리가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오토바이 한 대가 급하게 멈춰 섰다.

운학이었다. 헬멧도 제대로 못 벗고 뛰어왔다.

 

"…형! 형!"

 

상황을 보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겹쳐 들리기 시작했다.

 

"운학 씨, 이거—"

 

가방을 내밀었다.

손이 떨려서 제대로 쥐어지지도 않았다.

 

"오늘 안에, 금감원에 넘겨야 해요. 꼭이요."

"…여주 씨는요?"

"저는 동민 씨랑 갈게요. 운학 씨가 가요. 지금 이걸 넘길 수 있는 사람, 운학 씨뿐이에요."

 

운학이 가방을 받아 들었다. 헬멧을 다시 눌러쓰며, 딱 한마디만 남겼다.

 

"…형, 꼭 살아 있어요. 저 혼자 이거 다 끝내게 하지 마요."

 

그 말을 끝으로 오토바이가 다시 출발했다.

멀어지는 엔진 소리를 들으며, 동민의 손을 꽉 쥐었다.

아직 따뜻한 손이었다.

 

구급차가 도착했다.

들것에 실리는 그 몸이, 어느 생에서보다도 무겁게 느껴졌다

 

 

 

*

 

 

 

응급실 앞 복도에서 몇 시간을 앉아 있었다.

의사가 나와서 말했다.

내출혈이 심해서 바로 수술에 들어갔다고.

지금으로선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고.

 

복도 끝 시계를 몇 번이고 쳐다봤다.

바늘이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수술실 쪽에서 다급한 발소리와 기계음이 들린 순간이 있었다.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다른 환자의 일이라는 걸 알게 되기까지,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두 번의 생이 한꺼번에 겹쳐 보였다.

다리 위에서, 뺑소니 그 길 위에서, 매번 저 사람이 먼저 숨을 놓았다.

 

세 번째도 똑같이 저 사람을 먼저 보내는 거라면.

 

그 생각만으로도 눈앞이 흐려졌다.

복도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지나가던 간호사가 괜찮냐고 물어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

 

 

 

*

 

 

 

몇 시간이 더 지났다.

수술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다시 나왔다.

 

"…고비는 넘겼습니다. 중환자실로 옮길 겁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무너졌다.

그런데도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의사의 얼굴이 썩 밝지만은 않았다.

 

 

 

*

 

 

 

이틀이 지나도록, 동민은 눈을 뜨지 않았다.


중환자실 면회 시간마다 들어가, 손을 잡고 앉아 있었다.

손끝에 온기는 있는데, 반응은 없었다.

 

"…눈 좀 떠요. 운학 씨가 그거 들고 뛰어간 거, 봐야 할 거 아니에요."

 

대답이 없었다. 그래도 매번 똑같은 말을 걸었다.

 

이튿날 오후, 운학이 병실에 찾아왔다.

손에 든 음료 봉투를 내려놓기도 전에, 여주 쪽을 먼저 살폈다.

 

"…여주 씨, 밥은 먹었어요?"

"…모르겠어요. 먹었나."

 

운학이 짧게 숨을 내쉬고는, 옆에 앉았다.

 

"…금감원 쪽, 접수 잘 됐어요. 그날 바로 조사 들어갔대요. 성호 실장이랑 이상혁 이사 쪽, 지금 양쪽 다 조사받고 있다고 연락 왔어요."

"…다행이네요."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운학이 그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형, 꼭 깨요. 저도 알아요. 이 정도로 안 끝날 사람이라는 거."

"…그걸 어떻게 알아요."

"두 번이나 죽었다가도 결국 여주 씨 앞에 다시 나타난 사람이잖아요. 이번엔 죽지도 않았는데, 못 깨어날 리가 없어요."

 

말투는 가벼웠지만, 눈가는 붉어져 있었다.

 

"…여주 씨도 좀 쉬어요. 형 깨면, 여주 씨 얼굴이 이 꼴인 거 보면 더 속상해할 거예요."

 

그 말에 겨우 웃음이 났다. 며칠 만에 처음 웃는 웃음이었다.

 

 

 

 

*

 

 

 

사흘째 되던 날 오후, 손끝이 아주 희미하게 움직였다.

 

"…동민 씨?"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초점이 흐릿하게 흔들리다가, 서서히 얼굴에 맞춰졌다.

 

"…여기, 어디예요."

 

목소리가 갈라져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 한마디에 숨이 터지듯 돌아왔다.

 

"…병원이에요. 동민 씨, 나 알아보겠어요?"

"…바보 같은 질문이네요. 당연히 알죠."

 

힘없는 농담이었다.

그런데도 눈물이 쏟아졌다.

 

"…바보같이. 왜 나와서 이래요. 왜."

 

"…연락 끊기면, 쫓아간다고 했잖아요."

 

그 말에 더 눈물이 났다.

손을 꽉 쥔 채로, 한참을 그 얼굴만 들여다봤다.

 

"…운학 씨가 금감원에 다 넘겼대요. 조사가 진행중이래요."

"…다행이네요."

"다행이 아니라, 동민 씨가 하마터면—"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동민이 힘겹게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 줬다.

 

"…살았잖아요. 이번엔, 진짜로."

 

 

 

*

 

 

 

여섯 달이 지났다.

 

성호와 이상혁의 재판 소식이 뉴스에 나왔다.

선일지주 이사 이상혁, 선일 캐피탈 전 팀장 박성호, 금융감독원 조사 끝에 구속 기소.

자막 아래로 두 사람의 얼굴이 지나갔다.

 

더는 무섭지 않은 얼굴이었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창밖을 봤다.

 

동민과는 반년 전부터 같이 살고 있었다.

퇴원하고 얼마 안 돼서, 동민이 먼저 꺼낸 말이었다.

 

"…혼자 두고 싶지 않아요. 저도, 그쪽도."

 

그 말에 못 이기는 척 짐을 옮겼다.

그러고는 지금까지, 평범한 하루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퇴근 시간, 동민이 손을 흔들며 골목 끝에서 걸어왔다.

뛰지도, 서두르지도 않는 걸음이었다.

 

"…오늘 저녁은 뭐 먹을까요."

"아무거나요. 그냥 같이 먹는 거면 뭐든 좋아요."

 

손을 잡고 걸었다.

큰길로, 인도 안쪽으로. 그 습관은 여전했다.

 

그런데 이제는 긴장해서가 아니라, 그냥 손을 잡고 걷는 게 좋아서였다.

동네 어귀 포장마차 앞을 지나다가, 동민이 걸음을 멈췄다.

 

"…여기, 그때 그 떡볶이집이네요."

 

처음 같이 저녁을 먹었던, 어색했던 그날이 떠올랐다.

 

"…들어갈래요?"

"네. 이번엔 안 어색하게 먹어요."

 

마주 앉아 떡볶이를 나눠 먹으며, 별것 아닌 얘기로 한참을 웃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 가로등 불빛 아래서 동민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기억나요? 그때, 모레 아침엔 그냥 평범한 날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거."

"기억나요. 근데 바로 다음 날 이렇게 됐었잖아요."

"그러니까요. 되게 늦게 왔네요, 그 평범한 날."

"그래도 결국 왔잖아요. 지금처럼."

 

그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동민이 이마를 맞대 왔다가, 천천히 입을 맞췄다.

 

세 번의 삶, 세 번의 결말. 처음 두 번은 죽음이었고, 이번엔 그냥, 함께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저녁이었다.

 

 

 


 

 

 

안녕하세요!! 드디어 완결입니다 ㅎㅎ

이번 팬픽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직물 꼭 써 보고 싶었어서 스토리 구상하고 글 쓰는데 너무 재밌었어요 ㅎㅎ
이번엔 따로 외전은 없을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로맨스에 초점 맞춰서 써 보고 싶은데... 혹시 보고싶은 소재 있다면 언제든 남겨주세요!!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시고 저는 다음 작품으로 돌아오겠습니다ㅎㅎ

감사합니다!🩷

Truyện phổ biến với fan của Taesan